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문이 닫히지 않았다                                          이승훈

야트막한 산이 늘어트린 *안동네의 작은 자락을 따라 들어섰다. 산자락을 촉촉이 적신 새벽이슬과 잠이 덜 깬 나비 한 마리 하늘하늘 띄운 개망초 꽃섶 그 풋풋한 향기가 내려앉아 있다. 안동네 어느 길갓집의 큰 철망을 두른 우리에서 엘크 두 마리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버드나무 이파리들이 까치둥지를 은밀하게 감출 무렵부터였다.

꽃사슴과는 달리 어간재비 덩치를 지닌 엘크는 성품이 조용해 장난치는 일도, 뛰어다니는 일도, 웃고 우는 일도 없이 비둘기의 웅얼대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우리 안을 걸어다녔다. 마주한 우리에서 사나운 셰퍼드가 시끄럽게 시비를 걸어도 엘크는 흑진주 같은 눈망울 그대로 여물을 먹는다.

우리 뒤란의 비릿한 밤꽃이 저물어가고 그들의 뿔이 무성하게 자란 어느 날, 둘

어느 뿔보다 으뜸인 엘크의 미각(美角) 앞에서 밤나무 숲은 푸른 생기를 잃었다. 그러나 때로 아름다움은 허무하게 꺾이는 절망이다. 더 이상 한 조각의 녹각도 나올 수 없이, 각인된 뿔의 흔적만 절각(切角)한 이의 죄명처럼 선명하다. 그 흔적은 차라리 살점에 박힌 검붉은 반점이다. 도대체 무엇으로 잘라서 저토록 예리하게 도려냈을까.

얼마 후 덩치 큰 나머지 엘크도 잘려나간 뿔의 자리에 헝겊을 칭칭 동여맨 채 나타나 비틀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가벼워진 머리 탓인지 움직이는 고개가 어색하기 그지없다. 풀린 헝겊을 질질 끌며 엉성하게 우리 안을 배회하는 폼이 넋이 나가 보인다.

어느 마을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소에게 소주 한 되씩을 먹였단다. 아니, 입을 강제로 벌려 한 되씩 들이부었단다. 사람이 소주 한됫병을 나발 불듯 마시면 죽음의 사단이 될 게 뻔하다. 그런데 한철 매일 두 되의 소주를 마시는 상상을 하면 아무리 부줏술꾼이라 해도 몸서리칠 일이다. 주막집 주전자도 한철이면 삭지 않던가. 여름부터 겨울 무렵까지 소주를 그렇게 먹이면 소의 육질이 부드럽다는 것이다.

유독 밤나무 숲이 소란스럽던 날, 엘크우리 문은 열려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닫히지 않았다. 빈 우리에는 이제 검은 눈망울의 환영만 떠다닌다. 엘크의 눈은 슬퍼지면 더 까맣게 변하는 모양이다. 마지막 보던 날의 눈망울이 금세 튀어나올 듯 까맸던 이유를 알 것 같다. 다가올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이번에는 신음조차 거두었을지 모른다. 몇 해나 잘리고 잘리며 신열로 짓시달리다가 붉은 피 한 방울 남김없이 떠나갔을까 …. 하늘을 떠받치던 엘크의 뿔이 시퍼런 운명의 비손으로 떠오른다. 순하디순한 그들에게 우리는 왜 그래야 하는 것이냐.
                                                                                              <제공: 테마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