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버스 수필

-책과 함께 부산을 걷다!

프롤로그 -책과의 만남, 그 특별한 의미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이들과 인연을 맺는다. 오늘, 좋은 사람들과의 교류로 말미암아 돌아와 앉은 이 시간이 갈바람과 더불어 훈훈하고 감미롭다. 이 만남의 매개체가 책이니 더할 나위 있겠는가? 사)독서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책과 함께 부산을 걷다!’ 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사랑을 나누었다. 사람이 만든 책보다, 책이 만든 사람이 많다는 경구를 떠올리며 참으로 행복한 모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미소를 앞세우고 마주한 이들의 면면이 이채롭다. 공식적인 외출을 갈구하며 자신만을 위해 오랜만에 시간을 할애하여 일상탈출을 꿈꾸는 소박한 이부터 또 다른 내 안의 나를 찾기 위하여 라며 철학적 사유를 앞세우는 이가 있는가 하면 책 속에 내재 되어 있는 역동성을 얻어 가지려 의욕적으로 도전한 이도 있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책읽기를 권유하기 위해 자신부터 책과 친해지려 한다는 엄마의 정성도 보인다. 그리고 중학교 은사를 만나는 기쁨을 갖는 이도 있다. 다양한 참여 동기를 밝히는 이들의 얼굴이 하도 밝아 모임 터인 ‘꿈꾸는 도서관’은 낮달이 비추는 듯 황홀하였다. 낮달의 소망이 해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우리의 소망이 낮달과 같을 것이란 생각을 하였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찾고 확인하여야 한다. 살아가며 어느 정도는 자신을 잃어버리기에 그러하다.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 흔한가. 허공에 떠 있는 그들의 검은 눈동자를 보며 자신을 찾는 시간이기를 나직이 소망하였다. 책 속 길을 여행하며 새로운 지혜를 함께 얻게 되기를 말이다.

 책과 첫 만남을 기억해 보라는 진행자의 말에 순간, 당황함이 스쳐갔다. 60년대를 시골에서 살았던 나에게 있어 처음의 기억은 무척 생소했다. 기억을 더듬었다. 생각을 해 보지 않았을 뿐 그때의 나를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내 생각을 정리하며 강사의 첫 책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였다. 선생을 익히 알고 지내던 터라 사뭇 애절함으로 다가왔다. 책과의 첫 만남을 화두로 어린 시절 외로웠던 시간을 반추해 낸다. 기억하는 책과의 첫 만남은 그림동화집 이었다. 첫돌이 지나고 아버지를 여읜 그는 스물넷에 홀로 되신 어머니가 재혼하고 그 빈자리를 할머니의 사랑으로 채우며 자랐다 한다. 하여, 어머니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단다. 어머니가 선물한 이 책은 그에게 어머니였기에 아마도 그 책이 그에게는 위로였고 포근함이었고 평안이었으리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책장을 넘기는 그 여린 소녀를 안아 주고 싶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책을 볼 때의 좋은 기억을 아이들에게 갖게 해 주고 싶은 마음에 그는 독서 관련 재단과 도서관을 운영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억을 잡아내어  책과 첫 만남을 이야기하였다. 특별한 의미까진 아니어도 그것이 첫 만남인지 조차 어렴풋하지만 떠오르는 기억을 씨줄로 잡았다. 내 어린 시절, 맏형은 문학청년이었다고 기억한다. 시골이었지만 허름한 책꽂이가 있었고 적잖은 책들이 있었다. 하지만, 초등학생인 내가 읽기엔 버거운 것이 태반이었다. 가끔은 여고생 누나가 책을 빌리러 오는 모습에 왠지 큰형이 멋져 보였다. 그 즈음에 정기적으로 배달되는 책이 있었는데, 하얀 표지의 ‘현대문학’이라는 책자였다. 새 책 냄새가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소 풀 먹이러 갈 때 몰래 들고 가서 시나 콩트, 단편소설을 읽곤 하였다. 이해가 다 되진 않았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큰 형이 멋져 보여 흉내를 내어 본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책 읽기를 즐기는데(?) 어느 날 형이

“우리 경만이 신문에 나왔네.”

하며 일간 신문을 내 앞에 펼쳐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분명히 내 이름이 활자화되어 번듯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졸지에 난 어엿한 시인(?)이 되었다. 얼마나 여러 번 읽었든지 삼십 년도 더 지난 지금도 오롯이 기억한다. 난 큰형을 부러워하며 어렴풋이나마 문학의 희열을 맛보았다. 이것이 책에 대한, 문학에 대한 첫 경험이다. 그러나 커 가며 이 희열은 점차 사그라져 기억마저 희미해 갔다. 

