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600여 년전의 일이다. 지금의 판문점 부근 한 마을에 어여쁜 딸 하나를 둔 촌장이 살고 있었다. 촌장의 딸은 옥화라 하고  그 미모가 어찌나 고왔던지 인근 총각들이 보기만 하면 그만 첫눈에 홀딱 반하여 가슴을 태울 정도의 처녀였다. 

그런던 어느날 옥화에게 딱한 일이 일어났다. 인근 동네에 성질이 우악스럽고 기운은 마치 황소같은 장사라고 이름난 억쇠라는 총각있었다.  억쇠는 물을 받으러 온 옥화의 자태를 보고 그만 첫눈에 반해 버린 것이었다. 그리하여 짝사랑에 빠진 억쇠는  급기야 상사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억쇠의 어머니는 아들의 이런 말 못할 사정을 모르는 터라,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알 도리가 없어 애만 태우고 있었다.
  "얘, 억쇠야! 사람이 삼시 세 때 밥을 먹어야 사는 법인데 사흘이 넘도록 밥을 안먹으니 어쩐 일이냐?"
  "아프단 말여!"
  억쇠는 귀찮다는 듯이 한마디를 내뱉고는 돌아 누워 버렸다.
  "그래 아프다니, 배가 아프냐?"
  "아뇨!"
  "에이구 답답해라. 머리도 안 아프다, 배도 안 아프다, 그럼 어디가 아프단 말이냐, 응?"                               어머니가 이렇게 가슴을 치면서 속 시원히 말이나 하라고 졸라대도 억쇠는 끙끙 앓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이렇게 식음을 전폐하고 끙끙 앓아 누운지 닷새가 지나자 억쇠의 몰골은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아들이 너무도 걱정된 어머니는 약이라도 쓰고픈 마음에
  "글쎄, 이 녀석아! 진맥을 해야 약을 쓰지. 그래,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 응? 어서 말해봐!"
  "에이, 어무니! 속을 모르면 말을 말란 말여?"
  "아이구, 그럼 속을 알게 말이나 속 시원히 해보란 말이다."
  "그럼, 어무니! 내 소원 들어 줄테여?"
  "아. 글쎄 들어 줄테니 소원이 뭐냐?"                                                                                                  어머니가 이렇게 타이르듯 달래자, 억쇠는 어린애같이 얼굴을 붉히면서 히죽히죽 웃기부터 했다. 어머니는 한편으로 안심은 되었지만 이 녀석이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려는가 싶어 걱정이 되었다.
  "그래, 네 소원이 뭐냐, 응?"
  "저, 저 말여, 나 장가갈테여. 히히.."
  "장가? 어이쿠, 이런 실없는 녀석!" 

어머니는 하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힌 소리에 그만 억쇠의 머리를 두어번 쥐어박아 주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못할 말도 아니었다.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은 없었지만 사내 나이 벌써 열아홉이 되었으니 장가가겠다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기운이 황소같은 장사요 외아들이니 마음 같아서는 하루라도 빨리 짝을 지어 후사를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래, 어디 맘에 둔 처녀라도 있냐?"
  "으음, 저... 나 옥화한테 장가갈테여!"
  "아니, 옥화? 에그, 이 녀석아, 당찮은 소리 입밖에도 내지마라."
  어머니는 억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로막았다.
  "원 아무리 철이 없고 못 배운 자식이기로서니 이렇게 턱없는 소리를 할까."

답답할 뿐이었다. 마을 촌장을 대대로 지내 온 지체 높은 집안에다 재산 많고 거기다가 인물까지 뛰어나 감히 마을 사람들이 넘보지 못하는 옥화인데 만약에 이런 소리가 마을에 퍼지는 날이면 모자는 영락없이 멍석말이를 당해 쫓겨날 일이었다. 어머니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억쇠와 엮어 보기도 미안한 일이었다.
  "어무이! 왜 옥화 싫어?"
  "아이구, 이 철없는 자식아!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랬다구, 가문 좋고 지체 높고 인물 좋은 옥화 아가씨를 너같은 떠꺼머리한테 대기나 댈 수나 있겠냔 말이다. 응? 이런, 쯧쯧 철없는 녀석..." 

어머니는 이렇게 아들을 나무라고 단단히 일렀으나 사모하는 마음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가 있으랴. 억쇠는 더 한층 가슴이 쓰리고 마음이 허전하여 애간장을 태우다가 급기야는 큰 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럴수록 억쇠는 더욱 목놓아 옥화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다급하게 되자 억쇠의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촌장에게 찾아가 백배 사죄하고 사연을 말하니 촌장은 행여 소문이 날까 두렵다고 두 손을 내저으며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촌장에게 매달려 애원을 다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억쇠는 상사병으로 죽고 말았다. 

죽은지 며칠이 되지 않아 마을에는 괴상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기 시작했다. 판문점과 덕현동을 사이에 두고 흘르는 사천강이 자꾸 범람(물이 차서 넘쳐흐름)하여 그 위에 놓인 판문교가 그만 물에 떠내려간 것이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죽을 힘을 다하여 새로 둑을 쌓고 다리를 놓아도 그 다음날로 억수같은 비로 인하여 둑을 무너뜨리고 다리를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사천강이 넘쳤다!"
  "다리가 무너져 떠내려 갔다!"
  "홍수다! 홍수!" 
이런 외마디 소리가 마을에서 그치지가 않았으니, 마을 사람들은 원인 모를 이 일에 겁을 먹게 되었고 별의별 소문들이 다 퍼지기 시작하였다. 판문점을 떠나라는 하느님의 계시라고도 하고, 마을이 망할려니까 그런다느니 하며 소문은 소문을 낳고 자꾸 말에 살이 더해져만 갔다.

이일로 하여금 촌장은 골머리를 썪게되었다. 하루는 견디다 못해 강둑으로 나갔더니, 강둑에 웬 여인이 소복을 곱게 입고 앉아 구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는게 아닌가!
  "사랑 사랑 상사병으로 죽은 총각 사천강에 흑룡되어 원한을 품었으니 어이하는가 그 아씨를 어이하는가..."
촌장은 그 여인의 구슬픈 노랫가락을 듣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상사병으로 죽은 총각이 사천강에 흑룡이 되어 원한을 품었다니, 그것은 필시 자기 딸에게 반했던 억쇠를 두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촌장은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조심조심 여인 곁으로 다가가서 나즈막한 목소리로 여인을 불렀다. 그랬더니 여인은 소름이 끼치도록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남기고는 바람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촌장은 그만 혼비백산하여 마을로 도망치고 말았다. 집에 돌아와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말을 입밖에 낼 수가 없었다. 사천강이 자꾸 넘치는 까닭도, 판문교가 자꾸 떠내려가는 것도 다 원한 때문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