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난 도심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할 요량으로 찾은 바다향기 가득 머문 거제도에서 몇 날을 머무르며 봄날을 즐겼다. 소나무의 짙은 초록과 떡갈나무의 연초록 그리고 꽃을 떨구어 낸 벚나무의 새 순들이 어우러져 고향 산야는 온통 초록으로 뒤덮여 싱그러움이 한창이었다. 이에 질세라 이웃한 바다도 푸름이 짙게 아롱져 그 운치를 더하니 여기가 무릉도원이다. 이 무릉도원에서 나흘 밤낮을 유유자적하며 봄날과 더불어 보내다보니 어느새 내일이면 떠남을 계획해야 한다. 왜 이다지도 아쉬움이 남을까...... .

늙으신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에는 애잔함이 함께 하였고 옛 벗들 만나 차 한 잔 나눔도 애틋해 좋았으며 친구와 술 잔 기울이며 세상사 나눌 때는 왁자지껄 훈기 있어 즐거웠었고 이웃 어르신들과 안부 나누는 기쁨도 새삼 벅차기도 했었다. 어르신들의 허물어진 육신에서 견고한 위엄이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그들의 눈빛은 파도에 씻긴 오래된 해안처럼 넉넉하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어 좋았었다. 조용히 파도소리 접하며 양지바른 곳에서 책장을 넘기는 즐거움도 오붓하니 좋았었다. 이래저래 좋고 향기로운 것뿐이니 어찌나 즐거운지...... .

어릴 적 추억을 품고 있는 대관령 고갯길을 아들과 함께 걸으며 애뜻한 정을 나누는 내용으로 구성된 이순원의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을 공감하며 읽고 있는데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책을 읽으며 언젠가 내 아들과 함께 걷고 싶다고 생각했던 추억이 가득한 새풍이재를 가자고 한다. 이내 얼굴에 미소가 자리 잡혔다. 내심 놀랐지만 짐짓 마음을 감추고 벗이 이끄는 대로 온갖 향긋한 향기로 가득한 오솔길을 걸었다. 가끔씩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햇살이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들어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해 주었다. 함께한 벗은 여전히 소녀의 심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였다. 내가 잊고 있었던 꽃들과 나무 이름을 들추어내어 들려주며 앞서 걸어간다. 거친 숨을 간간이 토해내며 한참을 걷다보니 내가 산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앞쪽으로 계단이 하늘과 맞닿게 펼쳐져 있다. 이 멋스러운 곳을 사람들은 ‘천국의 계단’이라 지어 부르고 있다며 벗이 선하게 웃는다. 덩달아 좋은 기운이 감돌며 천국으로 향해간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붕 뜬 기분으로 한달음에 오르니 숨이 가파왔다. 이러함을 숨기고 걷는데 다리가 점점 무거워 왔다. 긴 날숨으로 호흡을 고르고 계속 오르는데 친구가 머지않아 옛 성터가 나온단다. 드디어 초등학교 시절 단골 소풍지였던 새풍이재 인근의 성터에 도착하였다. 소나무 잔가지 사이로 멀리 보이는 짙푸른 수평선이 고스란히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해풍 머금은 산들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친구는 두릅이라도 따 준다며 산 속으로 들어갔다. 발끝에 눈길이 머물렀다. 무언가를 찾으며 두리번거리는데 보이지 않는다. 지금 추억을 더듬으며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소풍 오면 뽑아 껌처럼 씹던 ‘피비’라고 부르던 것인데 보이지 않는다. 아직 철이 아닌가......  그제야 가쁜 숨을 고르며 풀밭에 벌렁 누워 하늘을 보았다. 참으로 맑고 고운 하늘이 조각구름 띄우고서 펼쳐져 있다. 어릴 적 봄 소풍 때 올려다본 그 하늘 그대로다. 나비가 날아다니고 향기 품은 산들 바람이 너울대니 이곳이 신천지가 아니고 무엇이랴! 

고소한 흙냄새와 풀내음 그리고 바람에 실려 온 바다 향을 즐기며 드디어 추억의 새풍이재에 도착했다.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낯설게 다가왔다. 어린 날 소풍 와서 뛰고 뒹굴며 즐기던 그 곳, 보물찾기 하느라 친구들과 온 산을 헤집고 다녔던 그 푸르고 넓디넓었던 푸른 동산은 어디에도 없었다. 먹먹한 기분으로 여기저기 둘러보아도 옛 흔적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중학교 시절 혼자 밤길을 걸어 인근 산마을인 ‘미조라’에 갔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 오솔길을 찾으니 어렴풋이 그 길이 남아 있다. 어린 날 우정을 지키기 위해 반항심과 호기를 앞세워 혼자 식은땀 흘리며 걸었던 산짐승 울어대던 고즈넉한 길이었지만 이제는 조금 이어지다 철조망으로 막혀 있을 것은 자명하다. 그 아름답던 마을 ‘미조라’는 개발이란 미명아래 이미 사라졌으며 드나들 수 없는 공간이 되었으니 말이다.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데 아쉬움이 더해온다.

우리네 삶에서 남이 도와줄 수 없는 일이 있다. 오직 안에서만 잠그고 열 수 있는 마음의 문이 그것이다. 무언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표류하는 날들이었던 것 같다. 자신의 마음 열기만이 출구임을 이 봄날의 순수 앞에서 감지한다. 아직은 조금 남아 있는 내 혼 속의 순수가 평화와 사랑을 원하고 있음을 느낀다. 지금의 알 수 없는 이 설레임과 알싸한 이 기분과 미세한 세포의 이 떨림은 어디에서 기인 된 것일까?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곳으로 시선이 간다. 자유가 넘실댄다. 이 따사로운 봄날에 추억이 아롱져 있는 고향 산자락에서 얻은 이 자유는 오랜만에 느끼는 행복인 것 같아 기쁨이 더한다.

시와 꿈의 여자 ‘자밀라’를 떠올린다. 야생의 자밀라. 붉은 황야로 붉은 사랑을 따라 떠난 여인, 울타리의 속박에서 벗어난 사랑의 화신인 그녀도 이 봄을 누비고 있으리라. 일상에서 탈출 하고픈 현대인의 마음속에는 늘 자밀라의 꿈을 키우고 있는지 모른다. 회색 콘트리트 숲에서 벗어나 영혼의 음영이 깃들어 있는 옛 추억을 만나는 것은 진정 행복이며 보람된 방황이리라. 그러기에 지금의 시간을 가지려한 것은 나의 용기이며 마음 열기가 일구어낸 기쁨이다. 가녀린 삶에서, 침묵 속에서 벗어나 용기 내어 나의 길을 다시 뚜벅뚜벅 걸어가리라. 오월이다. 새해에 다짐했던 것들을 돌아보며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으리라. 움직임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것이고 행동은 분명한 목표를 생각하며 움직이는 것이라 하였다. 이 싱그러운 봄 향기 속에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행동에 임하리라. 이 봄날에 만끽한 이 자유에 힘입어 내 삶을 예찬하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