 날은 간다

   나비 날개 애무했던 봄날은 저 멀리 가고 없고

   아쉬운 여름날은 눈물로 지새우며 보내 버리고

   고추잠자리 붉은 꼬랑지는 가을마당에서

   자랑하며 노래한다

   꾸르 꾸르륵

   물새소리 교태롭게 메아리치니

   물끄러미 무아경의 어린 사슴은

   겨우 여린 웃음만 배워 미소 짓는다  

   하얀 눈 곱게 내리는 겨울날에는

   사랑을 할 수 있으려나 몰라

   그렇게 또 날은 간다

 기억 속 시 구절이다. 많은 세월이 흘러 공학도의 길을 걸었고 거기에 걸맞게 살았다. 사랑하는 이와 열애를 하여 결혼을 하였고 첫 아이를 만나 행복하였다. 그러나 그 기간은 짧았고 우리에게 시련이 닥쳤다. 업무 중 느닷없이 과로로 쓰러져 의식불명이 되었고 사흘 만에 깨어난 나는 한쪽 팔다리를 영구히 사용할 수 없는 장애인이 되어 버렸다. 하루아침에 닥친 시련 앞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위로도 생명의 끈을 잡게 할 수 없었다. 죽음을 생각했다. 도저히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많이도 슬프고 괴로워 하염없이 울었다. 눈물 많던 아내가 눈물샘이 마를 정도였다. 삶의 포기도 시도했다.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 그런 고통과 좌절의 시간을 보내던 나에게 지인이 건네준 책 한 권이 삶의 끈을 이어갈 용기를 주었다. 고담준론을 논하는 위대한 사상서도, 삶의 지혜를 논하는 고전도 아니었다. 그다지 두껍지도 않은 수기 모음집이었다. ‘적극적인 삶이 가져다준 선물’

그 안에는 극도의 장애를 극복한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들도 살고 있었다. 그것도 적극적으로. 두 다리를 잃고서도, 전신에 화상을 입고서 짓무른 몸을 하고서도, 두 눈을 잃고 암흑의 세계를 살아도 그리고……. 그래도 그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삶이 불행하다고 흐느끼는 나에게 장애는 단지 불편할 뿐이라며. 불행하진 않다며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인간은 극히 이기적이다.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이들을 통해 위안을 느끼니 말이다. 그러나 이 한 권의 책은 위로였고 평화였으며 무엇보다 자유였다. 내 정신을 옥죄고 가슴을 자꾸 작게만 하던 부자유한 육체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서서히 세상과 어울리게 해 준 고마운 존재였다. 무수히 떠 있는 하늘의 별이었다. 별이 하늘에서 반짝이는 이유가 이와 다를 바 있겠는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세상과의 소통을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세상과 삶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이들과 그 작은 책이 가져다 준 의미를 떠올리며 감사의 눈물을 떨어내며 펜을 잡았다. 조금의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느끼며 내 삶을 써 내려갔다. 몇 년 후에 내 삶을 담은 글이 내게 용기를 준 그 책 ‘적극적인 삶이 가져다준 선물’ 속에 담겨져, 좌절과 시련을 만난 이들을 지금도 만나고 있을 것이다.

둘 -부산, 인문학의 숲을 거닐다

자유와 용기 그리고 가난한 휴머니즘

 정신이 진리를 얼마나 모험하는가!

오늘날 우리 정신세계를 이끄는 명사들은 나눔, 느림, 비움, 열림, 무소유, 청빈 등을 강조한다. 19세기를 이끈 사상가들도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는 시대에 어떻게 진실한 삶을 살아가야 할지를 일찍이 설파하였다. 그들이 18세기를 살다간 루소의 사상을 중심으로 선대 사상가의 저작을 통해 당대와 미래를 예견하여 사상을 세웠듯이 21세기 우리는 앞 세대의 지혜가 오롯이 담긴 저작을 통해 삶의 지침을 올곧게 세우고 우리 후손을 위해 사상을 전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상존한다. 현대를 지배한 모순된 물질문명을 바꾸는 힘을 우리 후손에게 건네는 것이 그 무엇보다 소중할 것이다.

상대적 빈곤을 해소 할 대안은 과연 무엇일까…….

19세기 위대한 스승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저작인‘윌든’과‘소로우의 일기’를 손에 들고 조그만 숲이 있는, 가끔 들러 혼자만의 아늑함을 즐기는 곳으로 향했다. 옆에 두고 가끔 펼쳐 보며 고개 끄덕임을 하여 오다가, 참여하는 문학 기행의 필독서로 정해져 읽기를 다시 하여야겠다는 작정을 하였다. 즐겁게 음미하며 읽는다. 조금씩 뿌리는 빗소리는 마음을 그윽하게 해 주어 좋고 솔향기 가득하니 감미롭다. 잠시 후 비는 그치고 비를 부른 갈바람이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있다. 가을 정취를 뿜어내는 자연과 함께 하는 책 읽기는 그리하여 즐거움이 더한다.

“나는 그 어떤 곳에서건 인간의 왕이 되기보다 숲 속의 왕이 되고, 자연의 어린 아이가 되고 싶다.”

고 주장하는 부분에서는 자연주의 사상가인 그의 열망이 들려오는 듯하다. 삶의 본질을 찾기 위해 찾은 숲에서 삶을 실천한 그가 월든 호숫가의 오두막에서 자연의 일부였던 것처럼 이 순간은 나도 단순, 소박하고 싶다. 우리들 몸과 아름다운 자연 사이에 아무런 장벽이 없는 상태로 더욱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행동하는 소수의 개인이고 싶다.

2009년 가을이 한창인 시월의 둘째 금요일, 중앙동 40계단 옆에 있는‘백년어 서원’을 향하였다. 매주 한 차례 책과 함께 부산을 걷는 발걸음은 즐겁다.

백년어, '물고기가 사는 곳에 사람이 삽니다.'

