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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 (dlfemddlek) 일반부 최우수상


특별한 작가의 인간적 증언, "세상에 예쁜 것"
박완서의 <세상에 예쁜 것>을 읽고


내 책상에는 화분 포함해 손바닥만 한 크기 정도의 다육식물이 놓여 있다. 정확한 학명은 모르지만 이 녀석과 한 방에서 동거를 시작한지도 2달이 넘었다. 이 녀석의 이름은 따로 없다. 위에 적은대로 그냥 ‘녀석’이라 불린다. 꽃을 피우는 종인지도 모르겠고, 생김새도 선인장 종류가 대개 그렇듯 녀석도 예쁘지 않다. 솔직히 못생겼다. 고양이와 강아지를 코흘리개 시절 키워본 이후로 나는 20년 세월이 넘도록 생명 있는 것을 가까이 두지 않았다. 특히나 식물 종류는 이번이 처음이다. 녀석이 우리집, 그것도 내방으로 입주하기까지의 사연도 ‘처음’이라는 말이 무색하리만치 특별할 것 하나 없다. 언니 회사 앞에 어느 날 한 장애인 단체가 작은 장을 열었다. 장애인들이 직접 만든 작은 수공예품부터 갖가지 생활용품을 이 장에서 팔았는데 다육식물도 판매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나눔 실천이라는 얄팍하기 그지없는 순간적인 선행심에 도취된 언니는 아무리 비싸게 봐 줄라고 해도 2천원도 안돼 보이는 녀석을 5천원이라는 바가지요금을 지불하고 우리집에 데리고 왔다. 꽃다발 하나도 벽에 걸어두고 말려본 적 없는 우리 가족은 녀석의 등장에 누구 한 명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 내다 버리려고 했는데 “이것도 생명 있는 것”이라는 지나가듯 하신 엄마 말씀 때문에 차마 버리지는 못했을 뿐이다. 그리곤 마땅히 놓을 자리가 없어 내 책상에 올려놓은 게 녀석과의 동거생활의 시작이었다.

‘처음’과 ‘첫 번째’와 ‘첫’이라는 말에는 특별한 기억, 의미 있는 경험, 낯선 것과의 조우 같은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녀석은 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의미 있는 경험은커녕 내게 특별한 기억 하나 지금까지 주지 못하고 있다. 생명은 있으나 제 목소리를 갖지 않은 것은 낯선 것과의 조우라는 생경함도 내게 선사하지 않는다. 녀석은 그 작은 몸집 때문에라도 무채색 계열의 내방을 생명 있는 것 특유의 초록빛으로도 꾸며주지도 않고 있다. 하다못해 악센트도 안 된다. 흙과 빛 그리고 약간의 수분에서 양분을 만들어 먹고 사는 이 초록빛의 못생긴 식물은 ‘처음’이라고 내게 유세떨지 않으며 때때로 베란다에서 햇볕을 쬐며 조용히 살아간다. 나 또한 녀석이 내게 ‘처음’이라고 해서 눈 마주치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 베란다에 내다 놓고 2주일에 한 번 꼴로 먹다 남은 커피나 생수를 뿌려주는 게 고작이다. 이런 이유로 녀석의 별명은 ‘귀찮은’이다. 녀석의 이름과 별명을 붙여 부르면 녀석은 내게 ‘귀찮은 녀석’이 된다. 우리는 마치 한 이불 덮고 자는 사이지만 밤마다 등 돌리고 자는 권태기의 부부처럼 처음부터 서로에게 무념무상인 관계이다.

생명 있는 것과의 처음도 이럴진대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와의 ‘마지막’이 내게 특별한 기억이 되거나 의미 있는 경험이 될 일 만무하다. 적어도 마당의 금붕어를 죽였다는 이유로 따로 밥까지 챙겨주며 공존의 삶을 모색했던 길고양이에게 커다란 배신감을 느꼈다고 토로하는 박완서 작가의 솔직한 글 앞에서, 그가 이미 2년 전에 고인이 됐다는 이유로 그가 내게 문학의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는 식으로 없는 말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읽는 이가 이 책으로 특별한 기억을 만들고 의미 있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 초장부터 분위기 한껏 띄운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이라는 부제 앞에서도 나는 시종일관 덤덤했다. 작가 대 독자로서 박완서와 나와의 관계는 너무나 희미하다. 그를 실제로 본적도 없을뿐더러 그의 작품을 읽었으나 책 좀 읽는 사람의 허영에 취해 그의 책을 몇 권 집어든 게 전부였다. 박완서는 책 좀 읽는 독자였던 내게는 내방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선인장 같은 존재였다. 그다지 읽고 싶지 않는 소재의 이야기인데도 책 좀 읽는 독자라는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귀찮지만 나는 유명작가이자 인기작가였던 그의 책을 읽었다. 이 무슨 싸가지 없는 예의 없는 말이냐고 누가 나무라한데도 할 수 없다. 작가는 살아 있는 것 다시 말해 움직이는 것에 호기심이 발동해 살생을 하는 길고양이의 습성을, 부러 이해해주지 않고 빗자루를 들고 그들과의 대거리를 선언할 만큼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어떤 픽션도 더하지 않은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사람이었다. 이런 이의 글 앞에서 나 또한 솔직해지는 게 고인에 대한 진정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그의 마지막 산문집에는 ‘마지막’이라는 명사가 달려있을 뿐, 그 마지막 글 속에서 그는 여전히 현업 작가로 생생히 살아 있다. 마지막은 이별이나 죽음을 연상시킨다. 인간 박완서와 한 개인으로서 나와의 사이에선 어떤 인연도 없었기에 나는 그에게 이별과 죽음에서 파생되는 어떤 감성어린 감정을 덧씌울 수 없다. 대신 희미한 관계이긴 하나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작가와 독자의 관계 안에서, 나는 아직 못 읽은 그의 책을 책 좀 읽는 독자로써 언젠가는 읽을 거라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이 같은 담담한 기분과 달리, 남은 그의 작품을 천천히 아껴봐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내 마음에 애틋함이 감돈다.

