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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소설

제목 훔친 일기장
글쓴이 김률희
지금 난 몹시 심란하다. 책상 앞에 펼쳐져 있는 하얀 백지에 검은 줄 여러 개가 그어져 있는 곳에 글을 써야만 하는 일기장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담임선생님이 오늘 학교 끝나기 전에 수업 중에도 강조하셨던 일기를 내일까지 써오라며 말도장을 찍어 넣으셔서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식으로 강조하는 거면 무조건 써야 한다. 쓰지 않으면 화장실 청소해야 하는데 생각만 해도 싫다.
"오늘 하루를 되세기는 마음으로 일기를 써보는 거야. 근데 대충 쓰거나 써오지 않으면 화장실 청소 시킬 거니까 청소하기 싫으면 써와! "
미리 문방구에 가서 사두길 잘한 것 같았다. 사두지 않았다면 집에 왔는데 학교 근처에 있는 문방구로 귀찮게 다시 갈 뻔했다. 일기는 쓰기 귀찮은데 놀고 싶고 두 갈대가 내 머릿속에 휘청휘청 거린다.
'어차피 놀고 일기 써도 상관없지 않나?'
시간은 아직 많다. 오늘 안으로만 몇 줄 쓰면 끝인데 뭐. 그럴듯하게 써서 채우면 된다. 우리집은 내가 나가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부모님 둘 다 경영 회사에서 일하러 가셔서 12시가 넘어서야 오신다. 냉장고에도 반찬이 치려져 있는 게 없다. 밥상에 흰 봉투를 두고 가시는데 배고프면 사먹으라고 주신 돈이다. 돈은 봉투에서 조금만 빼서 들고 나가야겠다. 우리집이 잘 사는 집인데도 학원 하나 보내지 않는 게 신기할 때가 있다. 공부시키고 싶지 않은 걸까. 애초에 포기한 걸까. 쓸데없는 생각은 안하기로 하고 나가서 놀아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운동장으로 갔다. 애들이 축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 본 거였는데 어떻게 된 게 한 명도 없을 수가 있나. 휑 한 걸 보니까 모래바람만이 내가 왔다고 반겨주는 것 같다.
"이러면 집에 다시 가야 하잖아."
기껏 반겨준 모래를 화풀이로 질질 끌었다. 쿵쾅거리게 걷다가 발 위에 동그란 걸 밟았더니 오른쪽 발이 미끄러져 그대로 앞으로 콰당 넘어졌다. 밟았던 동그란 게 내 눈 앞으로 굴러와 자기가 확인시켜주듯 누굴 놀리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축구공이었다. 무릎이 조금 까졌지만 일어서서 묻은 모래를 털었다. 축구공이 어디서 굴러왔는지 추측하는 중이었는데......
"미안, 안다쳤냐?"
축구공 주인께서 납시셨군. 더운 여름에 털모자를 쓰고 있는게 답답해 얼굴을 찡그렸다. 축구공 주인을 째려보며 들고 있는 축구공을 자기한테 맞추려 하니까 반사신경으로 두 팔로 몸을 방어했다.
"말로 얘기해. 땅 못보고 넘어진 네 잘못도 있잖아."
그 한마디 말 때문에 더 화나서 축구공으로 자기 주인의 얼굴에 던졌는데 명중으로 맞았다. 꼴 좋아 속으로 키득댔다. 축구공 주인은 하마터면 자빠져 넘어질 뻔했지만 중심을 잡아 바로 서고 말했다.
"네가 그딴 식으로 말하는데 안 던지게 생겼냐? 그리고 처음보는 앤데 왜 너라고 지껄이냐?"
"미안. 방금 한 말은 취소할게. 넌 날 모르겠지만 난 널 알아. 나도 너랑 같은 학교 다니고 같은 6학년이야."
"날 안다니? 내가 널 모르는데 어떻게 날 알아?"
"따라와, 여기서 얘기하기엔 너무 덥다."
햇빛이 숨어있던 구름에서 나와 빛을 내 더워졌다. 모르는 애고 어디로 가는 건진 모르겠지만 가는 김에 아무 말 않고 따라 나섰다. 모르는 특별한 데라도 가는 줄 알았는데 내가 알고 있는 빌라 단지도 향하고 있었다. 빌라 안에 들어가는 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 걸리적 거렸지만 갈 때 도 삐거덕 소리가 나지 않게 고정시켰다. 2층에 있는 오른쪽 문을 열더니 인사했다.
"다녀왔어요."
그 애의 엄마는 문 앞에 얼굴을 내밀더니 내가 있자 놀라는 얼굴이셨다.
"어머! 친구도 있었니?"
"응! 새로 사귄 친구야. 들어와, 우리 집은 처음이지?"
친구 좋아하시네.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이면서. 아무튼 머뭇거리기만 하긴 눈치보여 안으로 들어왔다. 친구가 온 게 그렇게 좋으실까. 방에서 놀고 있으면 먹을 걸 가져다주신다면서 놀고 있으라고 하셨다.
축구공 주인은 방 문을 닫았다.