도착한 그곳은 부산 인문학을 다시 생각하며, 옛 명성을 잃어버리고 공동화가 진행되고 있는 황량한 도심에 자리한 열다섯 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온갖 서적을 어지러이 던져 놓고 따뜻한 찻물 올려놓고서 자유와 용기 그리고 가난한 휴머니즘을 생각하는 주인장 김 시인이 따뜻한 미소를 앞세우고서 분주히 나그네를 반긴다. 미소가 참 곱다. 이 황량한 곳에 인문학을 널리 인식시켜야겠다는 그녀의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좋은 뜻을 가지고 있으면 동행자는 반드시 있으며 물질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못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며 오히려 우매한 나를 꾸짖는다. 남은 삶을 돈을 추구하며 살 것인가? 라는 일갈에는 가슴이 작아졌다. 가난이 가지는 에너지가 크다고 역설하면서 나만 바뀌면 세계 문명사는 바뀐다며‘자발적 가난’을 주창하는 그에게서 인문학을, 소로우와 에머슨을 보았다. 소로우가 그러하였듯이 행동하는 소수의 개인이 지니는 강인함이 엿보인다. 그에게는 이곳이 월든 호숫가일 수 있으며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는 듯하였다. 경제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어쩌면 그는 참 스승이다. 부를 추구하며 사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제시하며 잘 산다는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자본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다소 이론적이고 이상론이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용기만 있다면 실현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에 머문다. 이렇듯 끝없는 추구로 말미암아 소외된 자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부여하자며‘골목 인문학’을 이끄는 그의 용기가 너무도 부러웠다. 상생, 공존이 사라져 가는 우리 사회를, 오래전 더불어 살았던 공동체 의식을 다시 발현할 수는 없을까? 라는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1975년‘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산업화로 인해 변모하는 라다크 전통 사회를 경험하며, 인류 발전의 척도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과학 기술 문명과 산업화가 인간 본성을 얼마나 파괴 하였는지의 사유를 담은‘오래된 미래’에서도 우리가 지향해야할 미래는 이미 오래전에 존재하였다고 역설하며 깨우침을 주었다.

'나만 바뀌면 세상은 달라진다.’

간절함으로 지극함으로 더불어 살아감을 생각한다면 공존을 향한 에너지는 충만해질 것이다. 지금 우리는 과학 문명이 제공한 편리함에 익숙해져 우리 선조가 가졌던 어울림의 가치를 상실하고 상대적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물질 획득에 인생의 대부분을 소모한다. 모순된 문명을 바꾸는 힘은 나부터 시작하는 것에서 나온다는 김 시인의 말을 되새기며 용기를 내어 타인의 고통에 대해  관심을 두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거두어 담아본다. 강연 말미에 언급한‘무용지용(無用支用)’을 되새기며 그가 권한 유대인 비밀 지혜서‘카발라’를 이른 시일 내에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자주 뇌까리는 에머슨의 사상이 오롯이 담긴 시를 다시금 떠올려본다.

무엇이 진정한 성공인가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셋 -부산, 생태를 느끼다

길을 지워 길을 열다

 “자신의 목숨을 위협받기 전에는 다른 생명을 해하지 않는 것이 평화이고 굶주림을 면할 만큼만 자연에서 취하는 것이 생명이다.”

어느 시인의 말이라며 전하는 인문학 강연장의 강사 연설이 뜨겁게 가슴에 와 닿는다. 평화, 생명, 소통이 요즘 사람들의 화두이다. 자본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보존보다는 개발이 우선되기에 그러하리라. 이즈음의 우리에게, 일상에서 벗어나 월든 호숫가로 찾아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를 통해, 과학이 지배하고 물신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에 성공한 삶이란 과연 무엇인지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지나친 속도 경쟁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하고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한다고 사회와 자신에게 끊임없이 요구하면서 더 많은 것을 소비하며 살아가기에 상대적 가난에 시달린다. 물질적 성향이 강한 이러한 시대흐름에 순응하지 않고 인간의 순수성을 고찰하여 자연과 하나 되어 사는 삶을 생각해야 할 때이다. 

근래에 개발 논리를 들며 추진하는 국책 사업을 보면 훗날 지워져야 할 길을 새로이 만들려 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 새로이 만든 물길은, 자연 순리대로 역사의 질곡을 담고 유유히 흐르던 길을 절단함은 물론이고 그 속에서 존재감을 지니고 살아가는 수많은 생물을 위협할 것이 자명하다. 이는 자연 파괴의 길이며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자행되는 돌이킬 수 없는 악행이다. 천성산 도롱뇽의 삶의 터전을 고수하기 위해 온몸으로 고속전철 길을 막으려 하였던 지율 스님의 정신이 이 시대에 가지는 가치는 무엇인가…….

자연을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수단으로만 여기는 의식은 언제부터 비롯되었는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기에 자연을 보듬어야 함에도 너무 짧은 호흡으로 대하기에 보존 개념이 약해지는 것은 아닐까. 나팔꽃은 피지 않으나 피어 있다. 너무 느리게 피기에 눈으로 볼 수 없을 뿐이다. 우리는 인간의 오감으로 감지 못하는 것은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는 경향이 있다. 오솔길 옆에 뿌리를 내리고 느린 호흡을 하며 살아가는 바위를 그저 무생물로 치부하여 무심히 깨부수고 길을 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서로 주고받는 것이 사랑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개발 광풍으로 말미암아 우리 금수강산은 잘리고 부서져 나가고 있다. 자연재해가 심해지는 것이 어쩌면 살려달라는 그들의 외침일지 모른다. 소유양식의 삶에서 존재양식의 삶을 지향해야 그들과 어울릴 수 있음은 진리다.

다시 19세기의 소로우를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고, 땅과 하늘에 있는 경이로운 사물들과 소통하면서 하나가 되었다. 상대적 빈곤으로 정신적 궁핍이 밀려들던 시기에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선택함으로써  ‘고결한 빈자’ 가 되어 완벽한 인간이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자기 안에 숲을 가짐으로써 자본주의의 개발 논리가 만든 길인 정복자의 길들을 지우고 새로운 길, 자연과 사람이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길을 열어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 숲길에서 이렇게 외친다.

