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를 위해 열심히 하는 이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래도록 흐느끼며 오고 있는 빗줄기의 서러움을 느끼기 위해 어디론가 가야만 했다. 바라다보는, 제 빛을 잃은 바다는 울며 오는 그를 거부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다. 바다는 침묵이라 하였는가. 그저 물로만 남으려는 그 비를 위해서 고귀함을 지니라고 기도한다.

이렇게 궂은 날에도 어김없이 모퉁이에서 천막을 드리우고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끔씩 찾아드는 길손들에게 따뜻한 어묵이며 커피, 그리고 컵 라면을 파는 아주머니가 선하고 밝은 웃음을 머금은 모습으로 분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누구에게나 크고 작음은 있겠지만 아픔이 있는 것이 인생살이인 것 같다. 작년 겨울 초입 제법 쌀쌀한 바다 바람을 피하며 몸을 녹이려 이 곳을 찾아들게 되었고 비슷한 연배인 듯 하여 금새 거리감을 줄이고 서로의 사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주머니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이가 결혼하여 홀어머니를 모시고 아이 둘과 단란하게 살아가던 중 트럭기사였던 듬직했던 남편은 교통사고로 허무하게 먼저 떠나고 남겨진 가족들을 책임져야만 하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한다. 생계를 위해 집 근처인 이곳에 터를 잡은 지 다섯 해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나마 찾는 이들이 있어 그럭저럭 살림을 꾸러 나간다 한다. 꿈을 키우며 밝게 살아가는 아이들이 있기에 웃을 수 있다며 선한 미소를 짓던 모습이 정답게 다가왔었다. 아주머니의 큰 아픔을 쓰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내 조그만 아픔을 내 보이게 되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 곳을 찾을 때마다 천막에 들러 벗으로의 정을 나눈다. 오늘도 그 선한 미소 그대로 나를 반겼다.

모든 인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그 찬란했던 봄도 이 비바람과 함께 가고 없고 곧 하월이 닥쳐 올 것도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계절의 변화이리라. 이렇듯 인간에게도 시간은 무한하지 않은 것이 진리일진데 아주머니가 보내는 24시간의 하루는 어쩌면 내가 보내는 하루와는 많이도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과연 그녀처럼 소기의 목적을 위해 값진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하는 반성의 시간을 벗으로 인해 가지게 된다.

틈 사이로 내다보이는 빛 잃은 바다를 바라보며 요즘의 생활을 더듬어 본다. 근래의 나의 생활 반경에는 많은 여성들이 함께 한다. '독서지도사'라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 동료들 거의 대부분이 여성들이기에 관련 활동을 위한 모임이나 교사 교육장에서는 청일점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곤 한다. 교육을 위한 모임에서는 백 여명이 넘는 여성들 속에 홀로 앉아 어쩔 줄 몰라하는 마음을 감추려고 애쓰는 경우가 직면한 현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쑥스러움이 많은 성격인 탓에 어지러운 마음이 됨은 어쩔 도리가 없다. 이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먼저 그들에게 다가서는 마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소극적 자세를 버리고 그들과의 적극적인 우정을 생각하게 되었다.

여성과의 우정은 윤기 있는 위안을 가져다 줌을 느낀다. 특히 예민한 여성과의 우정은 남자들의 우정에서는 느낄 수 없는 다채로운 기쁨을 준다. 때로는 그 수다스러움에 과민한 질투심에 적이 놀라기도 하고 힘들게 받아들일 때도 있지만 순박한 여인과의 우정으로 인해 승화된 영혼을 가지게 되는 기쁨이 있기에 그 사소함은 묻혀 버린다. 또한 거울 보며 화장을 고치는 여성을 보는 즐거움도 좋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아는 여성에게는 어느새 마음이 열려짐을 느끼는 즐거움도 있어 좋다. 능소화처럼 화려한 여성에게서는 불타는 젊음이 남아 있다는 착각을 가지게 되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내 사소한 유머에도 목젖을 보이며 웃어주는 벗에게는 어색함이 있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야생초처럼 꿋꿋하게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모습을 지닌 이에게서는 사랑하는 아내의 느낌이 전해지며 힘을 얻게됨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마음 열기가 가꾸어낸 위안이며 기쁨이고 축복이다. 망설임이 많은 벗에게는 용기를 주고 싶은 마음이 되고 너울의 상처가 드리운 이에게는 조용히 손잡으며 힘을 주는 벗이 되고 싶다. 받은 만큼 나누며 살고 싶음이리라. 인간사회도 우리의 본성도 한결같이 일을 요구하고 있으며 일을 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생을 살고 있다는 징표가 아닌가? 벗들에게서 나약한 여성이 아닌 이 사회의 든든한 일군으로 거듭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러한 벗들을 많이 가졌다는 자부심이 이 지루한 장마비 속의 쨍한 햇살로 비쳐 오는 듯 하다.
 
곁에서 무엇인가를 다듬다가 따뜻한 커피 한잔을 권하는 투박한 손을 보며, 무엇인가 목적의식을 갖고 꿋꿋이 이겨나가는 이 여인의 벗임을 소중하게 그리고 큰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아마도 내일 저녁에는 붉게 물든 석양을 불수 있으리라. 진정 값지고 중요한 것들은 물질로는 해결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진리를 다시금 느끼며 이들과의 우정은 연정과는 달리 담백하기에 독점욕이나 소유욕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음을 생각하게 된다. 이 모든 이들과의 우정을 오래도록 이어 나가야겠다는 마음을 오롯이 가져 보는 이 시간이다. 버릴 줄 아는 사람이 크게 얻을 수 있음을, 생각이 자유로우면 거칠 것이 없을 것이라는 모자란 내 생각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리라.              -수필집 '내 앞에 열린 아침' 발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