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로 접어들기 전 역광에 맞서 찬란히 빛나던 그 초록은 간데 없고 고독의 입김이 더해가 이 시간 더욱 절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성급한 마음을 앞세운 낙엽들이 길가에 널부러져 그 생을 마감하고 있다. 마을 언저리에 탁 터인 바다가 놓여있는 곳, 금방이라도 자신의 푸름을 물들일 기세로 태평양을 향해 굽이치던 그 곳으로 마음자리를 내려놓는다.

아름다움의 순간을 다하고서 하나둘 낙엽 되어 떨어지는 계절로 기억한다. 까까머리 중학교2학년 사춘기 소년이 집을 나서 소풍 때나 오르곤 했던 산마루를 넘어서며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해는 벌써 저편 산으로 기울고 나뭇가지들 사이로 비쳐드는 햇빛 덕에 아직은 황금빛 줄무늬가 환상적이다. 그도 잠시뿐 이내 땅거미가 내려앉으며 스산한 분위기로 바뀌었고 공포가 밀려왔다.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너무 늦은 출발 이었나보다. 곧 오늘의 내 객기와 호기 그리고 반항심에 후회가 되었지만 이내 누군가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가고자하는 목적지는 하나의 거친 고개와 울창한 산길을 남기고 있었기에 주먹을 불끈 쥐고 용기를 내어본다. 꼭 쥔 주먹에 땀이 베인다.

금요일 점심시간이 다 끝나갈 무렵 단짝이던 친구 충호가
"이번 일요일에 우리 큰 형 장가가, 내일 꼭 놀러와. 기다릴게."
라며 훈정 가득한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즈음 시골 소년에게 있어 반공일은 농군의 자식으로서의 해야 할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때이다. 집안 일을 돕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저녁나절 소여물을 끓이느라 아궁이 속 소나무장작 껍질과 옹이가 타는 타닥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불현듯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며 꼭 놀러오라는 말이 생각났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허락을 청하였다. 일언지하에 거절이시다. 늦가을인지라 이내 어두워질 것이며 철부지 자식이 가려는 곳이 험한 산길인데다 10여 리가 넘는 길이니 지극히 당연한 분부다.                      
"괜찮아요. 난 갈 수 있어요."
딱 잘라 대꾸하고는 약간의 반항심과 호기를 더하여 어머니의 만류를 저버리고 신작로로 내달렸다.

추억 속 그 날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어 갑자기 밀려온 어둠이 주는 공포에 내 용기를 실험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만류에 순응하지 않았음을 지극히도 후회하면서 말이다. 딴에는 우정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길이 이다지도 험난할 줄은 예상치 못했으리라. 뒤늦은 후회는 달려온 길을 돌아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되어 버렸다. 듣기에도 소름 끼치는 산짐승의 울음소리와 시커멓게 덮쳐 누르는 듯한 산 그림자의 무게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인기척에 놀란 산새들이 날아오르는 소리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땀이 비 오듯 몸을 적셨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타는 목마름으로 뜀박질을 계속하여 내리막길에 이르렀다. 기억으로 이 소나무 숲만 지나면 마을이 있다는 생각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랬다. 소나무 숲을 끝으로 탁 트인 들이 나오고 바다의 짠 냄새가 나며 불빛이 반짝였다. 드디어 거제도의 남동쪽 끝 '미조라' 라는 마을에 안착한 것이다. 바싹 말랐던 입술에 침을 발랐다. 편안하고 따뜻한 기분이 내 몸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지나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내고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초등학교 5∼6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누구 찾느냐며 물어왔다. 친구의 이름을 말하자 "형아야 친구왔데이" 하며 방 쪽으로 소리쳤다. 친구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마당으로 뛰어나오며 내 손을 힘주어 잡는다. 내 한 손에는 쑥부쟁이 한 묶음이 보랏빛 꽃잎과 노란 꽃술을 뽐내며 들려 있었다. 조용히 친구에게 건네고 멋쩍게 웃음을 흘렸다. 이 순간 그 길었던 긴장과 공포의 시간들은 뿌듯한 성취감으로 갈무리 되었다.
"니가 경만이구나, 이야기 많이 들었다,"
하는 소리에 돌아보니 선한 미소를 지으시며 내 손을 잡으신다.
"충호 애미다. 이 밤에 혼자서 우찌 왔노. 고생 많았다. 좋은 동무네."
하시는 통에 괜히 어깨까지 힘이 들어갔다. 여기저기 더럽혀진 옷을 손으로 털며 여며주시곤 마루에 앉힌다. 맛있는 잔치 음식을 하나가득 차려주시고는 이것저것 다정하게 물어 오셨다. 애틋한 정이 느껴왔다. 다시금 내 어깨를 토닥이시고는 친구 손과 내 손을 꼭 잡혀 주시곤 좋은 동무가 돼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30년지기가 되었다.