“인간은 나에게 제약이지만 자연은 자유이다. 인간은 나에게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하지만 자연은 나를 이 세상에 만족케 한다.”

라고. 자연의 관찰자로, 자연을 사랑하고 그 속에서 동화되는 삶을 살며 개발 논리가 지배하는 길을 지우려 한 것이다. 루소로부터 이어받은 이러한 자연주의적 사상은 소로우에 의해 숙성되어 마하트마 간디와 에리히 프롬에게 이어졌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삶의 지침으로 울려온다.

2009년 가을에 소로우 사상을 다시 만났다.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을 지키는 일에 발 벗고 나선 ‘금정산 생명문화축전’ 집행위원장이 바로 그다. 강연장의 그는 소로우의 저작인 ‘윌든’ 을 손에 들고 환히 웃고 있었다. 산길을 대화를 나누면서 걸어 보라며 운을 떼고 나서, 자연이 더불어 하기에 사람 간의 진심이 전달되어 평화와 소통이 이루어진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것이 자연이 지닌 정화 기능이리라. 산을 즐긴다는 그는, 근래에 산 정상까지 오솔길을 지우고 정복자의 길인 찻길이 만들어짐을 안타까워하였다. 길이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다면 지워져야 할 길이라 역설하면서. 그리고 널리 쓰이는 환경이란 용어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의미가 내포되기에 자연을 환경으로 보지 말고 생명으로 보아야 근본적 인식이 전환된다며 앞으로 환경운동이 아닌 생명운동이라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어 난립하기까지 한 많은 축제들의 문제점이 일방적 보여주기 식이어서라면서 국민이 자율적으로 참여하여 어울림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며 월드컵 때의 붉은 악마 응원을 떠올려 보라 한다. 이러함이 앞으로 축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며, 자연과 더불어 인간이 함께하는 금정산 축전을 준비한다며 자발적 동참을 바라는 마음을 내보였다. 이런 작은 움직임을 크게 받아들여 나부터 실천할 때, 이상론인 듯한 그의 주장은 널리 인식되어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다.

늘 즐겨 찾는 바다를 조금 전 만나고 왔다. 가을 햇살을 받은 쪽빛 바다는 삶에서의 작은 고민을 잊게 한다.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 한 편에 떠다니는 새하얀 뭉게구름을 마주하니 이내 미소가 떠오른다. 이 복을 혼자 누리기 아까워 벗에게 잠시 쉬며 하늘을 한번 보라고 문자를 보냈다. 돌아와 앉은 지금은 어느새 마음이 정리되고 살아갈 용기가 생겼다. 이것이 바다가 주는, 자연이 베푼 사랑이리라. 불을 끄면 별이 보인다. 자연을 수단으로만 여기기를 멈추고 친구가 되어 더불어 걸어가야 하리라. 모순된 의식을 걷어내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모색할 시기가 지금 아니겠는가. 오늘 저녁에는 호젓한 산속 오솔길을 찾아, 이제는 개발보다는 보존에 치중하는 사회를 소망하며 달빛을 받으며 걸어볼 요량을 한다.

넷 -부산, 다시 인문학을 생각하다

인간의 가치를 다시 묻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인간은 누구나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추구한다. 오색 단풍이 물든 산, 가을을 담은 바다, 오솔길에서 만난 다람쥐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 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삶을 핑계로 무감각을 앞세워 살아간다. 아름다움은 용기 있는 자가 이루어 내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름다움의 주체는 인간이다. 책을 매개로 하여 세상과의 아름다운 소통을 꿈꾸는 작은 단체. 아름답지 않은가.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자연과 하나 됨을 소망하는 마음으로 책과 더불어 부산을 걷는 사람들. 그 다섯 번째 공간을 찾아든 그들이 참으로 아름다워 보인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인문학을 통해 인간의 가치를 다시 묻고자 하는 모습이 그윽하고 정겹다.

빨강머리 앤이 살았던 초록지붕의 집. 바람의 길, 우주를 담은 집. 소녀가 꾸었던 꿈이 실현되는 곳. 경계를 뛰어 넘어 세계의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그 답을 들어 희망을 제시하려는 이들이 머무는 곳. 가까운 미래에 동네마다 빼곡히 들어선 학원과 교습소 자리에 도서관과 작은 책방들이 세워져 학교를 마친 이 땅의 청소년들이 도서관과 작은 책방으로 몰려와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옹기종기 나무 그늘에 모여 앉아 읽고서 열띤 토론을 하는 모습을 떠올리는 이. 불 꺼진 밤, 별과 달에게 자신의 꿈을 설명하며 희망을 꿈꾸는 청소년들이 호흡하는 세상을 소망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머무는 곳. 정의와 희망을 생각하는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 인디고 서원.

똑 똑 똑~

그곳의 주인장은 조금은 서툰 모습으로 찾아든 나그네들을 대한다. 고추잠자리 한 쌍이 찾아들어 일행을 반긴다. 종종걸음으로 시간을 쪼개어 쓰는 듯한 주인장에게 소중한 시간을 빼앗는 것은 아닌지 미안해지기까지 하였다. 그는 정의와 희망을 힘주어 이야기한다. 이상론인 듯하지만 그 이상을 추구해야만 오늘을 극복할 수 있겠단 생각을 하였다.

