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해가 지고 있다. 온통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이 커다란 단풍나무 같다. 버스에서 내리고 집으로 오는 언덕길을 한참 걷고 있을 때 학교에서 국사책을 놓고 온 것을 알았다. 국사선생이 강조한 것처럼 이번 숙제는 중요했다. 내일은 일요일이었고 숙제는 월요일까지 제출해야 했다. 그러나 나의 걸음은 돌아서지 않는다. 언덕 위에는 과속방지턱이 거의 닳은 채로 나에게 밟히길 기다리고 있다. 몇 걸음도 채 안 되는 언덕을 올랐는데 수학여행때 가본 한라산을 오른 느낌이다. 저기 지평선 끝으로 사라져 가는 태양이 다시 떠오를 때는 이 고속방지턱을 넘지 않겠다. 나는 집으로 향하고 있다. 등뒤로는 건물들이 삭막하게 숲을 이루어 즐비하게 있다. 집으로 향하면서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다. 즐비한 건물 뒤에 아무도 보이지 모르게 울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도 나처럼 고속방지턱을 다시 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집 앞에 다 오니, 태양은 그 자취를 감춘다. 태양은 사라진 게 아니다. 밝은 빛을 잃어 몸체에서 어둠이 나오기 때문에 밤이 어두운 것이다. 빌라 입구를 들어서니 자동센서로 등이 켜진다. 5개밖에 안 되는 계단을 올라가기도 전에 등은 꺼져 버린다. 현관문에 서서 열쇠를 꽂아 돌리니 탕탕 소리가 난다. 마치 장난감 총의 방아쇠가 당겨지는 듯한 소리다.

"엄마, 나 다녀왔어. 오늘 밤새 컴퓨터해도 되지? 내일은 일요일이잖아."
'그래, 오늘은 이 엄마가 특별히 허락할게. 일단, 밥이나 먹어.'
"응, 고마워."

현관문의 등이 꺼지면, 나는 투명인간이 된다. 어둠 속에 묻혀 거울 속에도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 가방을 던지고 리모콘의 빨간색버튼을 누른다. 삑. 이 상품은……. 작은 상자 속에 들어가 물건을 열심히 홍보하는 여자가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한다.
채널을 계속 돌리다가 <스펀지>에서 멈추었다. 재밌어서 웃고 싶지만 웃지 않았다. 내가 물을 마시러 부엌에 갔을 때 <스펀지>는 끝났다. 냉장고를 열어 물병을 꺼냈다. 냉장고는 내가 혼자 쓰기에 너무 컸다. 집도, 텔레비전도, 식탁도, 침대도, 소파도.

컴퓨터를 켰다. 로딩이 끝나고 윈도우 화면으로 들어가자 인터넷 메신저가 자동으로 로그인 된다. 몇몇의 친구의 이름이 노란색으로 접속해 있다는 표시가 되어 있다. 나는 내가 먼저 쪽지를 보내지 않는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메신저만 켜 놓고 인터넷에 접속을 한다. 인터넷에 접속하면 들어가는 사이트가 한정되어 있어서 한번씩 들어가면 할 것이 없다. 내가 세상과 친해 질 수 있는 시간이 겨우 10분이었고, 그 후에는 나의 앞에 베를린장벽이 세워진다. 넘어가고 싶어도 넘어 갈 수 없다. 핑 소리가 나더니 직사각형의 창이 모니터에 떴다. 왼쪽 상단에는 친구의 이름이 하얀색으로 쓰여 있었고 아이디 옆에는 스마일모양의 캐릭터가 있다. 가끔 스마일이 화를 내거나 눈물을 흘리는 모양이 있는데 미소의 상징인 스마일도 화나고 슬플 때가 있나보다.

[숙제 너무 어려워. 가르쳐주라. ㅋㅋ]
[나 안 할거야.]

최소한 친구들에게는 나의 진짜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과 관계는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는 게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1점의 점수가 들어가는 숙제를 안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니, 끔찍할 정도로 한 명도 빠짐없이 한다.

[미쳤냐! 니가 하는 말은 이라크 자살테러와 같은 말이야. 괜히 보여주기 싫으니까.]

의미 없는 말을 몇 번 주고받다가 숙제하러 간다며 접속을 끊는다. 없다.

유일하게 집 안을 비추어 주는 텔레비전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할 말을 계속 내뱉고 있다. 교복을 벗고 소파에 누워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계속 들으며 텔레비전을 본다. 나는 가끔 텔레비전과 대화를 한다. 내가 무슨 질문을 해도 텔레비전은 동문서답을 했다. 그런 텔레비전이 미워 뒤통수를 때린 적도 있지만 텔레비전은 꿋꿋이 서답을 했다.

"너는 좋겠다. 아무 생각 없이 앞만 바라볼 수 있으니까. 나도 앞을 보고 싶은데… 뒤에서 누가 불러도 앞만 보고 싶은데…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아니, 항상 뒤돌아보고 있는지 몰라. 그래서 나는 앞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날 막아서는지 잘 몰라."
"즐거운 주말 보내십시오."

텔레비전은 다른 말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부르나 보다. 말상대도 못해 줄 바보라면 형편없는 바보가 틀림없다. 그래도 어쩔 때는 엄마의 자장가보다 포근한 자장가를 들려주기도 한다. 자장, 자장, 우리아가…. 이런 자장가는 아니지만.

나는 방으로 들어가서 책상 두 번째 서랍을 열어 손때가 많이 묻은 두개의 물건을 꺼냈다. 가져온 다른 물건을 들어 머리높이로 들어본다. 이것의 설명서에는 의사에 처방 없이 과도복용을 하지 말라고 굵게 쓰여 있다. 수십 번의 뚜껑을 열었지만 흰 알들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울리는 전화벨이 꽤나 날카롭다. 벨이 울리는 시간은 언제나 일정하지만 날카로운 소리에 항상 베인다.

