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많이 내려앉은, 여느 날과 다른 느낌의 저녁시간. 이웃하고 있는 고향 동생의 식사초대로 상차림을 받는다. 울긋불긋한 상위로 눈길이 간다. 고향 어머니의 상차림과 많이도 닮아있다. 청도가 고향인 아주머니의 상차림은 정겨움이 가득하다. 갖가지 나물과 젓갈 그리고  열무김치와 갓김치도 보이고 고등어자반이며, 더덕구이, 호박 잎 삶은 것. 거기에다 산나물이 가득한 된장국까지 시골 상에서나 맛 볼 수 있는 정성스러움이 가득하다.

실로 오랜만에 도시에서 느끼는 추억 속의 상차림이다. 침을 삼키며 바라보고 있는데 마지막으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보리밥을 내어온다. 어릴 적 그렇게도 목에 걸려서 넘기기 힘든 기억의 보리밥이 요즘은 별식이다. 아버지의 상에 차려진 쌀밥을 기웃거리던 그 때를 떠올리며 보리밥을 한 숟갈 입에 넣고 씹어본다. 투박한 보리밥의 속 터짐과 더불어 파란 보리밭 느낌이 입 안 가득 알싸하다.

처음 이곳으로 이사 와서 얼마 되지 않아 아내는 친구를 사귀었다고 자랑을 했다. 잘 지내라는 말만을 흘린 채 무심코 지났다. 며칠 후 외출 후 돌아와 앉은 늦은 시간에 한 사람의 이름을 들먹이며 알겠느냐고 묻는다. 기억해 내기는 힘든 이름이었다. 새로 사귄 이웃 아주머니의 남편이라며 알고 보니 나의 고향사람인 것 같다고 한다.

며칠이 지난 어느 휴일, 우연히 베란다로 고개를 내민 순간 40대 초반의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어, 옆집에 산다는 사람이 니가?"

아랫마을에 살았던 동생임에 틀림없다. 도회지에서 만나는 고향동생은, 그것도 이웃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큰 반가움이었다. 그가 살던 아름다운 포구 ‘지세포’ 라는 마을이 그려지고 초등학교가 어렴풋이 떠오르는가 하면 고향 거제도의 그 쪽빛 바다도 밀려왔다. 고맙고 반갑기 그지없다. 이렇게 동생과의 만남은 계속 이어져 서로 왕래가 있었고 오늘 저녁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요즘 둘이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토목 감리 일을 하던 동생이 일이 마무리되어 휴식기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 둘 키우는 것이 허전하여 늦게 얻은, 딸 키우는 재미가 덩달아 신이 난다. 아들만 둘 두고 있는 나도 내 딸인 냥 함께 즐겁다. 귀여운 재롱에 어쩔 줄 모른다. 월급은 지급 받아 큰 어려움은 없지만 아주머니는 살림에 보탠다고 아이는 맡겨놓고 벌이에 나섰다. 그래서 요즘 살림하는 두 남자가 수다 떨기에 한참이다. 거제도에서의 어린 날을 떠올리며 이야기 나누다 보면 공감하기도 하고 서로 엇갈린 기억에 직면하면 약간의 다툼도 하면서 고향 나눔은 계속된다. 주부들의 시간가는 줄 모르는 수다 떨기의 재미를 우리가 즐긴다. 곧 일이 생겨 멀리 갈지도 모른다는 동생의 말에 아쉬운 마음이지만 이웃하는 동안이라도 즐거움과 아픔을 같이 하였으면 한다.

이렇게 삶에서 예기치 않은 만남으로 말미암아 회색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도 쪽빛 고향을 떠올리며 시간을 나눌 수 있는 행운을 가지게 됨을 소중하게 간직한다. 요즘은 문명의 이기인 컴퓨터의 발달로 인터넷 상의 친구 모임 카페를 통해서도 친구는 물론이고 고향 선,후배들과도 교류하며 고향을 공유한다. 얼마 전 고향 나들이 때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동무의 얼굴이 떠오른다. 고향의 길 위에서든 도심 속에서든 인터넷 모임방에서든 건강한 모습으로 옛 날을 회상할 수 있음은 분명 축복이다.

아! 내 고향 거제도.
푸른 바다내음이 아롱지고 곱디 고운 단풍이 어우러진 산야. 그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리니 이내 먹먹한 마음이 된다.  문득 시작된 이 병적인 그리움에 지그시 눈을 감는다.

동안의 고향 길 같이 가는 즐거움도 좋았고 아이들 벗되어 노니 또한 즐거웠다. 휴일 외출의 동반자로도 즐거움이 컸었는데...... 

오래도록 함께하는 시간이 주어지면 도심에서도 늘 고향 나누는 즐거움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되면 참 좋겠다. 또 언제쯤 아주머니는 투박한 시골 상차림을 해 놓고서 불러 주실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