세계적 미래학자인 엘빈 토플러는 그의 저서 ‘부의 미래’에서

“나는 점쟁이도 예언가도 아닙니다. 다만 현재의 현상과 흐름을 바탕으로 미래의 사회와 경제를 예측하는 학자일 뿐입니다. 미래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특히나 오늘날처럼 변화가 심하고 복잡한 세상에서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무모하기까지 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미래학이란 과거 또는 현재를 연구하고 분석하여 이를 토대로 미래를 예측하는 학문입니다. 오늘의 일들은 미래의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고 언급했다. 이는 현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 미래가 달라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가 물신주의에 사로잡혀 개발에만 치중하고 과학을 맹신하여 편리함만을 추구한다면 미래는 생명체가 살기 어려운 지구가 될 것이란 경고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 청소년이 이러한 상황을 직시하여 지구의 미래를 예측케 하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앞서야 한다는 생각이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 현재에 관심을 가져야 함은 진리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전문가는 물론 영화나 소설에서도 어두운 미래 사회를 그려 경각심을 갖게 한다. 하지만 결코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면 안 될 것이다. 역사를 통해 보더라도 인간의 창조성은 심각한 위기에 오히려 큰 능력을 발휘해 왔다. 현실은 미래를 극복할 바로미터다. 인간이 처해진 조건에 대해 연구하는 인문학이 가지는 순기능이 널리 인식되어야 함이 여기에 있다. 하여, 청소년들에게 인문학을 통해 인간이 인간인 이유를 사유케 하여 인간의 가치를 정립하게 하는 일에 솔선하는 그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

정의롭고 희망에 찬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듣고 느낀 청소년들이 자라 동심을 잃지 않고 정의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며 이러한 구성원이 모여 희망을 나눌 수 있음은 자명하다. 이러한 사유의 끝자락에, 내 희망을 갈구함을 넘어 나 아닌 다른 존재의 희망을 생각해 보았는지 나에게 묻는다. 근간에 ‘바그다드 동물원 구하기’란 책을 접하며, 가장 무모하고 따뜻한 가슴을 가진 남자를 만나 굳건한 희망을 보았다. 이라크 전쟁 중 죽어가는 동물들에게 삶의 끈을 이어주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걸었던 환경보호운동가 로렌스 엔서니.

“지구에서의 생존은 다른 생명체와 목표를 공유할 때 가능하다. 누구도 혼자의 힘으로는 살아갈 희망이 없다. 우리는 모두 생명이라는 배에 함께 타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경계는 없고 인간과 자연의 경계도 없다. 그들의 생존이 우리의 희망이다.”

라고 그는 강변한다. 전쟁의 폐허 속에 죽음의 고통과 맞서 싸우는 그들에게 다가가 희망을 부여하여 다시 숨 쉬는 동물원으로 태어나게 한 사랑. 그의 생명사상은 실로 아름답다. 이 사회의 정의는 평등하게 대우받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만물의 원리도 이러해야 함을 온몸으로 실천한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리라. 모두가 경시하고 외면했던 생명을 자신의 목숨을 걸고 건져낸 용기. 모순된 물질문명 속에서 이기심을 앞세워 살아가는 나에겐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이 머리에서 가슴까지라고 하였다. 자신의 목숨을 내건 사랑을 선택하기까지 머리와 가슴의 갈등은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 같은 범인은 감당하기 어려워 포기하지 않았을까. 그의 향기가 내 가슴 안으로 흘러들어와 마른 가슴을 적셔 준다. 이런 따뜻한 영혼을 우리 청소년들이 공유한다면 세상은 따뜻한 희망이 피어날 것이다.

인간과 자연이 종속관계가 되면서 잃어가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과거의 공동체 삶을 아이에게 꾸준히 들려주는 것이 오늘날 문명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가 될 것이란 생각에 머문다. 내가 알고 있고 믿는 부분 이외에도 관심을 두고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지니고 살아가는 아이들로 자라게 하기 위해 인문학이 지니는 효용성은 자못 클 것이란 생각을 이 아름다운 단체를 통해 내 가슴에 담게 되었다. 이를 통해 희망이 생겨날 수 있음을 거두어 담는다. 희망이 없으면 에너지도 사라지고 행동할 수도 없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본성을 쫓아 삶에서 이를 실천하려는 노력을 통해 나에게도 다른 이에게도 나아가 모든 생명체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것이다. 삶이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도록 이제부터라도 노력해야겠다. 이 노력이 계속될 때 세상의 진정한 중심, 창조가 일어나는 진원지는 우리가 될 것이다. 더불어 아름다운 미래가 보장될 것이다. 올려다본 가을 하늘이 손을 뻗쳐 집 앞 은행나무로 시선을 옮기게 한다.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다. 아! 내 영혼마저 아름다워진다. 먼 미래도 이러하리라.

다섯 -부산, 문화를 즐기다

배 밭에서 소통의 미학을 만나다 

 아침이 좋은 도시, 기장. 이곳에 미학을 추구하는 젊은 작가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배’라는 이름을 달고 항해하고 있다. 상호 소통으로서의 예술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계획 아래 2006년 공공재원으로 시작되어 현재까지 소통의 미술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오픈스페이스 배’.

급변하는 현대미술 흐름에서 지역 미술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그들을 만나, 지역 대안 공간의 활동과 현 위치 그리고 꿈틀거리는 공공미술의 현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하여 부산, 문화를 생각하였다.