미처 못 읽은 그의 작품이 많이 남은 독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 책에는 ‘마지막’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책에서 그는 예전에 했던 이야기를 동어반복처럼 되풀이하고 있다. 물론 다른 문장과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미 접했던 소재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일례로 눈 내리는 3월에 핀 복수초란 소재는 산문집 『호미』에서 이미 한 번 써진 이야기였고, 인형을 포대기로 업고 있는 어린 손녀와 책을 보고 있는 할머니 박완서가 함께 찍힌 사진 이야기도 「내가 문을 열어주마」라는 제목의 산문으로 이미 접한 글이다. 피천득 시인의「풀리는 한강에서」를 소재로 한 이야기도 내용은 달라졌지만 소재가 같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6.25 전쟁으로 그가 가족을 잃고 서울대에 입학했으나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다는 이야기는 그의 소설과 여러 산문집을 통해 달달 외우고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이다. 연이어 남편과 아들을 잃은 그의 아픈 가족사도 박완서 작품을 접하기 전에 독자가 상식처럼 미리 알아두어야 할 사전 지식으로 여겨질 정도다. 솔직히 어디선가 그의 글로 접한 얘기를 ‘마지막’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그의 책으로 다시 마주하는 일은, 새롭고 신선한 이야기를 본능적으로 쫓기 마련인 독자의 입장에선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담긴 이 같은 이중성을 증명하기 위해 탐정노릇을 하듯 그의 전작들을 오랜만에 꺼내 봤다. 나는 누군가에게는 그리운 작가일 수 있으나 내게는 현업 작가인 그의 글을 그렇게 하나 하나 대조해가며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문득 탄생을 의미하는 ‘처음’과 죽음과 이별을 의미하는 ‘마지막’이 박완서의 삶과 글에서 같은 뜻으로 혼용됐음을 깨달았다.

자신을 키운 건 팔 할이 이야기라고 말하는 작가에게 이야기의 재생산은, 이야기를 듣는 상대에 따라 이야기를 가감하거나 새롭게 첨삭했던 당신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그랬듯, 기억을 복원함으로써 새로운 정서를 글에 담는 일이였다. 이것은 자전적 소설인『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나온 그의 말마따나, 당시의 삶과 사회에 대한 역사적 자료로써 이미 정형화된 것들보다 훨씬 풍성하고 소중하고 자상하고 진실 된 ‘인간적 증언’이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에 맞닿아 삶이 이어지듯이 과거에 대한 증언은 현재적 삶을 증명하는 증표와도 같다. 작가 박완서로든 인간 박완서로든 그 동기가 어찌됐던 간에, 탄생과 죽음을 삶에서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 그에게 인간적 증언은 전에 했던 얘기라도 누군가의 삶을 증명하기 위해 멈출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가 자신의 사후에 이 글들을 남은 이들이 마지막이란 부제를 단 책으로 엮길 바랐는지 아닌지, 그 진의를 알 수 없으나 책에서 그는 자신의 글을 읽었고, 읽는, 읽을 이들에게 이별과 죽음의 의미로의 마지막이 아닌 생명 있는 것과의 ‘처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입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살고 싶었으면 그 작은 생명에게 마음을 붙이고 울고 웃고 하였을까. 그 애의 생명력이 눈부시다면 내 생명력은 또 얼마나 징그러운가." -p.115 「내 기억의 창고」

