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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보물이요, 형제는 위안이며, 친구는 보물도 되고 위안도 된다고 하였다.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인생을 갖는 것이라고도 하였으며 사랑이나 지성보다도 더 귀하고 나를 행복하게 해 준 것이 우정이라고도 하였다.

요즘 오랫동안 만남의 기회를 갖지 못하다가 예 친구들이 모여 정담을 나누는 인터넷상의 카페를 알게 되어 또 하나의 인생을 즐기고 있다. 단풍의 끝자락에 고향에서 모임을 했었다. 아쉽게도 사정이 여의치 못해 참여하지 못해 안타까움이 컸다. 축시를 보내는 것으로 만족하고 아쉬움을 안고 지내던 중 보고 싶다는 한 친구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계획되어 있던 일들을 오전 중으로 마무리하고서 기쁨으로 경부 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어린 날 초등학교 운동장 모퉁이에서 사금파리 만지작거리던 코 흘리게 녀석의 꿈이 도공이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이 청자 빛 가을날 통도사 근처의 공방으로 보고픈 마음 앞세우고 달려가는 중이다. 자꾸만 가속페달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을 달래려고 잠깐 휴게실에 들러 하늘을 보니 새하얀 구름이 푸른 하늘과 퍽 조화롭기만 하다. 흰 구름이 이야기하였다. 그렇게도 좋으냐고….

초승달 같은 미소를 지으며 통도사 나들목에 진입하여 도로 통행 표를 찾는데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진입로에서 뽑아 옆 좌석에 놓아두었는데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 않는다. 뒤에서는 차들이 빵빵거리며 재촉을 하였다. 순식간에 차들이 길게 줄지어 섰다. 길가로 차를 세우고 사무실로 향하려니 뒤따르던 차 속 얼굴들이 힐끔거린다. 이내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여러 번 주억거리며 미안함을 전했다. 요금을 지불하고 나오며 생각하니 아마도 바람에 날려간 듯하였다. 오는 내내 창문을 열고 갈바람을 시원스레 맡으며 왔으니 그 대가로 바람이 가져간 것이라 생각하니 그마저도 기뻤다.

산사에 들러 풍경소리 들으며 하늬바람과 어울려 즐기다 저녁나절에나 들릴 요량이었는데 왠지 보고픔이 앞서 손 전화를 눌렀다.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 길 안내를 상세히도 해주었다. 그도 염려스러운지 신작로 앞까지 나와 있겠다 한다. 억새가 너울대고 잎사귀를 다 떨어낸 감나무가 불그레한 열매만을 안고서 잔바람에 너울대는 길을 10여 분 달려가니 길섶에서 보고 팠던 친구가 손사래를 하며 반겨준다. 반가움에 조그만 떨림이 왔다. 마주 잡은 두 손엔 황토물이 들어 있다. 조금 더 가야한다며 앞서 차를 달린다. 또다시 꼬부랑 산길을 한참을 달리고서야 익어 가는 산을 배경으로 공방이 자리하고 있었다.

친구는, 두 명의 문하생이 물레를 돌리며 작업에 한창인 곳에 들러 막 초벌구이가 끝난 도자기들도 만져 보게 하며 도자기에 무지한 방문객에게 이것저것 설명을 해 주었다. 그의 말투에서 전통도자기 재현에 몸 바친 친구의 우리 그릇에 대한 열정과 장인의 향기가 풍겨 다시금 손을 잡아 보았다. 엄지손가락이 까맣게 여느 손가락과 색이 다름을 볼 수 있어 동안의 노고가 느껴졌다. 다음으로, 모양새도 고풍스러운 가마를 구경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여덟 갠 가의 가마가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 여인네의 우아한 자태를 닮아 있었다. 일부의 가마에는 초벌구이를 위한 사기들이 들어 있다 하였다. 친구의 땀과 정성이 느껴져 숙연해지기까지 하였다. 불에 구워 햇빛과 만나는 날 다시 한번 불러 달라고 넌지시 압력을 넣어 놓았다.

안채로 들어서니 고운 눈매를 하고서 아주머니가 활짝 반겨 주신다. 곧바로 온통 자기들로 꾸며 놓은 차 방으로 가 마주앉았다. 몇 년 전 전시회에서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사람들을 반기던 모습이 회상되며 이내 정감이 감돌았다. 친구는 갖가지 차들을 권하고 있었고 다도를 모르는 무지몽매한 난 그저 홀짝거리며 마셔대기만 하였다. 친구는 차 예절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주며, 차가 몸에도 이롭지만 무엇보다 마주앉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 더욱 좋다며 가족 간의 대화의 장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전통 차 마시는 문화의 보급이 활성화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지극히 공감이 되어 고개 끄덕임을 오래도록 하였다. 다양한 종류의 차를 갓 구어 낸 다기에 담아 마시며 추억을 더듬기도 하고 살아온 이야기며 다른 친구들을 떠올리기도 하며 긴 시간 정담을 나누었다. 이런 와중에도 손님들은 끊임없이 방문하였다. 아주머니가 힘들겠단 생각에 넌지시 의중을 물으니, 처음에는 손님맞이에 두려움이 있었으나 지금은 즐긴다며 선홍빛 미소를 수줍은 듯 흘리신다.

