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연가

누군가를 만나서 가슴을 열고 착한 목소리로 정을 나눌 수 있음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그 누군가가 오랜 벗이라면 더할 나위 있겠는가. 그리움이 있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내 고향이 그리웠다. 그리고 따스한 어머니 품도, 오랫동안 대하지 못했던 친구들도 그리웠다. 아름다운 입술로 사랑스러운 눈으로 어제를 떠올리며 힘찬 내일을 이야기하리라는 기대감으로 거가대교를 건너 거제 가는 길 위에 섰다. 가을은 흩어진 추억을 모으기에 좋은 계절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인생을 갖는 것이라고도 하였으며 사랑이나 지성보다도 더 귀하고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우정이라고도 하였다. 친구에게서 보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 '보고 싶다.' 그 한 마디에 요 며칠 마음속에선 푸른 파도가 출렁였다. 사는 게 참 좋은 거구나 싶었다. 밥 한 그릇 같은 든든함이 느껴졌다. 동무의 그 짧은 한 마디가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하고, 어떤 고백보다 더 마음을 두드리며 울려대기도 한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어찌나 기쁘고 고마운지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뻔 했다. 하여, 기쁨으로 몇 날을 기다렸다. 보고 싶음에 요 몇 날이 힘들었음을 고백한다. 마당에 붉은 고추 늘어놓은 어머니 마음으로 깨 웃음 머금은 채 맨살로 벗들을 그리던 시간이었다. 추억의 시간을 펼쳐 보리라는 기대감으로 잔잔하게 가슴도 뛰었다.

우리들의 헤어짐은 자연의 섭리 같았다. 그 이별의 겨울은 기억에도 희미하다. 하나였던 우리는 기약 없이 뿔뿔이 흩어져 험난한 길들을 걸어왔다. 시대가 주는 고통으로 때론 넘어지고 때로는 깨어지며 서러운 눈물도 흘렸다. 그러나 그는 우릴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열심히 살았다. 앞만 보며 달려온 시간이었다. 그러다 참기 힘든 외로움이 밀려 올때면 고독 속에서 동무들을 떠올리기도 했음을 나직이 속삭인다. 삶의 절반을 등 뒤에 두고도 무겁다 하며 숨차게 걸어온 길, 그 세월이 모여 어느덧 30여 년이 넘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다. 무척이나 그리웠다. 그리하여 이 시린 가을날의 아름다운 만남은 기쁨이었다. 벗들의 웃음소리 폴짝대며 온 바다를 흔들어 깨운다. 단풍 향기 머금은 바람 되어 마음 깊숙이 스며든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서투른 이별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모든 나이테가 채워질 그날까지 잊고 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굴레를 틀어 얽히고설켜서 부대끼며 살아갈 것이다.

옛 벗을 만남에 두려움이 있다. 뜀박질 함께하며 놀던 건강한 예전 모습을 지니지 못하고 살아감에 미안해서다. 동무들이 모여든 이곳은 예 추억이 넘실거려 참 좋다. 귀한 우정 나눔에 지금의 내 몸은 잊고 만다. 촘촘해 지려는 나이테를 느슨히 풀어놓고 서로 나누었다. 애틋한 사연들을 봇물처럼 쏟아냄에 심장은 익어간다. 벗들은 꼬박 밤을 지새우고 새벽을 연다. 고향언덕에 마련된 나눔 자리에 동이 튼다. 모두 함께한다. 유토피아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미래 모습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광이다. 일정 소화 위해 관광버스에 몸 싣고 거제소풍에 나섰다. 청순한 내 바다를 끼고 돌며 해금강에 도착했다. 박물관에서 예전 삶 회상하며 즐거움 나누고 잠시 태평양 바라보며 머물렀다가 청정해역에서 갓 건져 올린 굴을 만나 바다 이야기를 들었다. 50대에 곁에 있는 벗이 끝까지 갈 수 있는 친구라고 덕담 나누며 다음을 기약하였다.

누군가의 초대를 받고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는 느낌이 들 때의 행복감은 참으로 사람을 흐뭇하게 만든다. 돌아와 앉은 이 시간 고마움으로 전율한다. 그 날을 떠올림으로 인해 이내 상쾌한 마음이 된다. 꽤 긴 날이 이러하리라. 이 만남은 축복이었으며 진정 환희의 날, 우리들의 날이었다. 멋진 자리를 마련하느라 애쓴 동기회 회장 위시하여 임원진에게 고마움 전하는 메모를 전송하고 동그랗게 미소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