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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접시꽃 당신』, 실천문학사, 1986

♣ 도종환(1954～ ) 충북 청주 출생, 시집『접시꽃 당신』,『고두미 마을에서』

♣  도움말
어느 날 정원 한 켠에 있는 볼품없는 봉숭아꽃을 보세요. 너무나 가엾고 아련하지 않습니까? 몇몇 꽃잎은 벌써 떨어져 있고, 엉거주춤한 모습은 연약하여 불쌍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습니다. 비라도 내려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은 더욱 처량하겠지요. 그 꽃을 포옹해 주고 감싸 안아주고 싶지 않습니까? 그 봉숭아꽃에는 사랑과 미움과 이별과 아픔과 눈물과 그리움과 애틋함과 한이 묻어 있답니다.

♣  관련 내용
긴긴 여름해를 타박타박 넘어오면 지난 4월에 뿌린 봉숭아 씨앗이 어느새 빨강, 분홍, 보라, 주홍, 하양…, 꽃마다 다르게 오색으로 매달려 피어 있음을 본다. 담벼락 아래에도 피어 있고, 절로 가는 산길에도 피어있고, 어디서 씨앗이 날아왔는지 모르나 공해에도 아랑곳없이 도시 후미진 곳에서 잘 견디며 꽃잎을 달고 있다.
줄기와 가지 사이에서 꽃이 피고 그 모습이 꼿꼿하고 우뚝해 봉을 닮았다고 봉선화라는 씩씩한 이름을 갖게 됐다는데-그것이 언제부터 봉숭아라고 불리었는지 알 수 없지만-옛사람들이 그리는 봉숭아는 봉의 기개와는 달리 적적하기만 하다.
조선시대 규방가사를 보면 저 꽃은 말없는 그리움과 한을 보여준다. 고된 길쌈을 끝낸 여름밤, 일하는 아이와 함께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가득 들이니 손톱에 물든 꽃물이 너무 고와 찬탄하다 잠들었는데 꿈속에 한사람이 선연히 나타나 작별인사를 보낸다.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나 생시처럼 마당에 서 있을 것 같아 버선발로 급히 나가보니 지난 밤 풍우에 꽃잎이 가득 떨어져 있음을 본다.
참으로 애석하여라….
그러나 꽃잎은 저렇게 땅에 떨어져 낭자하게 흩어지지만, 손톱에 물들인 그 꽃물은 찬바람이 불어도 그대로 남아있으니 너는 붉은 입술 꼭 다물듯 아녀자의 손톱 위에 오래 남아 절조를 지킨다고 노래하는 마음이 읽는 이로 하여금 더 애석하게 한다.
문장과 시에 출중했던 허난설헌도 봉숭아 꽃물을 들인 손톱이 참으로 곱고 아름답다고 노래했으니, 여인의 마음은 한갓 아녀자이거나 여염집 규수이거나 그 정한은 다를 바가 없는 모양이다.
봉숭아는 우리에게 <봉선화>로 더 알려져 있다. 홍난파가 1920년 바이올린 독주곡인 <애수>라는 곡을 발표한 뒤 작곡가 김형준에게 청하여 가사를 지어 넣으면서 제목을 <봉선화>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3・1운동 직후 민족의 서글픈 운명을 <울밑에 선 봉선화>로 표현하고 수난당하는 민족의 설움을 노래했다해서 일제때는 금지곡이 되기도 했지만 민심을 파고드는 가사와 한국적인 가락 때문에 널리 불리었고, 참으로 많은 이들의 서글픈 심사를 대변하고 위로하기도 했다.
우뚝한 모습이 봉과 닮았다고 해서 봉선화라고 불렸는데, 그 꽃이 우리네 서글픈 심사와 설움을 나타내는 꽃이기도 했으니 오히려 봉의 우뚝한 기세는 문득 서럽기조차 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언젠가 그 설움이 쌓이면 저 전설의 봉처럼 우뚝해지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서양에서 봉숭아는 상당히 슬픈 전설을 가지고 있다. 올림포스궁전에서 신들이 연회를 열고 있었는데 손님으로 참석한 신들에게 대접할 황금사과가 하나 없어져 버렸다. 심술궂은 어떤 신의 장난이었는데, 그날 시중을 들던 한 여인이 의심을 받아 궁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여인은 누명을 벗고자 필사적으로 호소하였으나 결백을 증명하지 못하고 그만 마음이 타서 봉숭아가 되고 말았다. 그래, 누가 결백을 증명하겠는가….
우리 나라에 언제부터 봉숭아를 심었는지 기록이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시대에도 연인들이 그 꽃잎으로 손톱을 물들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아주 옛날부터 우리네와 참으로 친숙한 꽃인 셈이다. 금봉화라 하기도 하고 지갑화라 하기도 하니 이름도 많다. 이름이 많은 것은 그만큼 자주 불려져 왔기 때문일까.
봉숭아 물들이기는 꽃잎을 짓찧은 다음 백반과 소금을 섞어 손톱 위에 얹고 푸른 잎이나 헝겊으로 칭칭 동여매면 된다. 더러 새끼손톱에 물들인 꽃물이 첫눈 올 때까지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 하기도 하고 사랑의 맹세가 굳어진다는 곁가지설도 있다. 옛 풍속에 붉은 색은 사귀를 쫓는 색이라 하여 붉은 꽃물 들이기가 유래되었다고도 하지만, 그 유래를 찾는 일보다 6월부터 피기 시작하는 꽃이 피고 지고, 지고 피어서 10월까지 간다고 하니 얼마나 오래 가는지 이번에는 지켜 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오래 피는 꽃은 참 힘들 것이다. 한없이 꽃핀 상태를 유지하려면…. 그래서 그것을 지켜보는 마음도 힘겨워질지 모르지만.
봉숭아 씨앗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참 멀리까지 날아간다. 서양의 어느 여인처럼 죽어서라도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씨주머니를 터뜨려 자신의 속을 뒤집어 보이려는지, 비바람이 불지 않아도 열매가 자라 씨가 터져나가서 길쌈을 끝내고 지쳐 잠든 여인의 꿈속에 날아가 작별인사를 고하려는지.
긴긴 여름날, 누가 봉숭아를 심었다고 해서 가보니 어느새 꽃을 매달고 있다. 피는 꽃이면 어떻고 지는 꽃이면 또 어떻겠느냐만 여름 내내 눈앞에 어른거리는 풍경이 하나 있다. 두 엄지손톱에 봉숭아 찧은 꽃잎을 나란히 얹고 그 위에 시퍼런 이파리를 덮어서, 이렇게 하면 저승길이 밝다고 …, 흰실이 붉도록 동여매라고, 두 손을 내미시던 어머니.
정말 두 엄지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이면 그곳에서는 한마저 밝아질까 아직 알 수 없어 가만히 얼굴을 들어보니 어느새 저 산너머 하늘이 푸르다.
(문형렬, 「사람들 이야기」)

♣  관련 어록 및 어휘
ꊱ 봉선화(鳳仙花)를 눈물 흘리는 것과 같다고 해서 누객(淚客)이라고 한다.《삼류헌잡식》
ꊲ 줄기와 가지 사이에서 꽃이 피며 머리와 날개, 꼬리와 발이 모두 다 우뚝하게 일어서 봉(鳳)의 형상과 같으므로 봉선화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라 한다《군방보》

♣  생각 거리
1. 좋아하는 꽃의 그림을 그려봅시다.
2. 꽃에 숨어있는 꽃말과 그 유래를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