토요일 늦저녁에 그 친구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내 반가운 목소리를 뒤로하고 어머니의 부음을 낮은 목소리로 전한다. 최근에는 뵌 적이 없다. 비보를 접하고서 울컥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지병으로 앓고 계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무심하여 생전에 모습을 뵙지 못했음이 송구할 따름이다.
인생무상을 생각하게 된다. 갑자기 접한 비보라 계획되어있던 일정을 마치고 일요일 늦게서야 출발하여 빈소가 마련된 거제도의 한 병원에 도착하니 이미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간이 되어 있었다. 빈소에서의 친구는 많이도 굽어보이는 등을 하고서 낙엽 굽는 냄새를 품기며 어두운 미소로 놀라움을 표시한다. 친구는 개진개진한 눈으로 이제 어머니도 떠나시니 내 젊음도 모두 사라지나보다며 서러움을 말한다. 오래 전에 떠난 고향이지만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이 곳에 모시게 되었다는 친구의 나지막한 말에 어머님의 그동안의 한스러움이 생각나 쓰린 마음이 되었다. 상객의 도리를 다할 수 없는 아쉬움이 크다. 그저 고개 숙여 명복을 빌 뿐, 낮은 소리로 이것저것 물을 뿐 영전에 큰절 한번 올릴 수 없는 내 자연스럽지 못한 몸을 그저 원망해 본다. 죄스러운 마음이 되어 다시 돌아보니 고인의 영정사진이 곱게 미소지으며 배웅하신다. 마지막 가는 길에 보여주는 저 고운 미소는 어떤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할까...... .

이별은 또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보다. 친구 어머님의 부음을 접하고 옛날을 떠올려봄은 이제 잊혀져갈 추억을 갈무리해 두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한다. 그냥 묻어 두었던 예전의 어머님과의 정을 다시 꺼내어 떠올려보니 지금은 퇴색해버린, 가슴이 따뜻했던 어린 날이었음을 떠올려보는 마음이 된다. 내 순수한 영혼이 잠시 머물렀던 그 아름답던 마을은 내 방문 두 해 후에 석유 비축기지로 개발되면서 사라지고 그곳의 순하디 순한 사람들도 모두 쫓겨가다시피 도시로 이주해 버렸으며 내 추억도 함께 묻혀버렸다. 30여년 전에 모두 떠나버려 인연이 끊길 수도 있었지만 용케도 이 친구와의 우정은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아마도 '좋은 동무가 돼라'며 포개어 잡혀 주었던 그 손의 따스함으로 인해 기인되었다고 한다면 과장된 것일까? 마지막으로 건네 받은 어머님의 미소가 꽤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호기를 앞세웠지만 순수한 우리들만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걸었던 그 밤길을 땀 범벅이 되어 다시 걷고 싶은데..... 이제는 그러한 용기도, 들어설 곳도, 반겨줄이도 아무도 없다. 이제 기억의 저편에서만 존재하는 내 어린날의 추억일뿐.   
                                                                                      -월간 문학저널 4월호 발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