손녀의 눈부신 생명력과 할미의 징그러운 생명력 사이에서 공통점은 ‘처음’이다. 삶이란 공평에게도 누구에게나 딱 한번 씩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어진다.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게 生의 진실이라서 살아간다가 죽어간다의 완곡한 표현이 될지라도, 우리는 새로운 생명에게서 되레 지금 막 태어난 것과 같은 자신의 생명력을 확인받곤 한다. 이것이 생명 있는 것들에게 천성적으로 주어진 역할이다. 이렇듯 박완서의 글은 자신의 삶을 비추어 타인의 삶을 증언하는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설사 어디선가 그의 글로 읽은 것 같은 이야기여도 그의 이번 글이 이번에 처음 읽는 글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글은 전에 읽었던 글도 이번에 다시 읽게 되면 새글이 된다. 생명 있는 것을 향한 그의 인간적 증언은 읽는 이의 삶과 생명력을 매번 새롭게 각성시키기에 말이다. 마지막이란 부제를 달은 산문집과 과거의 그의 책을 동시에 오고가며 내가 깨달은 게, 정확히는 발견한 게 바로 이거다. 책에 실린 박경리, 장영희, 김수환 추기경 등 고인이 된 이들에 대한 추모사에서조차도, 하다못해 죽은 남편과의 마지막 추억을 복원하면서도 박완서는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인간적 증언을 하고 있다. 박완서에게 처음과 마지막이 같은 의미로 통용된다면 이 둘 사이에서 잉태된 건 다름 아닌 인간적 증언, 즉 이야기이다. 독자인 나와 작가인 그의 관계가 희미하더라도 언제까지고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이야기가 나의 삶을 증언해주기에 그의 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과도 같다. 결국 박완서의 이야기는 독자인 나를 통과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로의 재탄생으로 이어진다. 이것이야말로 시작과 마지막이 함께 있다는 그 완전성과 영원성을 가슴 찡하도록 경이롭게 경험하는 순간이다.( 박완서의『호미』의 「시작과 종말」에서 인용)

이야기의 힘이란 이런 것일까? 처음과 마지막 사이에서 매번 새롭게 탄생하는 이야기는 그 건강한 생명력으로 많은 이들의 삶을 증언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때문에 박완서만큼이나 마지막이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 작가는 어디에도 없다. 산과 들이 분명하지 않고 논은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있는 그의 고향 박적골이 내 기억 속에서 생명력 가득한 이야기들의 고향이 되었듯이, 그는 내게 언제나 처음 만나는 작가이다. 그렇다. 내게 박완서는 아직 그리운 작가가 아니다. 독자의 입장에 쓴 내 조악한 이 글도 그가 그랬듯,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떠나보낸 가족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썼다는 걸 말하고 싶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속세의 위로나 남아 있는 이들의 그리움에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하늘나라에 있다는 걸 믿기에.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에는 이별의 인사가 없다. 독자에게 오늘도 보고 내일도 만나자고 건네는 살가운 첫인사만이 있다. 그리하여 작가 박완서는 독자인 내게는 언제까지고 현업 작가로 기억될 게 분명하다. 그의 ‘첫’소설 『나목』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문장들이 여전히 낯설게 읽히면서 의미 있는 독서의 경험을 선사하는 것만 봐도 박완서에게는 그리운 작가라는 수식어보다 특별한 작가라는 형용사가 훨씬 잘 어울린다.

"지금의 나에겐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裸木)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 애닳도록 절실하다." -박완서 소설 전집 결정판 『나목』중에서

살아있음과 생명을 새로 태어난 느낌으로 서로서로 확인하고 확인받는 관계란 더 없이 ‘세상에 예쁜 것’이라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작가 박완서와 독자인 나 사이에서도 세상에 예쁜 것은 이야기였다. 순간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관계란 달리 표현해 서로에게 삶을 빚지고 있는 관계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어머니에게서 생명을 나눠 받아 태어난 우리가 자신들의 자식에게 그 생명력을 나눠줘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모성에 보답하듯 말이다. 마찬가지로 박완서의 이야기가 하나의 생명처럼 내 삶을 증언해줬다면 나는 그것에 삶을 빚진 것이나 다름없다. 어머니와의 관계가 그렇듯, 이 삶의 가불은 가불해준 당사자가 아닌 제3자에게 자신의 삶을 가불해주는 것으로 채무를 갚는 상환방식을 취한다. 삶의 가불은 인간적 증언의 다른 표현이 된다. 나는 작가 박완서에게 갚을 길 없는 삶을 가불받았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생명 있는 존재로서 지금 이 순간 나는 누군가의 삶을 증언하며 가불 받은 삶을 갚아나가고 있다. 새삼 내 책상 위에 놓인 못생긴 녀석에게 눈이 갔다. 생기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를 녀석이 그 작고 가벼운 생명으로 조용히 증언해주고 있었음을 이제야 알아챘다. 동시에 나 또한 녀석에게 그런 존재일 거라는 기쁨이 온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거듭거듭... “세상에 예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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