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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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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겨우 발목까지 왔건만 그 매력은, 이 아침 머리 속까지 밀고 올라왔다. 어쩔 수 없는 마음이 되어 집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자연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호수를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 있다. 서류 봉투를 옆에 놓은, 조금은 이마를 드러내신 아저씨가 연신 담배 연기를 뿜는다. 바라보는 이들은 각기 다른 눈빛들이지만 정녕 호수는 잔잔하기 그지없다. 그다지 크지 않은 호수는 너울 바람이 이끄는 대로 물살을 일으킨다. 푸른 물결을 바라보며 얼마 전 있었던 반가움과 그리고 감사의 시간들을 생각한다.
몇 해 전부터, 부산에서 살고 있는 초등학교 동창들의 모임에서 보내 오는 초대장을 받았었다. 하지만 핑계를 대며 옛 친구들과의 만남을 미루어 왔다. 불의의 사고로 장애를 가지고 살게되면서 정상인의 모습만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옛 벗들에게 지금의 불편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일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계속 된 초대에 다음 모임에는 참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 마음을 가진 터라, 오후시간 느닷없는 친구의 전화는 반가움이 앞섰다. 친구 여럿이 근처로 가고 있으니 나오라는 것이다. 모임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피해 왔지만 집 근처에서 만나자는 말에는 도리가 없었다. 알았노라고 전화를 내리고는 망설임이 시작된다.
그냥 예전 모습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벗들이면 좋으련만...... .
망설임을 접고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조금은 예쁘게(?) 몸단장을 하고서. 차안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그들은 오지 않았다. 약속된 곳으로 차가 드나들고 택시 한 대도 왔다 갔지만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지라 갸우뚱거리는데 어렴풋이 기억나는 친구 하나가 조금 전 도착한 차에서 내린다. 안으로 들어가니 먹거리를 앞에 놓고 중년 여인네들이 여럿이 둘러앉아 있었다. 친구의 이끌림으로 앉았지만 도무지 모르는 얼굴들이다. 차근히 둘러보았다. 모두들 고운 눈망울들을 하고서 내 눈과 마주한다.
'나 모르것나', '나는'.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한 명 두 명 이름을 들추어 들려주었다. 그 중 한 벗은 도무지 옛 얼굴을 기억 해 낼 수 없다. 이토록 변할 수가 있는가? 불혹을 넘긴 중년의 아주머니 모습들이 나의 옛 벗들이라니, 잠시 얼떨떨한 기분이 된다. 25년이 훌쩍 지났으니 몰라 볼만도 하다 싶다. 남자 친구들과는 달리 여자 친구들은 명절 때 들러도 만날 수가 없었으니 더욱 그러하다. 지난날들을 묻고 있는 세월의 흔적들이 까마득할 뿐이다. 모두들 날더러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위로한다. 뱃살이 넉넉한 지금의 모습이 예전의 미소년을 찾기란 어려울 터인데 말이다. 고향 이야기며 어릴 적 추억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들, 왁자지껄하게 긴 시간들을 이야기꽃을 피웠다. 바다와 접하여 있는 만남의 장소는 그리하여 고향 거제의 앞자락 같아 그 정겨움이 더하다. 이대로는 헤어짐이 아쉽다며 조금은 취기가 오른 친구의 이끌림으로 음주후의 가무를 즐겼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그녀들의 놀라운 변신들을 마음껏 바라보았다.
그 수줍던 순이도, 착하던 쌍둥이 영아도 이젠 놀(?)줄 아는 아줌마로 되어 있다.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지려는데 한 친구가 배웅을 바란다. 아련하게 추억을 나누었던 그 아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차안에서의 그 아이는 금새 안타까움과 위로의 말을 다시 건넨다. 나는 금방 분위기를 바꿔 살아가는 이야기며 옛 추억 이야기로 말을 돌렸다. 그 아이는 다른 벗들의 사는 이야기까지 잔잔하게 들려준다. 애틋한 정을 느낀다.
그 날을, 그들을 이 호수 앞에서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행복한 미소가 얼굴 가득 퍼짐을 느낀다. 일어서려는데 잘 익은 탱자 빛의 노란색 원복을 입은 꼬마가 무리에서 빠져 나와 조그만 돌을 주워 호수로 냅다 던진다. 잔잔하기만 하던 호수는 작은 돌의 몸부림으로 인해 물 무늬를 동그랗게 만든다. 정작 꼬마는 그 퍼짐을 보지도 못하고 무리 속으로 뛰어 간다.
그들은 내 마음속에 가득 퍼진 이 훈훈함을 알려나...... .
옛 친구들이 나에게 안겨 주었던 시간들이 삶의 활력이 되었음을 다시 느낀다. 좋은 벗들과의 교류를 많이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실로 아름답게 느껴지는 그들의 눈빛들 속에서 찾게 되었다. 그들이 존재함을 진정으로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수필집 '내 앞에 열린 아침'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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