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는 늘 바다가 일렁인다. 고향 거제도에 탯줄을 내려놓고 여기 부산 바다를 즐긴지 도 어언 삼십여 년. 그동안 내가 머무는 공간에 많이도 무심하였단 생각에 이르러서는 먹먹해진다. 늘 동무처럼 함께 했건만 부산바다가 안은 역사나 문화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고향 바다 근처에 오두막 한 채 마련해 돌아가겠지만, 이제라도 조금이나마 이에 다가서 보고자 길 떠남을 준비했다. 나만의 색은 파랑…….

마음에 넣어둘수록 점점 커지는 것이 고민이라고 하였던가. 마음속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고민을 털어 내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진녹색의 동백과 초록 무늬 바다와의 조화, 거기에 파랑을 물고 하늘을 나는 갈매기, 이를 배경으로 태평양과 마주 선 오륙도. 시 한 수는 읊어도 좋으리란 기대로 기다렸던 몇 날이었다. 어제는 큰아이의 수능 날이었다. 줄곧 열심히 해 왔고 믿음이 있었기에 수험생 학부모의 잔잔한 떨림을 은근히 즐기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결과 앞에 망연자실한 아이의 떨리는 눈을 마주하니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애써 아이에게 위로와 용기를 건네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소심한 아빠는 끝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 시대 최고 문필가이자 석학이신 이어령 교수님이 '생각에 날개를 달자' 라는 책으로 우리 사회에 던진 일갈이 떠오른다.
"왜 남들 다 몰려가는 곳으로 들이밀어요? 이제는 학벌 가지고 따지는 시대는 끝납니다. 아이를 창의적으로 키우세요. 창조적인 일을 하도록 해야 돼요. 창조적인 일은 경쟁이 없습니다. 수요가 얼마든지 있어요."
머리는 이해 하지만 가슴이 선뜻 수용하지 못하기에 오래도록 뒤척였다. 눈을 뜨니 늦은 아침이다. 길 떠남에 망설임이 있었지만 약속한 일이기에 늦은 출발을 하였다. 마주하며 위로함도 좋겠지만 사랑 속에는 말보다는 오히려 침묵이 더 많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이 침묵이 오히려 슬픔을 정화하리란 생각을 하였다. 아들의 슬픔까지고 털어 내고 오리란 생각으로…….

바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넓고 깊은 꿈을 키울 수 있는 곳.

부산의 풍경을 느낄 수 있고 역사를 더듬으며 옛 자취를 음미할 곳과 문화를 공유할 공간이 부산에는 얼마나 많은가. 하루 일정이라 이를 모두 소화하지 못하고 범어사를 기점으로 충렬사를 거쳐 해운대 동백섬을 들렀다 UN 묘지에 머문 후에 오륙도를 바라보며 달려 태종대에 이르는 여정이라며 안내자도 시간의 부족을 못내 아쉬워한다.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 기슭에 자리 잡은 대사찰인 범어사에 도착하니 그윽한 가을 산이 자태를 드러내며 일행을 반긴다. 흐린 날이라 운무가 낮게 내려앉은 풍광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자연의 위대함을 음미하며 느리지만, 행복하게 걷는다. 장 자크 루소는

“걸음이 멈추면 생각이 멈춘다.”

하였으며, 미국시인 윌러스는

“나는, 다름 아닌 내가 걸어온 세계다.”

고 하였다. 오늘 우리가 걷는 이유는 우리의 두 발로 디딘 세상이 더욱 아름답기 때문이리라. 처마 밑 풍경이 어지러운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은은함보다는 요란하게 울리며 반긴다. 범어사엔 여러 차례 들렀으나, 안내자인 정 선생의 깊고 넓은 역사적 식견이 담긴 설명 앞에서 새로운 앎을 공유하게 되어 또 다른 느낌으로 부산이 다가왔다. 신라시대 왜구를 막기 위해 창건된 호국 사찰이라며 조계문, 당간지주, 삼층석탑, 석등, 대웅전의 유래와 의미를 설명한다. 건축물에 새겨진 문양 하나하나에도 의미를 담은 듯하여 우리 조상의 지혜가 느껴졌다. 대웅전에서 돌아서서 앞으로 향하니 가을 산 절경이 펼쳐졌다. 가슴이 뻥 뚫리며 내가 산이 되었다. 무슨 말로 이 아름다움을 표현하랴, 불타는 이 가을 산의 고소함을. 대웅전 옆 관음전은, 어제의 수많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발원한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하여 애절함이 느껴짐은 어쩔 수 없다. 조금은 은은하게 울리는 풍경소리를 뒤로하며 범어사를 내려서는데 내려앉았던 하늘에서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우산을 받쳐 들고 걷는 일행 모습이 또한 정겹고 아름답다.

빗길을 사뿐히 달린 노란 버스는 충렬사에 도착하였지만, 일행의 동선에서 이탈하였다. 언젠가 지인이 비 오는 날 동승을 권하자 내게 건넸던 말이 멀리서 들려오는 듯하였다.

“"비가 오면 우산 받치고 걸으며 느껴 보시게. 촉촉한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그 꾸지람에 차에서 내려 비를 맞으며 연못을 한 바퀴 돌며 충렬사를 음미하였다. 잠시 후 빗길을 걸으며 선조의 마음을 담아 온 일행들이 맑은 얼굴이 되어 돌아와 즐거움을 내보였다. 함께 나서지 못했음이 부끄러웠다. 다음 행선지는 해운대의 동백섬이다. 집 근처라 자주 들리는 곳이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시간이 많이 흘러 UN 기념공원 답사는 하지 못하고 곧장 마지막 행선지인 태종대로 향했다. 한참 동안 도심을 달려 영도에 들어서니 뿌연 차창 너머로 드넓은 바다가 넘실댄다. 부산 바다의 상징이며 부산항을 오가는 배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섬 오륙도가 저 멀리 태평양의 거친 파도에 맞서고 있으리라. 오는 내내 안내자는 정성을 다해 부산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한다. 그동안 미처 느끼지 못하고 소홀하였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뿐일까.

흐린 날이라 다소 움츠려 들었지만 빗속에서 부산을 느낄 수 있어 색달랐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이었기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표면에 천착하지 말라는 경계의 뜻인 ‘무감어수無鑒於水’ 라는 경구가 떠오름은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지 말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추어 보라는 ‘감어인鑒於人’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임을 거두어 담아 둔다. 아들의 아픔을 아빠의 큰마음으로 안아 주지 못한 것이 못내 부끄럽다. 많이 걷지 못해 아쉽지만 조금은 무거웠던 삶의 무게를 털어내었고 새로이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되었으니 또한 기쁨이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지치고 힘든 아이를 꼭 안아주리라. 그리고 바다에 들러 넓고 깊은 꿈을 꾸게 하리라. 감수성이 풍부하고 아픈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하고 세상에서 쓸모 있는 지식인으로 자라나야 함을, 인문학 정신을 토대로 전하리라. 삶이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