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이들과 인연을 맺는다. 오늘, 좋은 사람들과의 교류로 말미암아 돌아와 앉은 이 시간이 갈바람과 더불어 훈훈하고 감미롭다. 이 만남의 매개체가 책이니 더할 나위 있겠는가? 사)독서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책과 함께 부산을 걷다!’ 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사랑을 나누었다. 사람이 만든 책보다, 책이 만든 사람이 많다는 경구를 떠올리며 참으로 행복한 모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미소를 앞세우고 마주한 이들의 면면이 이채롭다. 공식적인 외출을 갈구하며 자신만을 위해 오랜만에 시간을 할애하여 일상탈출을 꿈꾸는 소박한 이부터 또 다른 내 안의 나를 찾기 위하여 라며 철학적 사유를 앞세우는 이가 있는가 하면 책 속에 내재 되어 있는 역동성을 얻어 가지려 의욕적으로 도전한 이도 있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책읽기를 권유하기 위해 자신부터 책과 친해지려 한다는 엄마의 정성도 보인다. 중학교 은사를 만나 기쁨을 토해내는 이가 있어 덩달아 훈훈함도 즐겼다. 다양한 참여 동기를 밝히는 이들의 얼굴이 하도 밝아 모임 터인 꿈꾸는 도서관은 낮달이 비추는 듯 황홀하였다. 낮달의 소망이 해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우리의 소망이 낮달과 같을 것이란 생각을 하였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찾고 확인하여야 한다. 살아가며 어느 정도는 자신을 잃어버리기에 그러하다.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 흔한가. 허공에 떠 있는 그들의 검은 눈동자를 보며 자신을 찾는 시간이기를 나직이 소망하였다. 책 속 길을 여행하며 새로운 지혜를 함께 얻게 되기를 말이다.

책과 첫 만남을 기억해 보라는 진행자의 말에 순간, 당황함이 스쳐갔다. 60년대를 시골에서 살았던 나에게 있어 처음의 기억은 무척 생소했다. 기억을 더듬었다. 생각을 해 보지 않았을 뿐 그때의 나를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내 생각을 정리하며 강사의 첫 책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였다. 선생을 익히 알고 지내던 터라 사뭇 애절함으로 다가왔다. 책과의 첫 만남을 화두로 어린 시절 외로웠던 시간을 반추해 낸다. 기억하는 책과의 첫 만남은 그림동화집 이었다. 첫돌이 지나고 아버지를 여읜 그는 스물넷에 홀로 되신 어머니가 재혼하고 그 빈자리를 할머니의 사랑으로 채우며 자랐다 한다. 하여, 어머니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단다. 어머니가 선물한 이 책은 그에게 어머니였기에 아마도 그 책이 그에게는 위로였고 포근함이었고 평안이었으리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책장을 넘기는 그 여린 소녀를 안아 주고 싶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책을 볼 때의 좋은 기억을 아이들에게 갖게 해 주고 싶은 마음에 그는 독서 관련 재단과 도서관을 운영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억을 잡아내어  책과 첫 만남을 이야기하였다. 특별한 의미까진 아니어도 그것이 첫 만남인지 조차 어렴풋하지만 떠오르는 기억을 씨줄로 잡았다. 내 어린 시절, 맏형은 문학청년이었다고 기억한다. 시골이었지만 허름한 책꽂이가 있었고 적잖은 책들이 있었다. 하지만, 초등학생인 내가 읽기엔 버거운 것이 태반이었다. 가끔은 여고생 누나가 책을 빌리러 오는 모습에 왠지 큰형이 멋져 보였다. 그 즈음에 정기적으로 배달되는 책이 있었는데, 하얀 표지의 ‘현대문학’이라는 책자였다. 새 책 냄새가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소 풀 먹이러 갈 때 몰래 들고 가서 시나 콩트, 단편소설을 읽곤 하였다. 이해가 다 되진 않았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큰 형이 멋져 보여 흉내를 내어 본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책 읽기를 즐기는데(?) 어느 날 형이

“우리 경만이 신문에 나왔네.”

하며 일간 신문을 내 앞에 펼쳐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분명히 내 이름이 활자화되어 번듯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졸지에 난 어엿한 시인(?)이 되었다. 얼마나 여러 번 읽었든지 삼십 년도 더 지난 지금도 오롯이 기억한다. 난 큰형을 부러워하며 어렴풋이나마 문학의 희열을 맛보았다. 이것이 책에 대한, 문학에 대한 첫 경험이다. 그러나 커 가며 이 희열은 점차 사그라져 기억마저 희미해 갔다.

 날은 간다

   나비 날개 애무했던 봄날은 저 멀리 가고 없고

   아쉬운 여름날은 눈물로 지새우며 보내 버리고

   고추잠자리 붉은 꼬랑지는 가을마당에서

   자랑하며 노래한다

   꾸르 꾸르륵

   물새소리 교태롭게 메아리치니

   물끄러미 무아경의 어린 사슴은

   겨우 여린 웃음만 배워 미소 짓는다  

  하얀 눈 곱게 내리는 겨울날에는

   사랑을 할 수 있으려나 몰라

   그렇게 또 날은 간다

기억 속 시 구절이다. 많은 세월이 흘러 공학도의 길을 걸었고 거기에 걸맞게 살았다. 사랑하는 이와 열애를 하여 결혼을 하였고 첫 아이를 만나 행복하였다. 그러나 그 기간은 짧았고 우리에게 시련이 닥쳤다. 업무 중 느닷없이 과로로 쓰러져 의식불명이 되었고 사흘 만에 깨어난 나는 한쪽 팔다리를 영구히 사용할 수 없는 장애인이 되어 버렸다. 하루아침에 닥친 시련 앞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위로도 생명의 끈을 잡게 할 수 없었다. 죽음을 생각했다. 도저히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많이도 슬프고 괴로워 하염없이 울었다. 눈물 많던 아내가 눈물샘이 마를 정도였다. 자살도 시도했다.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 그런 고통과 좌절의 시간을 보내던 나에게 지인이 건네준 책 한 권이 삶의 끈을 이어갈 용기를 주었다. 고담준론을 논하는 위대한 사상서도, 삶의 지혜를 논하는 고전도 아니었다. 그다지 두껍지도 않은 수기 모음집이었다.

 ‘적극적인 삶이 가져다준 선물’

그 안에는 극도의 장애를 극복한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들도 살고 있었다. 그것도 적극적으로. 두 다리를 잃고서도, 전신에 화상을 입고서 짓무른 몸을 하고서도, 두 눈을 잃고 암흑의 세계를 살아도 그리고…….
그래도 그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삶이 불행하다고 흐느끼는 나에게, 장애는 단지 불편할 뿐이지 불행하진 않다며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인간은 극히 이기적이다.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이들을 통해 위안을 느끼니 말이다. 그러나 이 한 권의 책은 위로였고 평화였으며 무엇보다 자유였다. 내 정신을 옥죄고 가슴을 자꾸 작게만 하던 부자유한 육체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서서히 세상과 어울리게 해 준 고마운 존재였다. 무수히 떠 있는 하늘의 별이었다. 별이 하늘에서 반짝이는 이유가 이와 다를 바 있겠는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세상과의 소통을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세상과 삶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이들과 그 작은 책이 가져다 준 의미를 떠올리며 감사의 눈물을 떨어내며 펜을 잡았다. 조금의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느끼며 내 삶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몇 년 후, 내 삶을 담은 글이 내게 용기를 준 그 책 ‘적극적인 삶이 가져다준 선물’ 속에 담겨져 좌절과 시련을 만난 이들을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