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이라 나섬을 망설이다가 오후 늦게 찾아든 아늑한 산사. 풍경소리 들으며 하늬바람과 어울리고 있는데 초승달 같은 미소를 머금은 스님이 합장하며 따뜻하게 맞는다.  때 지난 나물국 빛을 하고 있던 얼굴이 그제야 펴지며 밝아진다. 산사의 저녁 공양이 다가오는지 굴뚝에는 회색 연기가 피어나고 하늘에 흩뿌려진 그 연기는 뭉게구름과 함께 하며 흘러간다. 어깨가 잘 맞추어진 돌담을 따라 걸으며 '가족'이라는 화두를 떠올린다.

인간의 울타리인 가정. 지붕이 있고 가족이 있으면 가정인가? 이러한 의문을 갖게 하는 사회 현실이다. 사회를 이루고 있는 최소 단위인 가정, 그 구성 요소인 가족. 이 공간의 기능 강화 훈련이 요구되는 현실임을 느낀다. 신문의 사회면을 채우는 사건들을 대하며 가정의 기능이 약화됨으로 인해 기인된 것들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핵가족화 되어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 이전의 대가족 하에서의 어떤 깨트릴 수 없는 요소들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인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가정에서의 안정적 분위기가 있었음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잘못을 저질러 어머니에게 부지갱이로 혼나면 울면서 달아나 할머니의 등 뒤에서 위기를 모면했다. 할머니는 어머니를 물리친 후 조곤조곤 추임새로 다독이면 어느새 잘못을 깨닫게 되지 않았는가. 아쉽게도 이러한 피난처는 이제 대부분 아이에게 사라지고 없다. 핵가족이다 보니 아이들은 지적과 꾸짖음 속에서 비뚤어진 자아를 형성한다. 다독여 주고 추임새를 해 줄 이가 없게 된 것이다.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 보다는 비난일색의 훈계가 난무한다. 이것이 오늘날 대다수 가정의 모습이다. 사회의 기초단위인 가정이 온전하게 성장하지 못하면 사회의 안정과 발전은 요원할 것이다. 이러한 가정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예전과는 다른 인위적 노력들이 수반되어야만 유지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느긋함을 거부하는 사회라 해도 역으로 가정에서 여유와 추임새로 느긋하게 대응하면 어떨까. 아니 될까? 가정을 지탱하는 힘은 각자의 역할 수행이 행하여 질 때 생겨나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가 번갈아 추임새 역할을 수행할 때 자녀는 건강할 것이고 이것이 무너지면 남는 것은 허무이며 허탈감일 것이 자명하다. 이 추임새의 기능을 소화해 내지 못하고 벗어나려 할 때 보복 심리의 일환 일 수 있는 탈선의 경우가 생겨나며 가정은 무너지고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병폐는 사회 전반에서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가정의 중요성을 익히 알려 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미국의 클린턴 정부 시절 라이쉬 농림부 장관, 그는 장관 재임 시절에 격무로 늦어지는 일이 잦아지자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생활하게 되었다 한다. 그 날도 퇴근이 늦어질 것 같은 예감에 집으로 전화를 걸어 아들에게 귀가의 늦음을 알리자 그 아들이 말하기를
"아빠, 늦어도 좋으니 꼭 깨워 주세요."
라고 몇 번을 다짐받으니 아빠는
"왜 그러느냐, 무슨 할 말이 있느냐?"
고 반문을 하자 아들은
"제가 비록 잠결이라도 아빠가 곁에 계시다는 것을 느끼며 자고 싶어요."
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라이쉬 장관은 미련 없이 장관직을 던지고 가정으로 복귀하였다고 한다. 우리의 현실과 의식과는 먼 느낌이 들지만 가족의 기능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인 것같아 부러워하였던 기억이 있다. 그는 가족의 곁에서 함께 하는 아빠의 자리를 선택한 것이다. 속된 표현으로 돈만 벌어다 주면 된다는 가장의 역할론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하나의 예로 받아들여진다.

삶의 방향을 바꾸기는 쉽지가 않다. 그러나 무엇이 우선이며 중요한지는 한번쯤 생각해 봄직한 일이라 여겨진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본질적인 목적에 대해 사유하는 시간을 가정과 가족이라는 테두리에서 가져보는 것도 삶 속에서 필요하리라는 생각을 가진다. 부모라는 이름의 권위만으로 자식을 별개의 인격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종속적 존재로만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더불어 자문하며 폐쇄적 사고방식을 가졌었다면 탈피하려고 노력하여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러한 역할 연습이 우리의 교육 과정에서 이루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여 본다.

얼마 전 접하였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라는 글을 떠올린다. 그는 작은 티베트라 불리는 라다크 라는 히말라야 고원에 위치한 황량하지만 아름다운 고장에 거주하며, 서구식 '개발'의 결과로 동안의 긴밀한 가족적, 공동체가 물질에 지배당하기 시작하면서 차츰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었다. 이 메시지는 라다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던지는 물음이 있음을 공감하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어릴 적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다지 권위적이지 않으면서도 대가족을 거느리며 산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지금은 권위를 내세우려 하지만 무참히 떨어져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깨달음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묵시적으로 가정 안에서 서로 분담하고 있는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그 의미를 깨닫고, 구성원들의 더 없는 노력이 있어야만 핵가족 하에서의 새로운 현대적 사랑이 피어날 수 있음을 말이다. 맘속에만 있고, 표현할 수 없었던 말을 담아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여 본다. 가족 간에도 가끔은 말없는 대화가 필요한 것 아닌가. 마음을 열고 임한다면 무한한 대화의 장이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한다.

꽤 긴 시간 상념을 정리하고 계단을 내려서는데 멀리 선한 하늘 끝에서 저녁놀이 뭉실 피어나기 시작한다. 저 여리고 여린 빛깔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실로 아름다운 자연의 선물이다. 침묵하며 아름다운 선물을 즐기며 사랑에 빠진다. 아마도 가족의 의미를 깨닫고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저런 색을 지닐 것이라 생각하고 정결한 미소로 받아들인다. 다시 돌아서서 붉게 물들어 가는 산사의 풍경을 오래도록 가슴에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