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성이 높아졌다.
"이놈들 도대체 뭐하자는 거야. 그동안 이리 살아온 거야."
방학이라고 집에서 생활한지도 2주가 지나고 있었다. 두 아들 녀석의 나태함과 계획성 없어 보이는 생활에 드디어 자제력을 상실한 아버지의 일갈이다.
"이렇게 생활하려면 다 돌아가~"
버럭 두 녀석에게 내뱉고는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집안 공기가 일시에 멈춰 버렸다.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거실에 아이 둘을 불러 앉혔다. 겸연쩍은 얼굴을 하고 눈을 피한다.
"며칠 아버지랑 여행 다녀오자. 둘이 의논해 행선지랑 일정 계획 세워 봐."
형제간 소통도 없이 데면데면하며 반목하는 것도 거슬리던 요즘이었기에 둘이 의기투합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요즘 재택근무를 하게 돼 시간이 자유로운 편이다. 일상탈출 본능이 깨어나 훌쩍 겨울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내 마음은 숨겼다. 머리 맞대어 의논하더니 남도여행을 제의해 온다. 남해와 통영을 제대로 여행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자고 응하면서, 돌아오는 길에 거제도 할머니께 들러 안부 묻고 오자 하니 고개 끄덕인다. 할머니 만난 지 오래되어 그런지 싫은 내색은 아니다. 고마운 마음이 된다.

출근해야 하는 아내는 아쉬움과 함께 사흘간의 자유를 선물했다. 맏이는 남해, 둘째는 통영에서의 일정을 하루씩 맡기고 코스와 소요될 경비를 사전에 계획하도록 하였다. 은행에 들러 요청한 만큼을 직접 찾도록 함으로써 출발준비를 마쳤다. 아들 둘과 떠나는 남도여행은 이렇게 갑자기 성사되었다.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맡기고 홀가분하게 훌쩍 떠나게 되니 남다른 느낌이 든다.

고속도로는 한산하기까지 하였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악이 감미롭게 차 안을 채운다. 제법 속도감을 느낄 수 있게 달렸다. 남해는 빠르게 우리에게 다가와 은빛으로 반겨준다. 바다 향해 세 부자가 섰다. 맏이가, 자신은 열심히 생활했으며 만족한 결과를 얻은 학기였다며 집에서 편히 쉬고 싶어 느슨하게 행동하다 보니 풀어진 모습이 아빠에게 거슬린 것 같아 죄송하다며 머리를 조아린다. 학우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밤잠을 잊고 지냈다며 방학 때는 마음껏 쉬고 싶었다고 나직이 토로한다. 이러한 관점을 놓친 것이 미안했다. 아들의 큼지막한 손을 잡으며 토닥여 주었다. 아무 말이 필요 없었다. 함께 바라보는 윤슬이 참으로 황홀하였다.

바다와 함께하는 시간은 늘 그렇듯 포근하다. 아이들은 어떨까….
푸른 기운과 함께하며 행복해 하는듯하니 아빠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들도 바다를 싫어하지 않는 듯 느껴져 기분이 좋아졌다. 한참을 좋은 기분으로 바다 향 느끼고 인근에 조성되어 있는 독일마을에 들렀다. 요즘 흥행하는 영화 '국제시장'의 재독 파견 장면 일부를 이곳에서 촬영했다 한다.
인터넷에 삼천포대교의 야경이 좋다고 추천한다며 그곳 구경하고 사천 맛집에서 저녁을 먹을 예정이며 이름난 해수온천장에 들러 피로를 풀 것이라 한다.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한듯하다. 융숭한 대접을 받는 기분이다. 바닷가 횟집에서 갯벌 냄새와 함께, 장성한 아들을 앞과 옆에 앉히고 술잔 기울이고 있으니 왠지 나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된다. 둘째가 제법 흥을 돋운다. 아이들과 몇 순배 돌리고 나니 얼큰하다. 낯선 곳에서 별을 같이 바라보며 섰다. 서로의 별이 더 밝게 빛나고 있다고 격려해 주니 아주 좋다. 하늘에 별이 있음을 한동안 잊고 살았던 것 같다.

둘째 날은 둘째의 안내로 통영으로 향했다. 동피랑과 문화광장 그리고 거북선 관람을 하고 충무김밥과 꿀 빵으로 요기를 한 후 산양 일주도로를 휘돌아 달아 공원에 이르러 한려수도를 가슴에 담았다. 왠지 서두는 느낌이라 천천히 여유롭게 여행하자고 했더니, 일정이 바뀌어 오늘은 할머니 댁에서 자기로 형과 의논했다며 “좋으시죠?” 라며 웃는다. 잠시 들러 안부만 묻고 가기엔 마음이 그랬는가보다. 아이들이 고마웠다.

