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오십에 아버지와 이별했다. 불과 스무날 전, 아버지를 여의고 문득문득 얼굴을 떠올리며 허허로운 삶을 살아간다. 지난 설날 아버지의 빈자리를 너무도 크게 느끼며 생전에 불효를 다시금 생각하며 그 보고 싶음에 머리 조아렸다. 이제 아버지를 잊어야 하지만 쉬이 떠나보내지 못하고 먹먹한 가슴으로 살아간다. 한 잔의 술의 힘을 빌려 아버지를 불러 본다. 현재는 바로 과거에 자신이 선택한 결과이니 아버지 향한 이 아픔은 불효에 대한 나머지이리라. 자식인 나에게 그 무엇도 바라지 않았으나 사뭇 머리 숙여짐은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모자랐음이 확실하다. 아버지를 다시 만난다.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인연이 되는 사람, 저절로 가까워지는 사람 아버지. 내가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는 것 또한 당신의 사랑을 무조건 받았고 그러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으며 나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사랑이 된 사람, 한 때는 당신을 미워하고 부끄러워하며 세상과 멀어졌다가, 화해하며 세상과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기억한다.

아버지는 모진 현대사를 살아오며 충실할 수 없는 처지에도 온 힘을 다하였다. 그 살아온 모습을 기억하며 그리워하라고 이제 이 세상을 떠난 것인가. 아버지는 늘 꿈꾸는 사람이었다. 이 세상에 살적에도 가족과 세상을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하였고 그리하여 현실의 비웃음도 조롱도 여러 번 받아넘겼다. 하지만 내일을 꿈꾸는 아버지의 영혼은 겸손하였기에 항변함도 없이 또각또각 앞으로 걸어 나가셨다. 세상은 꿈꾸는 자들의 꿈 위에 떠 있다고 생각하였고 늘 세상을 건져 올리는 어부의 꿈을 사랑하였다.

아버지는 자식이 착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계셨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매섭게 매를 든 적이 있다. 어머니의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몰래 빼내었고 그것이 알려지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매를 호되게 들었다. 벌이 더욱 가혹했던 것은 훔치지 않았다고 거짓말까지 보태었기 때문이다. 그 회초리의 가르침으로 지금껏 남의 물건에 손대는 버릇은 가지지 않게 되었다. 나에게 회초리의 매운맛을 주었던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 내가 아버지가 되어 내 아들에게 매를 들면서 아버지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심장은 안다. 아버지는 나를 무척 사랑하였는지를 직관적으로 안다. 다만 머리가 심장까지 도달하는 거리가 너무 멀어 그 사랑을 등한시하며 살아갈 뿐이다.

가난에 기죽지 않으며 사랑하였고 조금씩 세상과 어울리려 노력한 아버지. 함께한 추억들이 새록거린다. 가난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 보려고 몸서리치게 발버둥치는 모습 속에는 철부지의 부끄러움이 함께 했다. 평생 거짓 없는 농군이었으니 초라한 형색을 정당화하며, ‘일하기 편해서’ 라는 변명을 늘 하였다. 가끔 양복을 걸쳐 입은 친구 아버지를 볼라치면 부러움이 컸었다. 가난을 사랑한 만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또한 처절했다는 표현으로 감당이 되려나…….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부끄러움을 지녔던 것이 종돈 사업이었다. 종자가 좋은 수퇘지를 길러 암퇘지와 교미를 시켜 번식하게 하는 일인데, 사춘기인 내가 아버지와 신작로 길을 출렁이는 돼지의 불알을 보며 아버지가 앞서고 내가 뒤를 따르면 하굣길 친구들이 놀려대는 것이 다반사였다. 멀게는 15리 길을 가기도 했으니 앞선 아버지의 뒷모습을 많이도 원망하였었다. 그 노력의 대가로 번식에 성공했을 때 새끼돼지 한 마리가 우리 집 돼지우리에 들어왔다. 축사에 돼지는 늘어났고 점점 땅이 늘고 야산을 사들여 과수원으로 변화시켰다.

내 아버지의 아들이었음을 부끄러워 한 적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데 난 그때 삶이 공허하다고 생각하였다. 지금 와 생각하니 참으로 부끄럽다. 세상에서 버려졌다고 느꼈고 슬펐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지혜는, 세상을 향해 현명한 시선을 던짐으로써 실존의 행복한 측면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행복해지기 위해 분발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아버지가 세상을 향해 던진 실존주의적 철학은 실로 위대하다. 내 아버지는 위대하였다.
“행복해지기 위해 분발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새로운 지평을 연다. 선수를 쳐서 행복을 앞질러 나아갈 때, 바로 그때 행복이 우리에게 온다.”
라고 일갈한 듯하다. 누군가의 인생을 평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세상에 남겨놓은 것으로 평가받는 사람도 있고 신념으로, 사랑으로 평가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누구는 인생이란 건 아무 의미도 없는 거라고도 한다. 나는 인생이란 얼마나 그를 알아주고 기억해 주는 이가 있는 지로 가늠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번 설날, 차례를 지내고 아버지가 영면해 있는 곳에 가보니 언제나 마당까지 나와 반겨 주었던 아버지 모습은 이제 없고 차디찬 겨울바람 고스란히 맞으며 누워만 계신다.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어 주니 다소 위안은 되었다. 오래도록 아버지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자주 찾아와 아버지를 기억하겠습니다. 삶을 사랑하며 신념을 지니고 사셨던 모습들 떠올리며 제 삶이 다하는 날까지는 기억하겠습니다. 이 시간 온 마음 다해 아버지를 만납니다. 부디 편히 영면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