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다 삼킨 초겨울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있다. 그날을 회상하며 펜을 들었다가 풀잎 이슬처럼 내 사유는 증발하였다. 소중한 것을 내 동공 깊숙한 곳에 아련함으로 남겨 두었는데 텅 빈 거실의 전화기가 울리고 끝내는 그들을 떠올리게 한다. 꽃이 잎 같아지고 이제는 하나하나 균열이 보이는 낙엽 되어 떨어졌으니 비에 젖은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데......  소중한 것들을 말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지만, 오늘 이후를 또 가야 하기에 냉량한 나목의 숨결 속으로 떠난다. 이제 그곳은 맴도는 차가운 바람과 함께 봄의 연정을 잉태하기에 바쁘리라. 가진 것 다 내어주고 서 있는 모과나무도 그리움 간직한 채 열매 꿈을 꾸고 있으리니.

부산의 여기저기를 책과 함께 걷고 사색하며 사랑을 나눈 지 3개월이 되었고 이제 그 마지막 자리를 향하기 위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차가운 칼바람이 불어 왔지만 늦게 도착한 차를 원망하진 않았다. 이 날의 목적지는, 세 갈래 물결이 일렁이는 나루라 하여 이름 지어진 삼랑진에 있는 숲 속 도서관, '토끼와 옹달샘' 이다. 고속도로를 내달린 차가 삼랑진 역사를 지나 안태호 벚꽃 길 오른편 언덕에 있는 소담스러운 풍경이 있는 곳에 일행을 내리게 한다. 퍽 아름답고 인상적인 곳이었다. 특히나 주변 풍광이 빼어나 이내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이곳에 숲 속 도서관을 조성하면서 밝힌 변을 들어 보면 인문학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느껴진다.

“토끼와 옹달샘 이야기는 조그만 시골 농가와 그곳에서 가족으로 사는 자연과 동, 식물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강원도 산간벽지에서 태어나 줄 곳 도시인 행세를 해온 사람이, 가끔 삶이 힘겹고 어려울 때, 옛 고향의 정서를 그리며 그들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지난 3개월 동안 줄곧 사유하였던 인문학 실천의 장이 이곳 숲 속 도서관이 아니고 무엇이랴!  하여, 이곳에서의 마지막 활동이 사뭇 의미롭게 다가왔다.

일행은 소담스럽게 펼쳐진 전경에 감탄하며 이내 동심에 가득 찬 얼굴이 되어 주인장이 정성스레 가꾸어 놓은 너와 황토 집을 비롯해 토끼장과 닭장을 시작으로 산책길에 올랐다. 원두막을 지나 여름 갈 내내 온갖 야채가 풍성했던 텃밭을 거쳐 고사리와 매실 밭, 산딸기 밭에서 달콤함을 느끼고 포도 그늘 막에 이르러 때마침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마음을 내려놓고 깊게 들숨으로 자연을 느꼈다. 그곳에는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바라보는 평화로움이 있었다. 다음으로, 물레방아를 바라보며 잠시 시름을 잊고 옹달샘의 물로 목을 축이고 나서 산딸기 길을 따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걷다 전망대에 이르러서는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에 자기도 모르게 탄성들을 자아내곤 하였다. 자연을 느끼며 산책할 수 있게 꾸며진 길이어서 매우 좋았다. 주인장은 금잔화와 후리지아를 위시하여 이곳에는 삼십 여종의 꽃이 널리 분포되어 자라고 있고 모과나무, 밤나무, 호두나무, 소나무 등이 자생하며 수박, 배, 감, 사과, 포도 등 과일나무가 심어져 있고 온갖 채소를 가꾸어 나누어 먹고 있다며 며칠 후에 있을 김장행사에 초대한다. 더불어 사시사철 언제든 환영한다며 고운 미소를 짓는다. 이곳의 활용은 개인이나 단체 누구든 예약 후 가능하며 사용료는 1인당 책 한 권씩 기증하면 된단다. 참으로 흐뭇한 조건이라 따뜻한 마음이 되었다.

잠시 후 일행은 황토 너와집에 숨을 고르며 둘러앉았다. 홍조 띤 그들의 얼굴에서 활력이 느껴진다. 잠시 소란스러움이 가시고 모두는 지난 여정을 회상하여 보았다. 첫날 도서관에 둘러앉아 책과의 특별한 만남을 나누는 시간을 시작으로, 처음으로 들른 곳이 도심 한가운데에서 인문학을 생각하는 김수우 시인을 백년어 서원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었고 두 번째로 부산 국제 영화제 축전마당에 동참하여 영화의 바다에 빠졌다가 세 번째는 이청산 금정산 생명문화축전 집행위원장을 만나 소로우의 ‘월든’을 공유하며 생태를 느꼈으며 넷째는 다시 부산 인문학을 생각하며 청소년들에게 삶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하려 애쓰는 한 소녀의 꿈을 ‘인디고 서원’에서 만났었다. 다음으로, 기장에 위치한 지역 대안 미술을 생각하는 단체 ‘오픈 스페이스 배’에 들러 부산, 문화를 즐기는가 하면 갈맷길을 따라 걸으며 부산의 역사와 문화를 돌아보며 나를 만나는 시간을 보내며 행복하였고 이제 마지막으로 이 숲 속 도서관에 앉아 여정을 갈무리하며 사랑을 나눈다.

살랑살랑 조곤조곤, 서로 나누는 시간.

조금은 긴장되고 흥미로우며 기대가 되었다. 모두의 감흥과 생각이 다를 수 있기에 이 나눔의 시간은 소중하다. 하나같이 좋은 시간이었으며 행복한 추억이 될 것이라며 둥근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자신이 읽었던 책 중에 모두와 공유하고픈 책을 소개하는 시간에는 공감과 의욕마저 넘쳤다. 그리고 이 만남을 글로 나누며 더 좋은 의미의 만남을 약속하였다. 수료식이 진행되고 준비한 선물을 나눌 때는 너와 지붕이 들썩거릴 정도의 박수와 함성이 함께하였다. 앞마당의 닭이 훼를 치고 강아지가 놀라 짓고 토끼의 귀가 쫑긋 세워졌으며 숲 속 정자나무도 빙그레 웃고 있으리라. 마주앉은 산 그림자가 짙게 물들 즈음 아름다운 숲 속에서의 사랑 나눔은 포근히 갈무리 되었다. 그리하여 숲 속 도서관 ‘토끼와 옹달샘’에서의 에필로그 행사는 특별한 날로 기억될 것이다. 너, 나 우리 모두에게.

잠시 후엔 아기바람이 솔가지에서 새근새근 잠이 들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