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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품

제목 백제의 문화재를 찾아서
작성자 황인길(4학년) 작성일 2004-02-02
작성일 2004-02-02
우리가족은 백제문화재를 보고싶어 공주, 부여의 유적지를 다녀왔다. 공주와 부여는 백제의 두, 세번째의 도읍지여서 백제의 옛 자취를 찾기 쉽다. 처음으로 송산리 고분군과 무령왕릉을 가보았다. 송산리 고분군의 몇 개의 무덤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돌무지로 만들어 졌고 6호분과 무령왕릉은 벽돌을 쌓아 만들어졌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를 통틀어 유일하게 이름을 알 수 있는 무덤이다. 무령왕릉에서 사용된 벽돌은 주로 연꽃을 소재로 한 무늬들로 표면을 장식하였기 때문에 전체적 외관이 퍽 화려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였다. 벽돌을 쌓을 때도 한 줄은 세우고 네 줄은 눕혀 아름답게 쌓아 올렸다. 연꽃무늬는 당시 국교가 불교였음을 알 수 있다. 내부에는 여러 가지 토기와 송나라의 돈, 잡귀를 쫓는다는 상상의 동물 석수, 그리고 왕과 왕비의 목침과 족좌 등이 있었다. 벽면 중간중간에 있는 등잔불은 죽어서도 살아있는 것처럼 불을 밝힌다는 것이 특이하고 놀라웠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제관식이나 왕비의 팔찌 등을 보면 만든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것은 신라와 다르게 백제에서는 창의성을 중요시하였던 것 같다. 이것이 백제의 예술이 발달한 이유인 것 같다.
그 다음으로 공산성으로 갔다. 공산성은 음~뭐랄까? 웅장하면서도 왠지 공격적인 것 같았다. 모든 성들의 특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느낌이 왔다. 그런데 공산성 위로 올라가 보니 너무 위험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 조취를 취하지 않았다. 위험하다는 생각을 못한 것 같다.
공산성까지 본 후 온천에 가서 하룻밤을 묶었다. 그리고 드디어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그리고 부여로 갔는데 부여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부소산성을 보기로 했다. 부소산성 안에 낙화암과 고란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소산성도 산에 지은 성이기 때문에 산을 타야되는 데 눈도 내리고 땅도 미끄러워서 몇 번이고 넘어졌다. 그런데 가도가도 성벽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께 물어보니 흙으로 성벽을 만들어서 낮아졌다고 말씀하셨다. 왠지 성벽이 아닌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낙화암에 도착했다. 백제의 삼 천 궁녀가 빠졌다는 그 곳에 말이다. 경치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강물에 빠진 삼 천 궁녀를 생각하니 왠지 슬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낙화암을 지나 고란사에 가보았다. 고란사는 고란초라는 꽃의 이름을 따온 절이다. 이 절은 주변산과 백마강이 어우러져 너무 아름다웠다. 이 절이 백제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사람도 있고, 삼 천 궁녀를 달래기 위해 고려시대에 만들어 졌다는 얘기도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삼 천 궁녀를 달래기 위해 만들어진 절인 것 같다. 하여튼 이렇게 부소산성, 낙화암, 고란사를 보고 산을 내려왔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보고 부여 박물관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도자기들이 깨끗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금동대향로도 같이 보았는데 금동대향로는 총 12개의 구멍을 뚫어 놓아서 향로 안에서 피어 오른 향연기가 봉래산 곳곳을 감싸며 마침내 봉의 가슴에서 솟아오르도록 되어 있어서 신선세계를 표현하는 최고의 멋을 보이고 있으며, 용 모양 받침 연꽃모양의 아래 그릇이 서로 분리되므로 향재를 버리고 또한 새로 담기에 편리하게 되어 있어서 기능면인 면에서도 완벽한 향로라고 하였다. 정말 크고 멋있었다.
부여 박물관을 나와 궁남지로 향했다. 무왕과 선화공 함께 즐겼던 궁남지는 우리 나라 최초의 인공연못으로 신라의 안압지보다 40년 더 먼저 만들어졌다고 한다. 조각 얼음이 떠다니는 가운데 오리들이 헤엄치며 노는 모습을 보니 그 당시 무왕과 선화 공주 즐겁게 노는 모습이 느껴졌다. 봄에는 연못에 연꽃이 한가득 피어난다고 하는 데 보지 못 한 게 아쉽다.
백제의 문화재를 돌아본 후 창의적인 백제의 예술을 느꼈고 백제인의 숨결을 느끼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