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을 꿈꾸며 아련하게 출렁이던 겨울바다의 향기가 꿈결처럼 느껴졌다. 어제 저녁 늦게 어머니가 반가운 목소리를 전하며 텃밭에 있던 배추를 캐서 김장을 하였다고 택배로 보낸다는 연락을 주었다. 그 휘어지신 허리로 김치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손수 다 하였을 그 노고가 안쓰럽고 죄송스러워 버럭 화부터 내고 말았었다. 이제는 그만 두시라고 자식에게 할 만큼 하였으니 이제는 받아야 할 때라며 투정을 부렸다. 나의 역정에
"이제는 마지막이지 싶다. 내년엔 할 수 있을지 모르것다. 내 힘 있을 때까지는 해주고 싶구나"
하는 말에 울컥 감정이 일어 가라앉은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건강하세요"
하고는 수화기를 내렸었다. 작년에 하였던 말을 올해도 반복하는 것이다. 어찌 그 마음을 그 사랑을 모르겠는가. 어느새 그 사랑으로 인해 조금은 힘겨웠던 일상에 활력이 느껴왔다. 시간에는 침묵이 들어 있다고 했던가. 나머지 오늘은 말없이 내일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제의 내일이 반가운 오늘이 되었다. 베란다 창을 젖히니 바람이 차가웠다. 폐부 깊숙이 들어 마시는 공기 속에는 세상의 냄새가 배어 있다. 향기롭다. 꽤 오랜만에 얻는 느낌이었다.

철부지 시절, 겨울의 초입이 되면 무거운 바람을 등에 지고 언덕배기 밭에 올라 형들과 어울려 어머니와 콧노래 부르며 배추를 캐러 갔던 생각에 어느새 흥이 감돈다. 알이 꽉 찬 배추를 수레 가득 싣고 와서 마당에 부리고 토실토실 잘 익은 배추를 깔끔히 다듬고 나면 다음에 하는 일이 푸른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이때쯤이면, 거제도의 바닷물은 차갑기도 하련만 추위에 아랑곳 않고 무릎까지 동동 바지 걷어붙이고 소금기 가득한 물로 배추를 씻으며 숨을 죽이고 저렸었다. 청정해역 그 맑디맑은 푸른 물 속에서 한바탕 소란으로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불현듯 입안에 군침이 돈다. 마당에는 어느새 어머니가 갖은 양념으로 버무려 놓은 빨간 김치 속이 시린 손을 반가이 맞는다. 겨우내 먹거리로는 김치가 으뜸이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그 양이 많기도 하였고 그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여섯 형제가 먹어댈 김장 김치는 큰 장독에 몇 개인지도 모르게 행복이 묻힌채 담겼었다. 이 모든 과정이 그 시절 우리에게는 노동이 아닌 하나의 놀이였다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진다. 이 날의 절정은 저녁상이다. 울긋불긋 곱게 칠하여진 김치가 어머니의 손에 의해 쭉쭉 찢어져 한 숟갈 떠올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햇반에 올려지면 어느새 밥 한 그릇이 뚝딱 없어지고 한 그릇 더 추가를 외치던 생각에 저절로 군침이 돈다.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참 맛이 있었으니 기나긴 겨울밤, 왠지 허전하고 출출한 시간이 되면 어머니가 삶아 내어온 타박 고구마에 김치를 올려먹던 기억이다. 지금의 어느 군것질거리가 이 맛을 당해낼 수 있겠는가.

저녁 무렵, 그 바다향기와 그 콧노래가 담긴 어머니의 애틋한 손길이 가득한 선물이 고향 소식과 함께 배달되었다. 내 얼굴에 초승달 같은 웃음이 물리었다. 철부지 소년이 되어 기쁜 마음으로 여러 겹 단단히도 묶어놓은 포장을 벗겨내고 뚜껑을 여는 순간 콧등이 싸- 해온다. 뿌연 눈으로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울긋불긋하고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운 김치 속으로 그리움이 뚝하고 떨어졌다. 흐린 눈에 보이는 또 하나의 조그만 묶음에 손이 간다. 봉지를 여는 순간 달콤한 냄새가 풍겨난다. '고구마 곤조'라 부르며 어린날 즐겨 먹었던 군것질거리다. 얼른 한개를 입안에 넣으며 그 쫄깃함을 맛보며 어머니의 거친 손길을 떠올린다. 그 휘어진 허리로 고구마를 삶아내고 식혀서 얇게 편을 떠 응달에 고루 펴 널어 몇 날을 서리와 별빛을 담아 쫀득하게 말리는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탄생하는 전통 과자. 그 속에 담아 놓았을 사랑을 베어 물고 유년을 떠올리며 행복에 전율한다. 빛을 원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의 어두운 뒷모습이 되어 말없이 감당하고 따뜻한 온정을 던져주는 사랑이란 얼마나 위대한가. 누구의 가슴에도 하나쯤은 한낮에도 반짝이는 별빛이 있다. 모두가 잠들었을 이 깊은 밤에 내 가슴속에서 다시 살아 반짝인다. 시냇물 속에 누워 있는 조약돌이 달빛으로 반짝이듯 그렇게.

세상이 삭막하고 메말라 간다고들 하지만 사랑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그 사랑을 잃게 될까봐 두려움으로 눈을 꼭 감아본다. 영원할 수는 없겠지만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게 되길 소망하여 본다. 야윈 몸 한편에 희망을 매달고 어두움을 밝혀주는 반딧불이가 생각남은 더 아름다운 꿈을 꾸기 위함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어떠한 꿈보다 더 아름다운 꿈을 꾸게 할 수 있을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리라.

어머니! 자신을 버릴때 비로소 사랑을 줄 수 있음을 배웁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인해 한 줄기 맑고 투명한 빛을 밝힐 수 있는 힘을 얻어 갖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