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더디게 와 산책로는 며칠 전에야 단풍이 아롱졌다. 마냥 즐기려는데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져 금세 낙엽 되어 훌쩍 떠나가려 한다. 여름과 겨울은 두꺼워 가고 가을은 창호지 마냥 얇다. 자유와 행복을 꿈꾼다.

지금 내가 사는 해운대의 화두는 인문학이다. 어디 이곳뿐인가. 인문학을 부각하려 하니 그 정의가 혼란스럽다. 백과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인문학은 정치, 경제, 역사, 학예 등 인간과 인류문명에 관한 정신과학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인문학은 주어진 현실과 인간의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꿈꾸려는 학문이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인간이 무엇이며 또한 인간다운 삶이 어떤 것인가를 모색하는 규범적, 윤리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각 단체나 언론을 중심으로 인문학 강의가 자주 열리고 이를 넘어 인문학 거리도 조성되고 있다. 아침 산책로 초입에 인문학 거리라는 푯말이 세워지고 곳곳에 시를 적은 표지판이 생경하다. 산책객이 걸음을 멈추고 시를 읽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오르게 하는 시다. 아름다운 시가 걸린 여기는 얼마 전까지 어르신이 작은 좌판을 깔고 각종 나물과 텃밭에서 가꾼 채소를 한 줌씩 올려놓고 산책로를 오가는 이들과 정을 나누던 곳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인문학 거리라며 푯말을 세우고 어머니를 기리는 시를 내붙인 그 맞은편에 노점상을 집중하여 단속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법치국가에서 분명 좌판을 펴고 장사하는 것은 불법이다. 하지만 인문학 거리라 하지 않았는가. 멋들어지게 시비를 건립하고 표지판을 세워 어머니를 그리게 하는 것이 인문학인가. 분명 인문학은 주어진 현실과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꿈꾸려는 것이 바탕이다. 모름지기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이다. 산책로에 펼쳐있는 어머니의 좌판이 주는 눈물겨운 인간미가 곧 인문학의 출발점이다. 내 어머니가 시 속이 아니라 길 위에서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를 내몰고 인문학을 논하는 것은 지극히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산책로 곳곳에 좌판노점상을 활성화하여 배치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른다. 물론 현행법상 많은 문제가 뒤따를 것이다. 입주 상인의 반발도 예상된다. 어떤 정책도 순기능과 역기능이 상충한다. 역기능은 비판도 받고 여러 방법으로 순화시키는 노력을 한다면 가능하리라 여겨진다. 이가 성사되기만 한다면, 백 번의 인문학 강좌보다 몇 개의 세워진 시비보다 더 인문학을 활성화 시키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 손잡고 함께 시를 읽으며 음미하고 곁에 있는 좌판대의 할머니들과 사랑을 나누는 풍경이 훨씬 인문학적임은 자명하다. 칼 갈고 우산 수리한다며 길에 손수레를 세워놓고 낙엽 굽는 냄새를 풍기며 무언가 열중이시던 할아버지가 스친다. 아버지가 그립다.

내 어린 날 시장 모퉁이에서 좌판을 펼쳐 놓고 자식들 뒷바라지 위해 삶을 수놓으시던 어머니. 산책로에서 매일 만나는 무표정한 어르신의 얼굴에서 내 어머니 삶을 만난다. 엄마 손잡고 걷는 아이들 눈에는 여기 할머니가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자못 궁금해진다. 엄마가 할머니와 흥정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배우는 것이 인문학의 시작은 아닐까. 삶에서 모든 것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우리 사회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 위에 살아간다. 모두가 어우러져 물처럼 흐르는 산책로가 진정한 살아있는 인문학 거리이리라. 인문학 정신이 바탕이 된 구정이 실현되어, 한쪽으로 밀려나 단속원의 눈치를 보며 좌판을 접었다 펼치는 이가 아닌 사람 사는 냄새를 풍기는 내 어머니를 매일 만나고 싶다. 내일은 잘 익은 고구마 삼천 원어치를 또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