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인 듯한데 창 너머가 밝지가 못하다. 밤새 뒤척이다 늦게야 잠이 들어 몸이 무겁다. 다시 이불을 끌어당겨 아침잠을 청하려는데 신문을 들고 들어오는 아내가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고 전한다. 동지도 지났으니 아내가 달고 온 찬 기운은 당연한 것이리라. 잠이 달아나며 정신이 들었다. 자리를 차고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니 잔잔하게 바닥이 젖어있었다. 새벽에 비를 뿌리고 아직 해가 나오지 못한 모양으로 흐려있었다. 이미 주차장의 차들은 거의 빠져  나가고 덤성덤성 물방울을 이고 있는 풍경이 왠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보태기라도 하듯이 습한 바람줄기들이 윙윙거리며 지난다.

연말이다. 화해, 용서, 사랑, 관심으로 마음을 열고 보내야지 하는 생각들은 마음뿐이다. 그저 평범한 한해이기를 바라며 시작하였기에 그다지 아쉬움은 없지만 누구나 그렇듯 이맘때쯤이면 걸어온 날들을 뒤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낙엽마저 사라진 황량한 길 위를 걷다가 문득 멈추어 서서 생각에 잠기게도 하는 때가 요즘인 듯하다. 지나간 시간들과 함께 고스란히 추억되어 있는 인연들을 생각하며 금새 마음이 따뜻해진다. 삶에서 새로운 일을 겪으면서 알게 되어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정을 나누었던 사람들. 나에게는 살아가는 동안의 위안들이었음을 생각한다. 내 가슴에 갈무리되어 있는 이들을 떠올리며 그때를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질 생각을 하여 보았다.

하루의 조금의 시간을 빼고 나면 남을 위한 것이 얼굴이다. 가끔은 거울을 통해 지난 삶을 생각하기도 한다. 지치고 힘들 때면 위로와 격려를 하였고 기쁠 때는 활짝 웃는 모습과 마주하며 당당한 나를 느끼려 하였다. 어떨 때는 처음 대하는 낯선 사람처럼 여기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 낯설음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생각하며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본다.

직장은 바뀌어도 늙어서까지 함께 할 하나의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목적으로 살아온 두어해, 준비 과정을 거치고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주어진 일에 매진한 한해였었다. 부족하였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하였고 나름의 결과를 얻었다는 생각에 기쁨이 크다. 이제 아이들과 많은 시간 책과 함께 하며 지혜와 사랑을 나누게 되었으니 무엇을 더 바랄까...... .

언제나 그렇듯, 많은 소중한 사람들과 동행함으로 인해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었고 어제를 힘차게 살아왔으며 오늘도 살 수 있는 것이리라. 돌이켜보면 어려움도 있었지만 삶을 살아가며 얻은 인연들이 함께 걸음을 하였기에 작은 이룸을 가질 수 있었음을 생각한다. 오늘을 걸음 옮기며 살아갈 수 있게 힘을 준 많은 분들 중 깊게 기억되어 있는 사람이 있다.

아이들에게 독서지도를 하면서 무언가 부족함을 느껴 관련 공부를 더 하기위해 모대학 사회교육원에서 배움을 가졌었다. 수업이 시작된 첫날 강의실에 모여 앉은 사람들의 면면이 이채롭기 그지없었다. 잠깐 가진 소개시간이 그래서 흥미로웠다. 청년 실업가를 비롯해 유치원원장, 학원원장, 부동산 중개업자, 목사, 대학교수, 교장선생님 등 실로 다채롭기만 했다. 평생교육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제각기 뜻한 바가 있어 시작하였을 공부이겠지만 나름의 지위를 앞세우고 현직에 있는 사람들이라 적이 놀랐다. 그래서 강의실은 늘 배움의 의지로 활기가 가득 하였다. 배움에는 왕도가 없고 또한 끝이 없다는 것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그 소중한 시간을 앞서 이끄는 사람이 있었으니 육순은 진즉 넘기시고 칠순에 가까워 보이는 특별히 눈에 띄는 노신사. 그가 바로 교장선생님이다. 오랜 교육계의 길을 걸어온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위엄과 권위가 풍겨 왔다. 올해가 정년이라는 말과 함께 잔잔히 교육의 일선에서 겪은 이야기들을 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반추해 들려주는 모습에서 근엄함보다는 자상한 성품이 전해져 왔다. 뒤늦게 교육자의 길로 들어선 나에게 있어서는 진정 축복된 만남이었다. 큰마음을 내보이시며 틈틈이 교육현장에서 겪게 될 문제들에 대해 경험을 이야기하고 선생이 지녀야 할 덕과 예를 일러주기도 하였다. 교사의 삶에는 진지함도 있지만 사소함 또한 즐겨야 한다며 가끔은 회식을 주도하는 노력도 보이셨다. 저 연세에 힘이 어느만큼 더 남아있을까 싶어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그렇게 의미 있는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던 어느 날, 내가 강의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니 일찌감치 당도하여 김이 모락거리는 따끈한 율무차를 마시며 반가이 인사를 건네 왔다. 서둘러 커피를 뽑아 건네곤 지그시 끌어당기며 자리에 앉히고 마주한다. 자신이 2년 전 갑작스럽게 뇌졸중으로 쓰러져 죽음의 직전까지 갔지만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병마와 싸워 지금은 거의 회복하게 되었다며 삶에서 만날 수 있는 시련은 대부분 인간의지로 극복이 가능한 것 아니냐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김선생 고향이 거제도라고 했지요. 이제 고향이 같게 되었소" 하며 퇴임 후에는 모든 것을 정리하여 거제도에서 사모님과 함께 여생을 보내기로 계획하여 이미 거처할 조그만 오두막도 준비해 두었다며 잔잔한 마음을 내어 보였다. 남은 삶을 바다 향 곁에 두고 촌노들과 이웃하며 동네 아이들 일깨우며 살아가겠다는 따뜻한 소망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왔고 사랑으로 여는 세상을 꿈꾸는 이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금쯤은 시골 어른이 되어 있을 분, 망망대해에 조각배 띄워놓고 낚싯대 드리우고 태평양을 꿈꾸며 낭만을 즐기시리라 생각하니 금새 보고픔이 인다. 다음 번 고향 길에는 흙냄새 향긋이 묻어 있을 선생님 댁을 찾아들어 훈정을 얻어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여본다. 그리하여 그을린 피부에 따뜻한 손 내미는 모습 속으로 와락 안겨 들어야겠다. 선생님의 훈훈한 품안에서 뽀얀 희망과 사랑을 얻어 가지리라.

언젠가 비 오는 날 동승을 권하자 내게 건넸던 말이 느림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깊이 남아 나를 깨우친다.       
"비가 오면 우산 받치고 걸으며 느껴 보시게. 촉촉한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이 시대 진정한 로맨티스트여. 저녁노을이 찬란히도 아름다운 것은 당신을 닮아 가는 것이리라. 그 분을 떠올리며 밝아 오는 새해를 맞이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의 낯설음을 거두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