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냉이, 달래 캐러 나온 봄 처녀 가슴에서 시작되는가. 저 푸른 솔잎에 숨어 있다 오는 것은 아닐까.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함께 오는가. 울긋불긋 향기 뿜는 여인네 옷자락에서도 봄이 옴을 느낀다고 하였다. 지난봄의 아련한 기억 속에서도 새봄은 오고 있다. 바라다보는,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모래알에도 이미 봄은 와 있다. 그래서인지 파도는 연인의 귓속말처럼 고소하다. 아마도 거친 들녘 농군의 이마에도 푸른 보리 밭이랑에도 지금쯤은 봄이 시작되었으리라. 눈과 마음으로만 느꼈던 책 속 여행, 그곳으로 떠남을 계획하는 마음속에도 이미 봄은 자리 잡고 있으리라.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의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중의 말을 전해 받았다. 가슴에 다가와 어떤 느낌으로 남는다.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이에 반비례하여 시간의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인간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은 바로 삶이다. 그리고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왜냐하면, 삶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시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또 바람처럼 시간이 흘러 먼 날을 회상하며 특별함으로 어머니를, 고향을 떠올리게 된다. 구름이 낮게 내려앉은 그리하여 정겨움이 더한 송정 바다를 가슴에 안고 만끽한다, 이 봄을. 오래전 오늘도 내 고향 거제 바다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일어서려 하였으리라. 해마다 봄소식과 함께 맞이하는 특별한 날이다. 그날을 떠올리며 쓰라린 가슴을 쓸어내리고 계실 고향 집 어머니에게 마음이 간다. 손 전화를 눌러 어머니를 불러 본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신호음만 계속 흐른다. 울컥 어머니 손길이 그립다. 아직은 차가운 바닷물에 손을 담그며 거친 손길을 느껴본다. 어디에 가셨을까? 산고가 그렇게도 심하셨다는 내 어머니. 그 아픔과 함께 못난 막내자식이 떠올라 한숨짓고 계시진 않을까…….

아침에 아내가 내어 온 미역국이 올려 져 있는 상차림을 받고서 보고 싶은 마음에 바다를 찾았다. 따뜻한 미역국이라도 어머니께 올려야 하는데 하는 미안한 마음을 갖고서 바다 앞에 앉았다. 파도 소리 접하며 군락을 이루고 있는 소나무 숲을 바라본다. 거친 그의 껍질을 보니 까칠한 어머니 손등이 생각난다. 목 줄기의 굵은 주름까지도. 햇살이 잠깐 내려앉아 쉬었다 간 자리엔 왠지 서러움이 짙다. 바람이 파도를 일으킨다. 그 바람이 머무는 소나무 숲, 나뭇가지 흔들어 그리움 쏟아내는 잔디 위에 땅을 베개 삼아 하늘을 향해 누웠다.

눕는다는 것. 그것은 세상을 가장 넓게 볼 수 있음이며 자세히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낮추어 볼 수 있는 세상이다. 이렇게 바람 불어 그리운 날, 사람도 눕고 나뭇잎도 눕고 내 생각도 눕고 세상을 보는 눈도 눕고 그리하여 낮아진 내가 되고 싶다. 뜨겁게 모든 것 다 주고 껍데기만 남은 연탄재마냥 비틀거리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더욱 나를 낮추어 본다. 인간의 생노병사를 생각한다. 사람이 태어나서 늙어 병들고 죽어 한 줌 흙이 되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인데도 왜 이다지 서러운가? 지천명을 넘기다 보니 아버지 세상 뜨시고 어머니 늙어 병드시니 자식의 눈동자는 흐려진다. 나를 낮추고 땅 위에 누워 올리는 내 작은 기도가 받아들여지기를 나직이 소망하여 본다.

한참을 바다와 벗하다 돌아서 차에 오르는데 따사로운 봄 햇살이 동승하자며 내 귓가를 간질인다. 내 어머니의 정 같아 고이 담아 집으로 향한다. 이내 마음이 따뜻해 온다. 매년 그렇듯이 어머니를 가슴에 담으며 내 봄은 시작된다. 어머니의 봄을 사랑하며, 내 봄도 마냥 사랑하리라. 소리 없이 다가오는 새 봄을 몸으로 느끼며 한 겹 두꺼운 외투도 던져버리고 몸속을 파고드는 두려움의 기운까지도 떨쳐내고 이 따뜻한 새 기운 속으로 힘차게 걸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서둘러, 논두렁에서 쑥 향기 맡으시고 계실 어머니를 건강한 모습으로 뵈러 가야하리라.
“어머니. 많이도 사랑합니다. 아직도 어리광을 피웁니다. 아직은 당신이 아니 계신 이 하늘아래 서 있을 자신이 없습니다. 따뜻한 바닥에 등대고 누워 하늘을 바라 볼 자신이 없습니다. 부디 건강하게 천수를 누리시길 이 막내는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