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15일, 가을이 짙게 물들었습니다.
길을 나섭니다. 거칠고 광활한 태평양을 온몸으로 맞서는 강인한 오륙도, 그를 그윽하게 내려다보는 영도 봉래산. 그 산자락에 있는 고신대학교 캠퍼스. 이 모두를 가슴에 품었습니다. 젊음이 술렁입니다. 미래를 향한 부푼 꿈이 숨 쉬고 있습니다. 꿈꾸는 독서 아카데미 두 번째 설렘입니다. 오늘의 독서 멘토는 이 대학의 K 교수님입니다. 약속된 시간에 맞추어 모여든 우리는 4층 교수실로 향했습니다. 화들짝 반김도 잠시, 창가로 내다보이는 아름다운 풍광에 탄성이 먼저입니다. 한참을 즐긴 후에야 교수님의 미소로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자주 뵈었지만, 학교에서 만나니 학자의 기품이 느껴져 사뭇 존경이 더합니다.

하루 전에 다산초당을 다녀온 느낌으로 말문을 엽니다. 감응이 크신 듯합니다. 몇 해 전 그곳에 갔을 때가 회상되어 동료애가 느껴졌습니다. 같은 곳에서 시간을 함께 함은 의미가 새롭습니다. 시간을 나눈다는 것이 반드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사람들에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기에 그러합니다. 다산 초당에서 다산 선생의 향기를 얻고 기억하고 있기에 함께 시간을 나눈 것이겠지요. 힘주어 전합니다.
“다산 선생이 18년 동안 머물며 학문을 완성하고 500여 권의 방대한 집필을 하셨기에 18세기의 선생을 위대한 선인으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연결 매개가 책입니다. 선생의 저작이 없었다면 어찌 그를 기억할 것인가요. 책은 가 보지 못한 세상을 경험하게 합니다. 책 통해 선생을 만날 수 있었기에 기꺼이 ‘다산을 알지 못하면 근대 학문이나 사상을 논할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라며 책 예찬론을 펼칩니다. 책의 역사성과 위대함으로 우리와 연결되는 것이라며 글 쓰는 일에 매진할 것을 우리 앞에서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색 바랜 책 한 권을 내보입니다. ‘보라빛 추억으로 가는 열차표’라는 책이었습니다. 맑은 따스함이 느껴졌습니다. 젊은 날 단상을 모은 칼럼 집이라며 미소 지으십니다. 노교수의 얼굴에 지난날 아름다움이 스쳐 지나감을 봅니다. 덩달아 행복해졌습니다.

이어 사전에 없는 고어를 보이며 논리적으로 만들 수 있고 읽을 수 있다고 역설하십니다. 제 삼의 관점으로 풀어낼 수 있다며 삶에 접목하라 권합니다.
“일반적으로 도덕철학자들은 감성과 지성으로 이원화하며 ‘삶’을 중시하는 도덕현실주의와 ‘앎을 중시하는 도덕관념주의로 구분됩니다. 지금은 사용 않는 자음 중에 삼각형 모양이 훈민정음에는 존재하였지요. 이 글자는 음운변천을 거쳐 시옷이 되거나 이응 그리고 지읒으로도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글자는 삶, 앎, 잚이 됩니다. 잠의 사전적 의미 중 하나는 누에가 성숙을 앞두고 치르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다음 날을 위해서 휴식을 취함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듯하지만 이를 통해 앎도 삶도 새 힘을 얻게 되는 주요한 미적 관점이지요. 진, 선, 미의 세 관점은 각각 다른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본답니다. 옳고 그름을 논리학적으로 접근하는 진의 관점, 나쁘고 착함을 윤리학 관점으로 접근하는 선의 관점 그리고 미, 추 관점으로 판단하는 미의 관점이 있으며 미, 추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예술입니다. 미의 관점 즉, 제 삼의 관점은 진의 관점에서 잠시 ’판단을 보류함‘ 또는 선의 관점에서 ‘용서함’등의 노력을 통해 성숙함을 말합니다.”
라며 몸과 마음이 성숙해야 여유와 배려 그리고 겸손하고 용서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지혜를 전합니다.

위대한 다산 선생이 큰아들 학연에게 보낸 편지에 실었다는 두 개의 저울 이야기가 멀리서 들려 왔습니다.
“천하에는 두 가지의 큰 저울이 있다. 하나는 시비(是非) 즉 옳고 그름의 저울이고, 하나는 이해(利害) 곧 이로움과 해로움의 저울이다. 이 두 가지 큰 저울에서 네 가지 큰 등급이 생겨난다. 옳은 것을 지켜 이로움을 얻는 것이 가장 으뜸이다. 그다음은 옳은 것을 지키다가 해로움을 입는 것이다. 그다음은 그릇됨을 따라가서 이로움을 얻는 것이다. 가장 낮은 것은 그릇됨을 따르다가 해로움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와 제 삼의 관점을 관계하여 봅니다.
‘옳고 그름’과 ‘이로움과 해로움’ 중 어디에 더 비중을 두느냐의 문제이지요. 우리가 겪는 대부분 문제는 여기서 비롯됩니다. 옳은 것을 따르다 손해를 볼 것인지 아니면 조금 그릇된 것을 따르더라도 이익을 볼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수시로 생깁니다. 다산 선생은 아들에게 옳은 것을 먼저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익과 손해를 따지기 전에 옳고 그름을 먼저 판단하는 것이 선이라는 것이지요.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하고 남에 대해서는 관대해야겠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보다 상대에게 이익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먼저 고려한다면 서로가 세상을 재는 저울 눈금의 편차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는 제 삼의 관점에서 강조한 배려하는 삶으로 성숙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과 통합니다. 이를 좋은 에너지로 만들어 지혜롭게 살아갈 일입니다. 오늘 선인의 지혜를 멘토를 통해 거두어 담았습니다. 축복입니다.

교수님은 우리를 전망대로 안내합니다. 안개가 조그맣게 내려앉은 가을 바다가 운치를 더합니다. 오롯이 그와 흐름을 같이합니다. 가까이 보이는 오륙도가 닷섬인지 엿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또 다음 만남을 기약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선한 눈빛이 닮은 모녀와 동승을 하였습니다. 풍광이 남다른 영도 절영로를 휘돌며 즐거움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이 집으로 향한 후에도 한참을 함께하며 어머니 기다리는 내 고향 거제도로 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