어렵사리 찾아간 그곳은 부산이라는 대도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포함되지도 못하는 이중적 위치였다. 부산을 바라보면서 부산에 진입할 수 없는 독특하고 미묘한 공간에 위치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곳이었다. 나지막한 야산이, 수확을 마친 배 밭을 포근히 품어 안고 늦가을 풍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색색이 곱게도 물들었다. 나의 색깔은 어떤 것일까? 이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뒤돌아본다. 진실 되고 아름다운 색을 지니며 살아가는지, 세상의 아름다움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생명들의 신비로움을 알고 있는지, 바람소리의 평화로움을 알고 살아가는지…….

이런 생각으로 주위를 걷자니 무언의 의미를 부여한 듯한 조형물이 곳곳에 자연과 어울려 있어 조화로웠다. 세상을 바라보며 글로 내 생각을 표출해 내고 있기에 미술가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며 그 느낌을 어찌 표현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그림으로 나타낸다고 하였으니 미술가의 다양한 눈이 바라본 시대정신이 어떠한지 궁금하였다. 음악가는 소리를 통해, 시인은 문자로 삶을 표현하듯이 미술가는 조형언어로 삶을 노래할 것이기에 세상살이 바쁜 소시민인 우리에겐 전혀 다른 세상일이라 여겨 왔었다. 그러하기에 사뭇 기대가 커갔다. 미술이 삶에 가까이 존재한다는 개념만이라도 얻으면 좋겠단 생각이었다.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미술가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야 할 것이고 우리는 그 진실에 접근해야만 하는데 그 생각이란 게 주관적일 터이고 바라보는 사람도 주관적 관점일 것이기에 가슴으로 느껴야 할 것이란 생각을 하여본다. 똑같은 그림이라도 보는 이의 호흡이나 관점에 따라 감응이 달라지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그러기에 좋은 감상자는 내 가슴이 느끼는 대로 평가하면 될 것이다. 그림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일 터이니 말이다.

얼마 전 미술관에 들러 현대 미술을 감상할 기회가 있었는데 도무지 아무것도 읽을 낼 수 없어 당황하며 마음이 움츠려들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현대 미술을 접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경험하였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것은 아마도 현대미술이 목적한 바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미술가들의 눈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그들이 근대 과학의 영향으로 사람과의 소통보다는 과학처럼 하나의 공식으로 그림세계를 이끌려 하는 것도 다가서기 어려웠던 요인이리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 인데 현대 미술은 ‘어떻게’ 그리는가에 치중하다 보니 관객과 작품의 소통을 단절시킨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일 것이란 생각을 하여본다.

‘소음이란 고통만을 주는 일정치 않은 소리에 불과한 것일까?’ 란 질문을 앞세우고 일행 앞에 펼쳐진 복잡한 장치들의 조합물. 내 눈에는 배관공이 남은 부품으로 만든 무용한 장치처럼 보였다. 이 작품은 작가가 이명 현상이 심할 때, 소음을 청각적인 소리의 기호로 시각화시켜 보여주려 창작하였다고 설명한다. 미술에 문외한인 내겐 도통 무슨 말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역시나 어렵다. 그래도 무언가 찾아내려 애쓰는데, 안내자는 이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친절하게 작품을 설명하여 준다. 조금은 가슴으로 느낌이 오는 듯하여 미소를 지었다. 이어 그는 이 단체의 이념과 지금까지 한 일과 앞으로 진행할 일에 대해 전시실과 작업장을 오가며 세심하게 짚어준다. 이 단체가 바로 이러한 현대미술의 문제의식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 공공미술로서의 효용성을 널리 확대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2008년 공공미술 프로젝트였던 ‘안창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2006년 정부 주도로 공공미술 활성화 사업이 진행되었고 부산에서는 수정동과 물만 골 생태마을을 중심으로 예술가와 주민을 잇는 골목길 벽화 사업이 진행 되었다 한다. 하지만, 예산을 이유로 반짝 쇼에 머물고 지원이 삭감되면서 멈칫하였다고. 그렇지만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젊은 작가들과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공공미술이 지속하여져야 함을 널리 알렸다고 한다. 척박한 도심 속 산동네 마을인 안창마을 골목길을 온통 벽화로 물들이면서 지역민과 미술이 소통하는 성과를 보게 되었다며 이러한 소통의 미술이 앞으로 지향해야 할 방향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인간과 함께하는 미술이라는 의미의 공공미술. 이 공공미술이 널리 활성화되는 것이야말로 인간과 자연과 예술이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이 일부 향유층만의 소유물 또는 유가증권의 가치로 전락할 것이 아니라 미술이 일상과 삶의 가까이에 존재함이 널리 인식될 때 도심은 아름다움으로 채워질 것이다.

예술은 삶의 일부이고 즐거움의 대상이기에 예술을 누리는 심미안을 갖고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삶의 질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공미술이 더욱 활성화되어 미술의 거대담론이 아니라 삶 속에 묻어나고 우리 일상이 되어 사람들과 소통될 때 미술은 비로소 예술로서의 기능이 극대화될 것이다. 나는 도시에 산다. 황량한 도심 속 삶에서 만나는 빌딩 앞의 조각 한 점, 골목길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벽화, 공원에서 만난 노란 유치원 아이들이 미술과 노는 모습, 자연이 점점 도시로 접근해 오는 풍경, 이 모든 것이 공공미술이 도시에서 행하여질 때에 보게 될 풍경이리라. 이러함이 실현될 때 머리로 보는 그림이 아니라 진실한 가슴으로 느끼는 그림이 될 터이며 도시에서의 삶은 그나마 향기로울 것이다. 제2, 3의 안창마을 골목길이 탄생되기를 소망하게 됨은 이 때문이리라. 이러함이 실현될 때 미학이 인문학으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될 것이란 생각을 하여본다. 우리 일행을 자연과 소통하는 미술 세계로 안내해 준 젊은 미술가의 둥근 얼굴이 다시 보고 파짐은 왜일까…….

