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수필 한 편!


0번 출구  
*간운보월(看雲步月)-                                                  이승훈

소사역 40계단을 막 오르려는데 전철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계단을 오르던 사람들이 마치 출발 총소리라도 들은 양 일제히 뛰어오르기 시작한다. 아슬아슬 팔락이는 치맛자락을 나 몰라라 하는 여인네들도 있다. 무에 저리 급하기도 할까 하다가 얼치기 생각을 거두어들인다. 포박당하듯 몸을 끼워야 하는 출근길 전철, 그 치열한 삶을 미연하게 살아온 위인이 알기나 하겠는가.

자판기 커피를 뽑아 의자에 앉았다. 비상구가 없는 거 같아 멀미나는 세상, 그에 휘둘리기 싫어 언제부턴가 전철 한 대 정도는 일부러 그냥 보낸다. 운 좋은 날은 역사에서 클래식이 흐르기도 하는데, 커피를 홀짝이며 가만 듣노라면 지붕이 새면서 점점이 받쳐둔 양푼으로 떨어지던 그 빗방울 소리가 떠오르기도 한다. 먼발치 춘덕산 짜투리에는 어느덧 가을이 피어오르고 있다. 무정한 시선이 왼편으로 미끄러져 춘덕산 아래 성가병원 건물로 떨어진다. 언제 보아도 저놈의 건물은 험하게 솟아있는 암석처럼 보인다. 하필 전철 타는 방향과 마주하고 있어 때마다 마음을 들썽케 한다. 형이 요절한 병원이다. 훗날 당신의 나라에 들더라도 그와 가까이 있고 싶었다. 그래서 종부성사를 집행하시던 신부님에게 내 영세명을 주도록 부탁해, 형도 프란치스코 성인 이름을 받았다. 형제의 영세명이 같아서 조금 그렇다는 수녀님이 계셨으나 곧 헤아려주었다. 잠시 비상(悲傷)해진 마음을 깨트리며 전철이 들어온다. 15년 동안 그도 이 전철을 타고 조석으로 내가 오가는 길로 다녔다.

용산역 직통이 생긴 이후 다소 덜한 감은 있으나 출근길의 아귀다툼은 여전하다. 온수역과 구로역, 신도림역 같은 환승역을 지나는 동안 되들고 되나는 사람들로 인해 전철 안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위태롭다. 차라리 눈을 감는다. 움직이면 점점 조여지는 수갑이거나 청상(靑孀)의 이불 밑을 넘본 난봉꾼이 당하는 덕석말이거나 진흙반죽에 빠져 있다가 그대로 구드러진 신세다.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싼 여자와 찰싹 달라붙어 있는 나는 가방을 정조대처럼 앞에 차고 있다. 내 엉덩이 바로 위에는 어느 키 큰 사람의 엉덩이가 들어차 있고, 턱밑에는 여자의 얼굴이 괴어 있어 숨조차 제대로 못 쉰다. 어깨며 허벅지와 장딴지도 내 것이 아닌 듯하다. 비틀어진 다리를 움직여보려다 터무니없이 처용가 가사 한 대목을 떠올린다. 「드러내 자리랄 보니 가라리 네히로 섀라. 아으 둘흔 내해어니와 둘흔 뉘해어니오(돌아와 내 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로구나. 아, 둘은 내 것이거니와 둘은 누구의 것이뇨)」. 신길역을 지나고서야 숨통이 트인다. 옴짝달싹 못하고 끌려가는 것이 아닌 이제야 전철을 타고 가며 읽을거리를 꺼내든다.

대방을 거쳐 노량진이 가까워 오면 왼편 차창을 내어놓고 오른편으로 이동한다. 노량진 역을 막 지나면 한강철교다. 매일 아침마다 강을 바라보는 것이 도회지 생활의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전생에 물과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강물이나 바다는 내게 그리움 같은 것이다. 차창을 통해 강이나 바다가 지나치면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머물 수 없는 아쉬움을 짓누르곤 한다. 잠시라도 강변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망연히 바라보았으면, 특히나 아침 설익은 햇살이 자글자글 까불고 있는 저 강물을…. 마냥 강을 따라가다 보면 내 고향에 닿을 것 같다. 노량진역이 다가오면서 오른편으로 이동한 까닭이다. 한강이 아랫녘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을 바라보며 습관적인 사념에 빠진다. 초여름이나 초가을쯤 고막배를 타고 고향에 이르면 열흘이나 걸릴까. 언제든 강변에 닿을 수 있을 테니 별반 준비물은 없을 것이다. 밤길을 밝혀줄 남포등 하나, 고막배야 흐르거나 말거나 밤하늘 별들을 바라보며 몸을 넣을 수 있는 침낭 하나면 족하지 싶다. 흙이 밟히는 곳, 하늘과 산과 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 아침에 일어나면 젖은 풀내음 향기롭고 밤이면 달과 별들의 유영하는 소리가 들리는 곳, 요절한 형도 모자라 누이까지 묻혀있는 곳….

아직 죽을 나이도 아닌 것을 수구초심에 시달리는 날이 많다. 상처투성인 도회지의 삶 탓이다. 나가고 싶은 출구는 그곳이 아닌데, 전철은 내게 헛생각 말라며 4호선 환승역인 서울역에 내려놓는다. 지하서울역에 내려 계단을 오르면 지상서울역으로 통하는 개찰구가 어김없이 유혹을 한다. 서서히 지상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가 한강철교에서 가졌던 사념들을 다시 들들 볶아댄다. 그러나 어쩌랴. 털래털래 통로를 따라 4호선 지하로 내려간다. 재채기가 터질 것 같은 바람을 몰고 온 4호선 전철이, 나를 낚아채듯 잡아 태우고 충무로를 향한다. 회현을 지나 명동에 이르러 전철문이 스르르 열리는데 목구멍이 칼칼하다. 마음속으로 '형, 잘 다녀와' 한다. 부천으로 이사 오기 전부터 20년을 훨씬 넘게 형은 명동의 한 직장에 다녔다. 그러면서도 주니 한번 낼 수 없었던 것은 장남이 짊어진 가혹한 삶의 무게 때문이었으리라. 전철 문이 열릴 때마다 한 송이 국화꽃을 떨어트리고 싶은 마음을 형은 알고나 있을까.

충무로역이 다가오면서 나의 0번 출구는 멀어져 간다. 모든 걸 털어 내고, 충무로 5번 출구 44계단을 오르자 귀청이 떨어질 듯 웅웅거리는 도시, 그의 아가리가 나를 냉큼 집어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