선물을 고맙게 받았기에 아버지도 선물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고향 거제로 향하였다. 거제 일주를 시켜줄 요량으로 구 거제대교를 막 건너는데 둘째가 자유로운 영혼 운운하며 거친 바람을 맞고 싶다며 '바람의 언덕'을 가고 싶다고 툭 던진다. 산도 높고 골도 깊은 거제도 산야를 가로질러 도장포에 이르러 원하던 바람의 언덕'에 당도했다. 바람을 맞고 와 한결 개운하다는 아이들과 인근의 해금강에 들르니 해가 뉘엿하게 넘어가고 있었다. 어디에서 아름다운 노을을 보여줄까 망설이다가 홍포를 떠올렸다. 대병대도와 소병대도를 품은 장엄한 석양을 선물하리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마음을 정하니 급해졌다. 잠시 들른 여차 해변의 풍경에 아이들은 좋아한다. 홍포를 향했다. 그런데 도로 정비 중이라 6월까지 통행금지라는 푯말이 길을 가로막았다. 이를 어쩌나, 곧 노을이 파스텔 톤으로 아름답게 수놓을 텐데…….
오래전 벗과 함께 비경을 경험했던 저구 뒷산 중턱에 있던 전망대가 떠올랐다. 임도를 따라 한참을 내달렸다. 전망대에 도달하니 이미 모든 그림은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앉는다. 애써 감추려 하지만 실망하는 눈빛이다. 다음에 꼭 비경의 석양을 보여주리라 다짐해 두었다.

집에 가는 길목에서 올려다본 2층 방에 불이 환하다. 고향 지킴이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다.  늦게야 어머니 품에 안겼다. 아이들은 할머니와 오순도순 이야기꽃 피우며 행복한 시간 보낸다. 어머니의 외로움을 느낀다. 아버지 저 세상 가시고 혼자되심이 서럽다. 큰아이도 할머니께서 많이 외로워 보이신다고 말한다. 다음날 어머니 사랑 가득 담고 돌아오는 길 위에 섰다. 따스한 겨울비가 추적거린다. 떠날 때 몸 그대로 무사히 집에 안착했다.

여행길에서 아이들 보며 생각이 깊어졌다. 생각이 정리되면 이 글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어야겠다.
모두에게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 있다. 하지만 그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 알 수 없다며 안절부절못하곤 한다. 하지만 길은 가만히 있는 이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길을 가지 않으면 길을 만날 수 없다. 그러니까 무조건 가야 한다. 지금은 길이 아닌 것 같고, 그래서 두려움이 일어나고 불안한 마음이 엄습해도 괜찮다.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곳은 길이 되고 있으니까. 애초에 길은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고 노신은 말하였다. 우리는 모두 자기 삶의 개척자이다. 불안한 청춘들은 길이 안 보인다고 불안해한다. 자신이 가려는 곳이 길이 아닌 것 같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데도 말이다.
“아들아!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나아가라. 가다 보면 행복한 삶이라는 길 위에 주인공으로 서 있을 테니까. 가슴속 깊이 불을 지피는 '그 무엇'을 찾아 떠나라. 좋아하고 열망했지만 포기했던 것, 상황과 주변의 평가에 의해 좌절되었던 그것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길이 너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여행은 그곳에서 만나는 새로움을 즐기고 돌아와 앉았을 때 충만함을 느끼면 좋다는 생각이다. 여행은 변화를 꾀하기에 그만인듯하다. 아버지도 아이들도 무언가 의욕이 생겨남을 느낄 수 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밝히는 계획들이 새롭다. 우리에게 약해져 가는 생명력을 복원시켜 준 시간이었다고 느껴진다. 배려가 부족했던 내 모습도 뒤돌아볼 수 있어 좋았다. 맏이는 동생의 수동적인 삶의 태도를 지적하고 둘째는 형에게 부족한 경제관념의 개선을 말한다. 형제간, 부자지간이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여행에는 정답은 없을 것이다. 집에서 떠난 몸 그대로 돌아오되 가슴에 새로움이 일렁인다면 더할 나위 없지 않겠는가. 규정된 틀 속에 갇힌 삶은 잠시 잊어버리고 가슴속이 환해지도록 길을 걷다 새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간다. 생은 그렇게 가고 오는 것이기에. 짧았지만 많은 의미를 가진 여행이었다. 내 삶의 의미들과 함께하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