여섯 -부산, 10경을 돌아보다

삶이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도록

 내 마음에는 늘 바다가 일렁인다. 고향 거제도에 탯줄을 내려놓고 여기 부산 바다를 즐긴 지도 어언 삼십여 년. 그동안 내가 머무는 공간에 많이도 무심하였단 생각에 이르러서는 먹먹해진다. 늘 동무처럼 함께 했건만 부산바다가 안은 역사나 문화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고향 바다 근처에 오두막 한 채 마련해 돌아가겠지만, 이제라도 조금이나마 이에 다가서 보고자 길 떠남을 준비했다. 나만의 색은 파랑…….

마음에 넣어둘수록 점점 커지는 것이 고민이라고 하였던가. 마음속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고민을 털어 내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진녹색의 동백과 초록 무늬 바다와의 조화, 거기에 파랑을 물고 하늘을 나는 갈매기, 이를 배경으로 태평양과 마주 선 오륙도. 시 한 수는 읊어도 좋으리란 기대로 기다렸던 몇 날이었다. 어제는 큰아이의 수능 날이었다. 줄곧 열심히 해 왔고 믿음이 있었기에 수험생 학부모의 잔잔한 떨림을 은근히 즐기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결과 앞에 망연자실한 아이의 떨리는 눈을 마주하니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애써 아이에게 위로와 용기를 건네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소심한 아빠는 끝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 시대 최고 문필가이자 석학이신 이어령 교수님이 '생각에 날개를 달자' 라는 책으로 우리 사회에 던진 일갈이 떠오른다.

"왜 남들 다 몰려가는 곳으로 들이밀어요? 이제는 학벌 가지고 따지는 시대는 끝납니다. 아이를 창의적으로 키우세요. 창조적인 일을 하도록 해야 돼요. 창조적인 일은 경쟁이 없습니다. 수요가 얼마든지 있어요."

머리는 이해 하지만 가슴이 선뜻 수용하지 못하기에 오래도록 뒤척였다. 눈을 뜨니 늦은 아침이다. 길 떠남에 망설임이 있었지만 약속한 일이기에 늦은 출발을 하였다. 마주하며 위로함도 좋겠지만 사랑 속에는 말보다는 오히려 침묵이 더 많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이 침묵이 오히려 슬픔을 정화하리란 생각을 하였다. 아들의 슬픔까지고 털어 내고 오리란 생각으로…….

바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넓고 깊은 꿈을 키울 수 있는 곳.

부산의 풍경을 느낄 수 있고 역사를 더듬으며 옛 자취를 음미할 곳과 문화를 공유할 공간이 부산에는 얼마나 많은가. 하루 일정이라 이를 모두 소화하지 못하고 범어사를 기점으로 충렬사를 거쳐 해운대 동백섬을 들렀다 UN 묘지에 머문 후에 오륙도를 바라보며 달려 태종대에 이르는 여정이라며 안내자도 시간의 부족을 못내 아쉬워한다.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 기슭에 자리 잡은 대사찰인 범어사에 도착하니 그윽한 가을 산이 자태를 드러내며 일행을 반긴다. 흐린 날이라 운무가 낮게 내려앉은 풍광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자연의 위대함을 음미하며 느리지만, 행복하게 걷는다. 장 자크 루소는

“걸음이 멈추면 생각이 멈춘다.”

하였으며, 미국시인 윌러스는

“나는, 다름 아닌 내가 걸어온 세계다.”

고 하였다. 오늘 우리가 걷는 이유는 우리의 두 발로 디딘 세상이 더욱 아름답기 때문이리라. 처마 밑 풍경이 어지러운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은은함보다는 요란하게 울리며 반긴다. 범어사엔 여러 차례 들렀으나, 안내자인 정 선생의 깊고 넓은 역사적 식견이 담긴 설명 앞에서 새로운 앎을 공유하게 되어 또 다른 느낌으로 부산이 다가왔다. 신라시대 왜구를 막기 위해 창건된 호국 사찰이라며 조계문, 당간지주, 삼층석탑, 석등, 대웅전의 유래와 의미를 설명한다. 건축물에 새겨진 문양 하나하나에도 의미를 담은 듯하여 우리 조상의 지혜가 느껴졌다. 대웅전에서 돌아서서 앞으로 향하니 가을 산 절경이 펼쳐졌다. 가슴이 뻥 뚫리며 내가 산이 되었다. 무슨 말로 이 아름다움을 표현하랴, 불타는 이 가을 산의 고소함을. 대웅전 옆 관음전은, 어제의 수많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발원한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하여 애절함이 느껴짐은 어쩔 수 없다. 조금은 은은하게 울리는 풍경소리를 뒤로하며 범어사를 내려서는데 내려앉았던 하늘에서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우산을 받쳐 들고 걷는 일행 모습이 또한 정겹고 아름답다.

빗길을 사뿐히 달린 노란 버스는 충렬사에 도착하였지만, 일행의 동선에서 이탈하였다. 언젠가 지인이 비 오는 날 동승을 권하자 내게 건넸던 말이 멀리서 들려오는 듯하였다.