스님 한 분이 찾아들었다. 친구와는 꽤 교분이 두터운 듯 보였다. 잠깐이지만 찻잔을 앞에 두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종교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정상과 비정상이란 어떻게 구분되어지는 것인지요?"
라며 화두를 던졌다. 당혹감이 일었지만 상대방의 눈에 의해 결정되어진다고 가벼이 답을 하니 스님께선 '무유정법(無有定法)' 이란 금강경의 경구를 언급하며 모든 현상이나 사물은 자기의 마음과 주어진 상황에 달렸다면서
"다리를 다친 사람이 절름거리며 걷는 것은 비정상이 아니라 정상이며 앞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 아무런 장애 없이 뛰어다닌다면 그게 오히려 비정상이 아니던가요? 모든 것은 남이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며, 진리란 정해진 것이 없는 것이지요."
스님의 현명한 대답을 들으며 몹시 작아지는 느낌이 되면서도 철학적 깊이에 고개가 숙여졌다. 그리하여 많이도 반가운 만남으로 기억되었고 이곳에 가끔 들러야 될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스님의 울림의 가르침을 공유하기 위해서.

마당으로 나오니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깊은 산 속은 빨리도 어둠이 내린단 생각이 들었다. 땅 냄새와 풀 냄새가 어우러져 코를 자극하고 마당에는 콩이 널려 있어 시골 정취가 물씬 풍겨나 고향집이 불현듯 떠올랐다. 친구 어머님이 마실 갔다 돌아오셨다. 인사를 드리고 나니 불현듯 어머니가 떠오른다. 지금쯤 어머닌 저녁을 하고 계시겠지. 곧 찾아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콩이 널렸었던 그 멍석에 아주머니의 정성이 담긴 시골 상차림이 이루어졌다. 벗이 정성으로 구워낸 사발에 담긴, 손수 가꾼 야채와 시골 된장이며 여러 종류의 김치와 얼큰한 어묵국물이 시장기를 자극하고 더불어 숯불에 삼겹살이 지글거리고 삼 년 묵힌 매실주가 대기하고 있었으니 실로 풍성한 차림이다. 여기에다 얼굴을 마주하겠다고 인근에 살고 있는 정겨운 친구 둘이 함께하니 이보다 즐거우랴. 하여, 아름다운 가마 옆 소담스런 마당은 풀벌레들도 함께 해주어 그야말로 늦가을의 풍류를 익혀 주었다. 그윽한 초승달이 우리들의 놀음을 시샘하는 것마저도 너무 황홀하였다. 어느듯 달도 많이 기울었다. 얼근해진 고추 친구들은 기분을 이어가자며 상을 물리고 근처의 막걸리 집을 찾아들어 동안의 못다한 정을 나누느라 한창이다.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 찾아든 여자 친구를 28년 만에 중년 여인네의 모습으로 해후하는 바람에 흥이 이어져 시간가는 줄 모르고 사랑을 나누며 즐기다 보니 꽤 늦은 시간에야 친구 집으로 돌아왔다. 하룻밤을 묵을 예상을 했지만 잠자리 마련까지 해 놓은 방으로 들어가 눕고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내 포근함과 아늑함으로 인해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산새소리의 지저귐으로 일찍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도자기들로 장식된 방이었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음에도 몸이 가벼운 것이 아마도 도자기들이 뿜어내는 기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누웠다 늦은 아침상을 받고 보니 구수한 된장찌개가 식욕을 당기게 한다.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고 또 차상을 앞에 두고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는 앞으로의 계획을 담담히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분명히 꿈을 이루어,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공방을 꾸밀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마음속으로 그 구릿빛 얼굴을 향해 파이팅을 외쳐 주었다.

산사를 들렸다 돌아올 요량으로 헤어짐을 생각했다. 아주머니의 자애로운 미소의 배웅과 친구와의 따뜻한 포옹으로 사랑을 나누고서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단풍 속 공방을 떠나왔다. 잠시 들렀던 통도사의 고즈넉한 느낌도 고스란히 담아서 돌아오니 텅 빈집이 나를 반긴다. 아내는 일을 나간 모양이다. 돌아오는 길에 내 손에 지어준 고운 빚 담긴 선물을 응접실 테이블 위에 정돈하여 놓으니 온 집안이 훈훈함으로 가득해진다. 선물 받은 다기와 여러 종류의 차를 바라보며 짜릿한 행복이 몸을 감싼다. 난 참으로 행복한 사람임을 새삼 느낀다. 친구의 당부대로 차 향을 음미하여 인생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지혜를 얻어 가질 것이며 차를 마시며 가족 간의 대화 시간을 많이 가지는 가정으로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굳건히 하여본다.

친구에게 배운 대로 물을 끊여 뽕잎 차를 다리니 온 방이 향기로 가득해지며 뽀얀 사랑이 소담스런 찻잔에서 피어 나오고 있다. 옛 친구로부터 얻어 가진 이 행복 앞에서,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인생을 갖는 것이라는 경구가 많이도 가슴에 와 닿아 훈훈함으로 채워진다. 앞으로 더욱 굳세게 살아갈 힘이 될 것이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