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버지와 오랜만에 시골 고향 집에서 같은 잠자리에 누웠다.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조그맣게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소일거리인 토종 벌통을 불편한 몸으로 손보느라 오후 내내 분주하시더니 많이 피곤하였는지 벌써 잠이 드셨다. 꿀벌들은 아버지껜 반평생을 함께한 또 다른 가족이다. 이들을 두고 떠나려니 눈을 감을 수 없다는 말을 여러 번 하였다. 작지만 야문 손잡고서 주름진 얼굴 바라보니 틀니 뺀 얼굴은 홀쭉이가 되어 있다. 눈물이 맺힌다. 이제 여든 중반도 훌쩍 넘기셨다 . 아버지도 사람이였구나…….
누구에게나 아버지는 특별한 존재다. 한 때는 태산이었으나 작은 동산의 아기자기한 둔덕이기도 하고, 분명히 흔들림 없는 큰 나무 같았는데 당신께서도 인간이었다. 어제는 아들이었다가 이제는 아버지가 되어보니 내 아버지의 삶이 애처롭기만 하다. 눈을 감는다.

 바다의 아름다움을 남겨두고라도 거제도의 산과 들녘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해풍을 머금은 산 그림자는 연초록을 머금고 눈이 시리도록 다가온다. 유년시절 아버지와 형제들의 땀으로 가꾸어졌던 과수원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서 있다. 아름다운 들녘이 앞쪽으로 펼쳐져 있고 그 앞으로 어린 시절 가재 잡고 물장구치며 놀던 냇가가 흐르고 있어 한 폭의 그림이다. 불어오는 후끈한 바람에도 개의치 않고 먼 옛날을 떠올리며 추억한다. 70년대 중순경, 새마을 운동의 푸른 깃발이 한창 펄럭일 때, 정부의 '농촌 잘살기 운동'의 하나로 '과실수심기 운동'에 호응하여 소나무 숲이 우거졌던 야산에 감나무, 밤나무, 감귤나무 등 과실수를 심어야만 했다. 이런 이유로 4정보가량의 야산은 온통 과일나무로 심어지게 되었다. 부모님과 여섯 형제, 그리고 품앗이 일꾼 여럿이서 며칠간을 구슬땀을 흘리며 어린 묘목들을 심었던 기억이 떠올라 이마에 땀이 맺힌다. 그렇게 정성스레 심고 가꾸기를 여러 해.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부터 조금씩 수확을 하게 되었고 오랫동안 자식들 교육비로 큰 몫을 하게 되었다. 여름철이면 많은 시간 매미 소리와 풍성한 과일과 함께 하며 시원함을 즐겼던 원두막이 있었음을 떠올리며 두리번거려도 보이지 않는다. 무정한 세월에 허물어져 없어졌음이다.

 부모 나이 들어 일할 수 없고 육 형제 모두 도회지로 떠난다니, 평생을 땅 힘으로만 살아온 아버지는 일손을 놓았다. 혼자 힘으로는 감당하기가 어려웠으리라. 당신의 젊음과 온갖 정성이 담긴 과수원을 당시에도 많은 돈과 바꾸는 일을 결행하였다. 그때의 당신께서 느꼈을 안타까움을 이렇게 토로한 것으로 기억한다.
"나 늙어 더는 관리하기 쉽지 않고, 아들 하나쯤은 농군으로 남아주길 바랐으나 하겠다는 아들이 아무도 없으니 처분하겠노라고 그러니 그리 알라"
고 섭섭함과 아쉬움을 감추고 말하였다. 평생을 농군으로 살아오신 당신께서는 여섯 아들 중 한 명 정도는 농사일을 이어주길 바라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육체적 노동의 고단함을 아는 형제들은 이농현상에 휩쓸려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러하였으니. 끝내 누구도 나서지 않았고 끝내 도회지 사람의 사두기 용으로 팔렸다. 여러 해 관리하지 않아 이제 밤나무는 늙어 숲 일부가 되어버렸고, 울창한 숲으로 변한 저곳이 그때의 우리네 일가가 땀 흘리던 그곳이었는지 의심이 갈 정도가 되어버렸다. 바라보는 가슴이 쓰리다. 안타까움이 크다. 여름 내내 땀 흘리며 잡초 뽑고 낫질하며 보냈고, 가을까지 굵은 땀 흘리며 수확의 즐거움을 가졌었기에 그 안타까움은 더하다. 당신께서 여기 이렇게 서면 어떤 느낌이실까? 정말 한도 끝도 없이 땀 흘렸던 곳이라 미련도 후회도 없을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식으로서 죄송함을 느낀다. 어리석음을 반성하며 말이다.

 한 인간이 역사의 큰 흐름 앞에 놓이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당대의 고난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가야할 운명을 얻는다. 고난의 근, 현대사를 꿰뚫고 살아야만 했던 아버지 세대 삶의 고단함을 우리가 감히 짐작키나 할 수 있는가. 수탈로 일관된 일제 강점기의 나라 잃은 소년의  삶을 거쳐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전쟁 중의 그 거친 이데올로기의 갈등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청년…….
어디 그뿐인가? 가난이라는 무겁지만 극복해야만 하는 가장의 짐, 자유당 정권에 의한 독재의 핍박과 산업화 과정에서의 이농현상으로 인한 자식들과의 이별을 겪고도 이도 모자라 가치관의 변화로 인한 세대 갈등의 피해자로 외로운 노년을 보내야만 하는 현실에 처해 있어 먹먹함이 앞선다. 자주 들러 함께하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아버지. 
철부지 시절 농군의 자식임을 부끄러워 한 적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어리석고 부족한 자식을 용서하소서. 조금 더 따끔하게 충고하고 가르쳐 주시지 그러셨어요? 땅은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늘 말씀하셨지만 어리석은 자식은 그 진리를 이제야 조금은 느껴 봅니다. 땅 힘으로 사는 삶이야말로 진정 조화로운 삶이란 것을 말입니다. 당신께서는 사는 낙이라며 불편한 다리와 휘어진 허리를 하고서도 자식들 먹을거리라도 손수 장만해 주려는 마음. 못난 자식 무엇으로, 무슨 염치로 그 마음을 받겠습니까? 아버지. 많이도 왜소해지신 몸, 많이도 절룩거리는 걸음. 아버지. 당신께서 아니 계신 세상은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 가여운 막내를 위해서라도 부디 무병장수하소서. 일 년만이라도 제가 모시고 싶습니다. 부디 거절하지 마소서. 저의 욕심인 줄 압니다. 오늘도 당신께서 보내신 쌀로 피 만들고 당신께서 주신 몸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죄 뉘우치며 삶을 삽니다. 아버지. 제 뉘우침 다 할 때까지 부디 절 버리지 마소서. 아, 아버지! 사랑합니다. 진정 사랑합니다. 꿈속에서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