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각의 종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심금을 울리는 33번의 울림입니다. 새해가 시작됨을 세인들에게 알립니다. 33겹 겹겹이 둘러 쌓인 장막을 걷어내고 드디어 인간들이 원하는 이상향의 세계를 활짝 열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우매하고 어리석음으로 인해, 걷어 낸 막들이 또 막혀져 해를 다 보내고 또 이쯤이면 후회하고 반성하는 마음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해 새날에 또다시 33번의 종을 울려 사람들의 가슴에 파고들게 할 것입니다. 매년 도돌이표를 찍으며 되뇌는 '다 사 다 난' 이라는 말이 정겹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지난해를 돌이켜보면 정녕 이 말이 깊이 다가옵니다. 

  울려 울리소서 보신각 33계 종소리여
  오 찬란한 동방의 병술 여명(丙戌黎明)
  낡은 것 몰아내고 새 것 맞으라
  환희와 감격의 장중한 종소리여

  울려 울려 하나 되어 퍼지소서
  갈기갈기 상처 화합으로 활짝 웃어
  저 창공 비상(飛翔)하는 단제(檀帝) 기상
  아프도록 거룩한 득음(得音)의 종소리여

  울려 울려 백의민족 색 공(色空)의 축복이여
  어둠을 몰아 내고 광명을 맞으소서
  자유 정의 진리의 참사람 되라
  오 거룩한 축복의 종소리여

을유년 제야에 써 올린 동료 시인의 글을 음미하며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던 중 잠시 잠이 들었던가 봅니다. 눈을 뜨니 새벽 6시 30분, 서둘러 아이들을 깨웠습니다. 감기 기운으로 기침을 연신 해대는 작은 녀석은 달래어 아내 옆자리에 눕히고 맏이만 데리고 어제 아이들과 약속한 곳으로 향했습니다. 우리 한반도에서 제일 먼저 해오름을 볼 수 있다는 간절곶으로 향하였습니다. 우리가 늦었나 봅니다. 이미 차들로 길은 메어져 있었습니다. 초입의 '임랑'이라는 곳에서 발이 묶였습니다. 일출 시간이 임박하자 하나 둘 길가에 차를 세우고 무작정 탁 터인 동해 바다로 달려갑니다. 대나무 숲에 일던 바람도 숨을 죽이고 붉은 기운이 감도는 회색 하늘 위로 누이의 고운 눈썹보다 가느다란 초승달이 떠 있었습니다. 달이 저렇게도 처량하게 아름다운 줄 미처 몰랐습니다.
7시 33분, 분간하기 어려운 바다와 하늘의 연결점에서 붉은 기운이 감돌더니 붉은 점 하나로 시작되어 온 바다를 붉은 빛으로 물들이며 서서히 떠오릅니다. 해오름이 시작되었습니다. 풍선들이 날아 오르고 기러기 가족이 태양을 가르며 붉게 물들며 지나갑니다.

아!
벅찹니다. 감격입니다. 저다지도 붉고 클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우리네 마음을 붉게 적십니다. 가슴을 열어 기운을 받아들입니다. 절로 뛰는 가슴이 됩니다.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습니다. 지금의 느낌을 오롯이 간직하여 일년 내내 33개의 장막의 막힘 없이 살아보아야겠다는 굳센 다짐을 하여 봅니다. 분노도 좌절도 모두 극복할 수 있겠다는 모진 마음과 각오를 합니다. 이 공평하게 주어진 자연의 위대한 선물 앞에서 남은 생을 위해 소망을 빌었습니다.

병술년 첫날, 나지막한 산을 등에 엎고 포근한 어머니 등 같은 바다 위에서 나는 피어나는 희망을 만났습니다. 날마다 떠오르는 아침해가 오늘 하루 더욱 밝고 크게 보이는 것은 희망 하나로 붉게 물들일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의 시간이 흘러 바다가 푸른빛을 되찾을 즈음 해를 등에 지고 돌아섰습니다. 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습니다. 태양을 바라보고 있으면 절대 볼 수 없는 것이 그림자라고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이 그림자까지도 보듬고 가야하는 것이 인생임을 문득 느끼며 이렇게 새해 새날을 맞이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