“비가 오면 우산 받치고 걸으며 느껴 보시게. 촉촉한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그 꾸지람에 차에서 내려 비를 맞으며 연못을 한 바퀴 돌며 충렬사를 음미하였다. 잠시 후 빗길을 걸으며 선조의 마음을 담아 온 일행들이 맑은 얼굴이 되어 돌아와 즐거움을 내보였다. 함께 나서지 못했음이 부끄러웠다. 다음 행선지는 해운대의 동백섬이다. 집 근처라 자주 들리는 곳이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시간이 많이 흘러 UN 기념공원 답사는 하지 못하고 곧장 마지막 행선지인 태종대로 향했다. 한참 동안 도심을 달려 영도에 들어서니 뿌연 차창 너머로 드넓은 바다가 넘실댄다. 부산 바다의 상징이며 부산항을 오가는 배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섬 오륙도가 저 멀리 태평양의 거친 파도에 맞서고 있으리라. 오는 내내 안내자는 정성을 다해 부산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한다. 그동안 미처 느끼지 못하고 소홀하였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뿐일까.

흐린 날이라 다소 움츠려 들었지만 빗속에서 부산을 느낄 수 있어 색달랐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이었기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표면에 천착하지 말라는 경계의 뜻인 ‘무감어수無鑒於水’ 라는 경구가 떠오름은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지 말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추어 보라는 ‘감어인鑒於人’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임을 거두어 담아 둔다. 아들의 아픔을 아빠의 큰마음으로 안아 주지 못한 것이 못내 부끄럽다. 많이 걷지 못해 아쉽지만 조금은 무거웠던 삶의 무게를 털어내었고 새로이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되었으니 또한 기쁨이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지치고 힘든 아이를 꼭 안아주리라. 그리고 바다에 들러 넓고 깊은 꿈을 꾸게 하리라. 감수성이 풍부하고 아픈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하고 세상에서 쓸모 있는 지식인으로 자라나야 함을, 인문학 정신을 토대로 전하리라. 삶이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도록.

에필로그 -책과의 만남, 그 특별한 날

숲 속에서 책을 만나다                  

 가을을 다 삼킨 초겨울비가 스산하게 내리고 있다. 두어 번 그날을 회상하며 펜을 들었다가 풀잎 이슬처럼 내 사유는 증발하였다. 소중한 것을 내 동공 깊숙한 곳에 아련함으로 남겨 두었는데 텅 빈 거실의 전화기가 울리고 끝내는 그들을 떠올리게 한다. 꽃이 잎 같아지고 이제는 하나하나 균열이 보이는 낙엽 되어 떨어졌으니 비에 젖은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데…….  소중한 것들을 말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지만, 오늘 이후를 또 가야 하기에 냉량한 나목의 숨결 속으로 떠난다. 이제 그곳은 맴도는 차가운 바람과 함께 봄의 연정을 잉태하기에 바쁘리라. 가진 것 다 내어주고 서 있는 모과나무도 그리움 잉태한 채 열매 꿈을 꾸고 있으리니.

부산의 여기저기를 책과 함께 걷고 사색하며 사랑을 나눈 지 3개월이 되었고 이제 그 마지막 자리를 향하기 위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차가운 칼바람이 불어 왔지만 늦게 도착한 차를 원망하진 않았다. 이 날의 목적지는, 세 갈래 물결이 일렁이는 나루라 하여 이름 지어진 삼랑진에 있는 숲 속 도서관, '토끼와 옹달샘' 이다. 고속도로를 내달린 차가 삼랑진 역사를 지나 안태호 벚꽃 길 오른편 언덕에 있는 소담스러운 풍경이 있는 곳에 일행을 내리게 한다. 퍽 아름답고 인상적인 곳이었다. 특히나 주변 풍광이 빼어나 이내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이곳에 숲 속 도서관을 조성하면서 밝힌 변을 들어 보면 인문학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느껴진다.

“토끼와 옹달샘 이야기는 조그만 시골 농가와 그곳에서 가족으로 사는 자연과 동, 식물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강원도 산간벽지에서 태어나 줄 곳 도시인 행세를 해온 사람이, 가끔 삶이 힘겹고 어려울 때, 옛 고향의 정서를 그리며 그들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지난 3개월 동안 줄곧 사유하였던 인문학 실천의 장이 이곳 숲 속 도서관이 아니고 무엇이랴!  하여, 이곳에서의 마지막 활동이 사뭇 의미롭게 다가왔다.

살랑살랑 조곤조곤, 서로 나누는 시간.

조금은 긴장되고 흥미로우며 기대가 되었다. 모두의 감흥과 생각이 다를 수 있기에 이 나눔의 시간은 소중하다. 하나같이 좋은 시간이었으며 행복한 추억이 될 것이라며 둥근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자신이 읽었던 책 중에 모두와 공유하고픈 책을 소개하는 시간에는 공감과 의욕마저 넘쳤다. 그리고 이 만남을 글로 나누며 더 좋은 의미의 만남을 약속하였다. 수료식이 진행되고 준비한 선물을 나눌 때는 너와 지붕이 들썩거릴 정도의 박수와 함성이 함께하였다. 앞마당의 닭이 훼를 치고 강아지가 놀라 짓고 토끼의 귀가 쫑긋 세워졌으며 숲 속 정자나무도 빙그레 웃고 있으리라. 마주앉은 산 그림자가 짙게 물들 즈음 아름다운 숲 속에서의 사랑 나눔은 포근히 갈무리 되었다. 그리하여 숲 속 도서관 ‘토끼와 옹달샘’에서의 에필로그 행사는 특별한 날로 기억될 것이다. 너, 나 우리 모두에게.

아기바람이 솔가지에서 새근새근 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