"난 박홍이야, 널 어떻게 알게 됬는지 궁금하지?"
고개를 끄덕이자 말을 이었다.
"네가 교무실에서 네 담임한테 혼나고 있는 걸 봤어. 놀릴려고 그런 게 아니고 우연히 네 이름도 들었어. 서이정, 맞지? 네 담임이 작년에 날 가르쳐주셨어. 그래서 그 선생님은 잘 알고 있어. 정말 좋은 분이셨는데 사정이 생겨서 학교에 못나오게 됬어. 그래서 선생님께......."
알겠다. 뭔가 속셈이 있는 거다.
"그래서 우리 담임쌤께 전해줄 게 있는데 내가 대신 전해달라는 거지?"
"눈치는 빠르네! 맞아!"
"네가 뭔 사정 때문에 학교에 못나가는진 모르겠지만 전해줘야 할게 뭔데?"
박홍은 책꽃이에서 일기장을 하나 꺼내더니 내게 건냈다. 일기장이었다. 학교에 못다닌다는 애가 일기를 스스로 쓰다니. 대단하다.
'대단한 건 줄 알면 그 대단한 일기장을 가로채야지!'
박홍에게서 일기장을 빼앗아 건방지게 쏘았다.
"내가 왜 네 부탁 들어줘야 하는데? 이 일기장은 잘 가져갈게."
뒤돌려는데 박홍이 내 머리채를 잡아당겨 일기를 도로 빼앗았다.
"이건 중요한 거란 말이야! 남의 걸 왜 뺐는데!"
"네가 준 거잖아!"
일기장을 다시 빼앗으려다 박홍이 피하면서 모르고 박홍의 털모자를 쳐버려 모자가 떨어졌다. 말문이 나오지 않았다. 박홍의 머리는 거의 없었고 머리에 실로 몇 번 꼬맨 자국이 있었다. 내가 본 게 충격 받았는지 일기장을 떨어트리고 모자를 줍는 틈을 타 당황하지 않고 일기장을 빼앗아 뛰쳐 나갔다.
"안녕히가세요!"
"얘! 간식 가져왔는데 안먹고 가도 되겠니?"
그럴 시간이 없다. 박홍은 쫓아오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일기장을 펼쳐보니 오늘 쓴 날짜가 있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집에 와서 일기장 앞 면에 '박홍' 이라 쓰인 이름을 지우고 '서이정'으로 고쳤다.
일기를 빼앗아 선생님께 주려니 마음이 걸렸다. 더군다나 아픈 애가 쓴 일기였는데. 일단 나 살고보자. 박홍 집 어딘지 기억해둬서 내일 다시 돌려주면 된다. 반장이 일기를 걷어갔다. 이대로 끝나나 싶어 자려는데 반장이 다시 와서 선생님이 교무실로 오라고 했다며 자려는 내 팔을 끌고 교무실로 갔다.
"저... 선생님....."
선생님이 평소에 혼내실 땐 화난 표정이 드러나는데 오늘은 왠지 슬픈 표정이셨다. 혼내시려는 분이 왜 저런 표정을 짓는걸까.
"이정아. 아무 것도 묻지 않을게. 이 일기장을 네 이름으로 고쳐도 누구 일기장인지 다 알아. 작년에 가르친 애가 있는데 이름이 박홍이란 애다. 그 애는 너와 달리 일기쓰는 걸 좋아하는 애였어. 근데 수업 중에 애가 쓰러져서 심각한 것 같아 병원에 실려갔어. 병원 결과에서는 심장병이라 하더구나. 치료를 받느라 학교를 나오지 못하게 됬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애란 말만 들었을 때 지금도 얼마나 가슴 아픈지......"
강하신 줄만 알았던 호랑이 선생님이 눈물을 보이시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어쩌면 선생님의 눈물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할 말이 더 남았다며 화장실 다녀올 테니 여기에 서서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하셨다.
저 애가 아직 살아있다고 얘기할 걸 그랬나. 간절했던 그 애의 마음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때가 있구나. 창문을 열어 놓으셔서 시원하다. 바람이 일기장을 펼쳐 바람이 펼친 부분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세요. 병원에 누워있으면서 선생님이 생각나 편지를 썼어요.
제가 병원에서도 씩씩하게 지내고 있다는 걸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싶어요. 제 병을 인정하기 싫어서 문병 온 선생님께 짜증을 부렸는데 선생님께서는 짜증은 커녕 오히려 절 안아주셨어요. 다른 사람들은 힘내라거나 웃으라고 말하는데 선생님은 저에게 네 옆에 있어주는 사람들도 널 위해 슬퍼해주고 있으니까 슬퍼하지 말고 슬프면 언제든 자신에게 짜증내라며 보듬어주셨잖아요. 제가 울 수 있는 건 선생님이 문병오실 때가 유일해요.
학교에 나오지는 않지만 선생님이 보실 수 있게 일기도 꾸준히 쓰고 있어요. 누군가가 분명 이 일기장을 선생님께 전해줄 거에요. 일기를 보실 수 있으셨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