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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단편]붉은 성탄제
작성자 박남욱[中1] 작성일 2003-12-29
작성일 2003-12-29
                              붉은 성탄제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주함이 아니라, 즐거움이었다. 바삐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어딘가 모를 기쁨이 그들의 눈 위에 찍힌 발자국에 흠뻑 베어있음을 누구든지 알 수 있었다. 허리까지의 꼬마에서부터 두 배 더 큰 어른들까지 그들의 얼굴에는 하늘에서 소복이 내리는 함박눈과도 같은 웃음이 곱게곱게 베어있는 것이다.


딸랑딸랑-.
종소리가 파랗게 깔려 그들의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앞에는 붉은 통이 놓여있었는데, ‘구세군’이라 적혀있음이다. 대거리임에도 어느 새 소박한 시골의 사람들처럼 그들은 성탄제를 맞을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길거리에는 초록색의 플라스틱 나무가 길거리를 군데군데 수놓았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목걸이처럼 치렁치렁한 ’소형 램프'를 매달고 있었는데, 밤만 되면, 나무도 나무이지만 그것은 짙은 어둠이 마치 타르처럼 땅에 끈적끈적하게도 베긴 것을 떼놓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맘때 즈음의 밤이면 대낮과도 구분을 못 할 정도로 밝음에 어둠이 쉽사리 엄습을 아니한다.
제각기 다른 이유로 성탄제를 맞으려 분주해지지만, 어린이들의 소망은 대체로 일치한다. 그것은, 산타가 이들을 찾아와 선물을 하나씩 놓고 가는 것이다.


나도 물론 그랬다. 나도 여느 아이들과도 같이 그저 빨간 옷의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지루하게 기다려야 하는 겨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한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춥디추운 골목길 한 귀퉁이에서 와들와들 떨고 있는 이들에 비하면 말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번엔 눈이 폴폴 날리는 성탄제 전날 밤이었다. 이삼 년 동안 눈이 내리지 않더니, 드디어 내리는 것이다. 아! 행복한 성탄제! 드디어 눈이 내리는 것이다. 하얀 성탄제를 위해 얼마나 내가 기다려왔던가? 그래서 더욱 포근해지는 성탄제다.


잠자리에 들었다. 좀체 잠을 이룰 수 없다. 포근한 침대에 누워 조용히 어제 본 구세군 냄비를 떠올려 본다. 앏게 흐르는 종소리에… 조그만 빨간 바구니 하나……. 그 돈을 위하는 그들을 생각해 보니, 괜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한참동안 그 일을 고민하다가 간신히 잠자리에 들었다.


밝은 햇살이 내 이마를 비춘다. 밝다. 눈이 시리도록 밝다. 잔설이 곱게곱게 남아있다. 기대하던 성탄제!
어제 걸어 놓은 양말을 뒤적여 본다. 없다. 선물이 없다! 그것만을 기대하며 살았음에도 선물이 없다한다! 내가 착하지 못했을까, 아님 산타가 길을 잘못 들었거나 치매기가 있는 걸까? 어쨌든 이래나 저래나 우울한 하루가 되지 않을까 한다.
안방에 들어가 봤다. 공부방에도 들어가 봤다. 거실에도……. 그러나 부모님은 계시지 않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아마도 밖에 나가계심이 틀림 없다. 자주 두 분은 쇼핑을 하곤 하셨으니깐!
가방을 부시럭거려 본다. 어제 그대로 있다. 매어든다. 그 무게가 꽤 무겁게도 느껴졌다. 오늘은 유달리 더 무겁게도…….


동전을 한 웅큼 챙겨서 주머니에 넣는다. 꽤 묵직하다만, 이것은 ‘구세군‘에 넣을 것이다, 구세군에 넣을 것이다 하며 과자 상점, 빵집, 장난감 가게가 내 눈 앞에서 아른거린다. 그러나 간신히 간신히 그 기억을 여러 번 되뇌이면서 상기시켜 그런 욕망을 억누를 수 있었다. 난 내가 그것이 오히려 당장의 쾌감보다 그것이 더 값지다고 생각한 것이 다행이었다. 왜냐 하면, 이것은 두고두고 맞볼 어떤 성취감일 것이기 때문이다.


신호등의 초록 불이 켜졌다. 길 건너편에 구세군 주위에 으레이 들려오는 종소리가 곱게 널려있는 잔설처럼 뒤덮혀 있었다. 그것은 이미 아름다움을 넘어선 어떤 성스런 기운 같은 것이었다. 난 이미 그것에 돈을 넣은 듯 한 성취감을 이미 만끽하고 있었다. 세상이 나 혼자인 것 같았다. 적어도, 날 방해할 옆에 어떤 이도 보이지 않았다. 후다닥 달려갔다. 빙판이 미끄러웠으나, 어찌 된 일인지 함부로 넘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보이는 것이다. 푸르른 하늘-. 높다. 흰 눈이 펑펑 내린다. 곧 소복이 소복이 쌓이겠지……. 그러나 그 겨울의 눈을 심취하기도 전에 내 위로 어떤 진득진득한 점액이 덥쳐 그 하늘을 가리는 것이다. 아, 나는 푸르른 저 하늘을 봐야 하는데. 저 겨울 하늘을……. 눈이 빨간 색이다. 내 위에 쌓이는 눈이 신기하게도 빨간 색이다.


“어, 이봐! 김 의사!”
“아, 왜 그래?”
“오늘 주검 세 구가 들어왔다는데, 자네 담당이잖은가?”
“아, 그래. 하필이면 이 성탄제 때에 죽다니. 그들도 참 안된 사람들이지.”
“그러게 말야. 아마 세 구라지?”
“그래. 그런데 묘하게도 서로 가족이라지 않아? 묘하게도 말이지……. 그들도 참 안됐어. 시체라도 잘 모셔 줘야지 어쩌겠어? 이미 죽은 것을…….”


대로大路에 신문지 한 장이 굴러다녔다. 그것은 여느 신문지와도 그닥 다른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한 번 굴러다닐 때마다 차에 깔려 접혀졌다가 바람에 날려 펴지고, 또 접혔다가 펴지고…….
길 위에는 동전 몇 개가 굴러다녔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푼돈이었는데 족히 한 주먹은 되어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점점 지나다니는 차에 밟혀 보드랍게 깔려 있던 빨간 눈 사이사이로 폭폭 옅게 사묻히는 것이다. 도 그 위에 눈이 한 겹 쌍이고, 또 그 위에 쌓이고…….
그러다 보면 어느 새 그 빨간 눈은, 그리고 그 동전들은 아무도 스쳐보지조차 않을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