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을 책과 함께 한가로이 보내다 먼 바다부터 석양이 물들 즈음, 해운대 달맞이길 ‘문텐 로드’로 산책에 나섰다. 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걷기와 명상은 밀접한 관계를 갖는 듯하다. 모든 산책에서 그러하듯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느린 걸음으로 자연을 바라보며 내 생각을 한다. 때로는 느리게 걸음으로서 특별한 풍경을 응시한다. 허상도 기만도 없이 내 숨소리와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듣는다. 가벼운 먼지와 동류의식을 느낄 정도로 작아진 나를 그제야 만난다. 이따금 작은 오솔길을 지날 때면 늘 생기를 주는 선한 공기를 몸과 정신을 이용해 호흡하며 걷는 수고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 형언할 수 없는 희열과 순수한 쾌감이 몸을 감싼다. 초목은 새것 같은 신선함을 지닌 채 지는 해의 온기를 채집하고 있다. 그 아래를 느리게 걷는 나는 지저귀는 새들의 사랑노래에 숭고함을 느끼며 신선이 되어 본다. 겸허해진다. 나를 삼켜버린 자연 속에서 큰 우주를 느낀다.

우리는 많은 말을 하며 살아간다. 때로는 그 말들의 의미도 모른 채 말이다. 수많은 말 중에도 느림이란 말을 즐겨 쓴다. 느리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이어서이기도 하지만, 내 귀에 부드럽고 기분 좋게 들리기 때문이다. 또한, 느림이란 말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관능적이다. 느림은 온전한 관망과 감상을 허용한다. 느림은 개인의 자유를 일컫는 가치이기에 그러하다.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빠르게 구르지 못해 안타까워하다가 짝을 찾고 보니 오히려 삶의 의미를 상실하였다는 ‘이 빠진 동그라미’ 이야기가 생각남은 왜일지…. 이 느림의 미학을 즐겨야 무한한 자연의 세계를 느낄 수 있다. 이는 놓치기 쉬운 온 세상의 다양함과 아름다움을 보게 해 주기에 그러하다. 천천히 걸을 때, 지나는 모든 사물을 그저 스쳐 지나가지 않고 바라보게 되며 깊이 사유하는 법을 배운다. 고대 철학에는 이 사유하는 행위가 강조되었지만 과학이 지배하는, 개발과 소유를 강조하는 이 시대에는 점차 그 중요성이 잊혀져 가고 있다. 현대인의 시간 부족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속화에서 비롯된 사회문제이다. 이제 우리는 허겁지겁 바쁘게 걸어가는 걸음을 멈추고 한가로이 느리게 걷기를 통해 사유라는 우아한 기술을 익혀야 한다. 이것이 나를 초월하는 이 탐욕의 현실에서 새로운 평온을 찾을 수 있는 기술인 것이다. 매우 급하게 변화하는 이 시대에 느리게 걷기는 필요한 덕목이라는 생각을 깊숙이 하여 본다. 이는 이미 다음 약속을 하는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여유다.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산행해 본 지가 꽤 오래된 것 같다. 산행을 하면 그다지 높은 곳이 아니라도 신체의 부자유스러움으로 인해 원초적 싸움이 시작된다. 자신을 상대로 걷기에 의지와 자유를 가르치는 학습장이다. 목표한 지점 절반 정도에 이르면 좌절과 고통에 맞선 저항이 시작된다. 이쯤에서 끝내고 싶은 욕구에 강하게 부딪힌다. 하지만 이 유혹을 이겨내고 깊은 들숨과 날숨으로 의지를 다진다. 그제야 밀려오던 피로는 내 가난한 몸에 자유를 선물한다. 감지하기는 쉽지 않지만, 고유한 힘을 회복한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인간은 두 다리로 세상을 측정하고 세상은 그 다리의 법을 따른다. 이는 인간의 몸과 세상의 몸이 일종의 공조를 이루기 때문이리라. 이 둘은 서로 균형 관계를 맺고 있으며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세상 사이의 불협화음을 조정하는 것이다. 이러함으로 인간에게 가능해진 것은, 자신의 규모에 맞게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지혜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땅 위를 걷는 것, 우주 안에서는 한낱 이방인이라는 의미에서는 인간 발걸음의 의미는 보잘것없다. 그러나 인간 실존의 의미는 과학만으로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기에 나의 발걸음에 맞춰진 세계를 되찾아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온 세계가 내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성스러운 장소를 향해 걷는 순례자가 떠오른다. 그는 무턱대고 걷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고귀한 의미를 눈뜨게 해주기를 간절히 원하며 길을 간다. 자신의 발걸음에 의미를 얻으려 한다. 그러므로 순례는 신성으로의 통로이며 나아가 자신의 어떤 차원으로 향하는 통로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천천히 사유하며 걷다 보면 나란 존재가 서로 다른 욕구를 지닌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졌음을 경험한다. 둘은 욕구도 기대도 같지 않다. 이를 혼동하게 되면 불만족을 느끼고 좌절과 고통을 겪게 된다. 몸과 영혼의 욕구는 서로 환원될 수 없으면서도 조응한다. 신도 아메바도 아닌 인간은 이성으로 이 둘을 조절해야 한다. 우리 몸은 현실에 자신을 뚜렷이 각인하며 그 경험을 통해 정신에 자신감을 갖게 한다. 둘 사이를 갈라놓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라 몸이 감지한 바를 올바른 사유 통해 영혼을 순수로 이끌어야 하는데 이는 걷기라는 단순한 행위로 해결 가능하다. 인간은 발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루소는 “우리의 첫 철학 스승은 우리 발이다.”라고 ‘에밀’에서 말하고 있지 않은가. 몸과 정신 모두를 희망의 길 위에 다시 올라서게 해주는, 걷기라는 위대한 수단을 활용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현대 문명은 과학의 힘을 빌려 편리함을 받았다. 이동수단의 변화가 그 예이다. 별다른 육체노동 없이 빠르게 이동한다. 이러함이 인간이 조건 없는 편안함을 탐닉하게 되었다. 점점 기계에 의존하다 보니 인간 본연의 능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큰 문제이다. 그래서 가까운 거리를 갈 때도 걷기를 거부하고 승용차의 시동을 거는 것에 망설임이 없게 되었다. 이는 달리 생각하면 기계들에 파묻힌, 효율성만 추구하는 의식이 자리 잡은 것이다. 플라톤을 시작으로 몽테뉴와 니체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철학자들이 걷기를 통해 사유하였고, 이를 통해 얻어가진 지혜를 범인들과 나눔으로써 의식의 전환을 꾀하였다. 이제 우리도 그들이 전하는 걷기에 담긴 지혜를 얻어 삶의 본질을 성찰해야 할 것이다. 편협하고 이기적인 의식을 새로이 정화하기 위해서라도 자연이 숨 쉬는 오롯한 길 위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느리게 걸어가야 하리라. 느림이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삶의 선택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자각하면서 말이다.

명상으로 깨우침 얻기 위해 먼 길 나선 오래된 벗인 동그란 영경스님 얼굴이 떠오른다. 그 둥근 얼굴 뒤로 스님의 눈썹을 닮은 듯한 초승달이 소리 없이 잔잔히 흐른다. 철길 너머로 펼쳐진 청사포가 달빛을 받아 경이롭게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