"여보세요."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언제는 내가 달랐나……."

밝았다. 언제나 밝은 목소리로 토요일 이 시간에 전화를 한다.

"엄마가 일주일 생활비랑 용돈 보냈으니까 통장 확인해봐."

통화는 금방 끝난다. 일주일의 대한 보상이 기껏해야 5분이다.

"요즘 너희 아빠 실적이 너무 좋아서 금방 승진 될 것 같다. 그리고 승훈이가 학교에서 1등을 했어. 얼마나 기특하던지…. 너는 잘하고 있겠지? 엄마가 성적표 못 본다고 엉터리로 하는 건 아니겠지? 너도 대학은 동경에서 다녀야지. 그럼 몸관리 잘하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서울은 지금 9시정도 됐지? 일찍 자고. 그럼 끊는다."
"엄마."
"응?"

나는 두 번째 물건을 그 모양이 변하도록 꽉 잡았다.

"월요일에 한국에 올 수 있어?"
"갑자기 어떻게 가. 그렇게 이 엄마가 보고 싶어? 아이고 우리 아들. 조금만 참아. 방학때 동경에서 한달 정도 지내자."
"그게 아니라…."

방학까지는 너무 많이 남았다. 소리도 지르지 못 할 것이다. 그러나 엄마에게는 더 말할 수가 없다.

"그게 아니라 뭐. 너 무슨 일 있니? 왜 그래. 평소 같이 않게."
"아니야, 아무것도. 끊을게.

가시가 돋는다. 가시에 찔린 나는 움찔하며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가시가 돋아난 전화기는 새끼를 꼭 껴안은 고슴도치 같다. 고슴도치 배 밑은 가시가 없다. 오히려 더 부드러운 털로 새끼를 감싸고 있다. 부엌에 들어가 한컵 가득 가져왔다. 뚜껑을 열었다. 한 두알로 안 죽습니다. 인터넷에서 본 글이 어렴풋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손바닥에 가득 쏟아내었다. 알알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난다. 낙지처럼 내 목구멍을 잡아당기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웃음이 나온다. 픽.
몇 차례나 나눈 후에야 모두 삼킬 수 있었다. 나처럼 백알이 넘도록 먹고 잠들어 삼일 후에 다시 깨어난 사람이 있다고 한다. 내가 삼일 후에 깨어나면 숙제를 제출해야 하는 날을 지나버린다. 다시 또 웃음이 나온다. 픽.
텔레비전을 미처 끄지 못한 채 잠이 든다. 어둠의 늪에 깊숙이 빠져 허우적 되고 있는 모습이 잠깐 스쳐 지나간다.

'다음 달에 파리로 이민을 갈 거야. 아빠 일 때문에 그러니까. 내일 담인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늪은 먹이를 삼키듯 나를 계속 집어삼키고 있다. 늪 위에서 엄마와 아빠, 동생 그리고 나의 곁에 있는 것들이 내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내가 손을 뻗어 그 손들을 잡으려 할 때는 이미 늪이 나를 삼키고 난 뒤였다

'너 정말 안 갈 거야? 엄마가 꼭 가자고 하지 않아. 돈은 매주 보내줄테니까. 그래도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엄마한테 말해.'

모른다. 내가 눈을 감았다는 사실을….

눈을 뜬다. 눈 안에는 징울림의 현상이 퍼져 눈을 떠도 이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징우림이 결국 커튼에 가린 햇살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마음이 답답해 오는 것을 느낀다. 어두운 햇살이 거실에 가득 분위기를 낸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지만 깡마른 악마의 손이 내 허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힘겹게 일어섰지만 그 손은 내 몸속으로 들어가 뱃속을 이리저리 휘젓는다. 구역질과 함께 죽을 듯한 고통이 이어진다. 변기 통에 머리를 들이밀고 헛구역질을 하는데도 목구멍이 녹는다.

전화벨이 아까부터 울리고 있지만 나는 너무나 뒤늦게 그것을 알아차렸다. 계속 울어대는 전화기 앞까지 왔어도 선뜻 받지 못한다. 낯설다.

"여보세요."
"왜 이리 전화를 안 받어."
"응, 엄마. 금방 일어났어. 웬일이야."
"웬일이긴. 엄마가 아들한테 전화도 못해?"

계획표에 '토요일마다 아들에게 전화하기' 가 있지 않냐고 묻고 싶었다. 나는 지금까지 예약을 해놓은 녹음기와 전화를 하지 않았냐고 따지고 싶었다.

"어제도 전화 했잖아."
"갑자기 생각이 나서 그랬어. 어제 너 목소리도 안 좋아 보여서. 그런데 정말 괜찮니?"

무심코 소파 밑을 바라보았는데 그곳에는 수십개의 수면제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뚜껑이 잘 닫아진 통은 전화기 옆에 곤히 놓여 있다.

"괜찮아. 방학 때 엄마 만나러 갈게. 엄마도 보고 싶고, 아빠도, 승훈이도 정말 보고 싶네.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어색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
"우리아들, 정말 다 컸네."

일본에 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저 나를 위로하는 것으로 내뱉은 말이다. 엄마와 대화를 끝내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알들을 손으로 집어 만져보았더니 깊숙이 스며 들어가 있는 축축함이 느껴진다. 계속 뱃가죽을 꼬집던 악마의 손이 사라지고 온데간데 없다. 




자료제공: <장은호 공포연구소>에서 제공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