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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jssm02) 일반부 우수상

느리고 불편하게 사는 법
-- ‘월든’을 읽고 --


“항구에 배가 정박 중일 때에는 아무런 위험이 없다. 그러나 배는 그러자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몇 년 전 그녀는 이 말과 함께 자신의 책장에 있던 ‘월든’을 내게 주었다. 인생의 즐거움과 행복은 저 멀리서 빛나고, 일상의 권태와 쓰라린 패배감으로 나는 하루하루를 소진하고 있었다. 그때 내게 인생은 사막 같았다.

타박타박 걸어서 건너야할 광활한 사막…….
그 광활하고 막막한 사막 한가운데 서서, 일체의 삶에 손을 놓아 버렸고, 신은 내 그런 게으름을 꾸짖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을 살았다. 내 안에서는 어떠한 미동도 감지되지 않았고, 나는 그저 겨울의 고목처럼 버티고만 있었다.

‘월든’은 그런 나를 살살 간질이고 달래서 콩코드의 깊은 숲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소로우를 만나게 했다. 그는 내게, 사람들이 찬양하는 성공적인 삶이 아니더라도 인생은 충분히 살아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오래되어 탄력을 잃어버린 고무줄 같은 내 삶을 팽팽하게 당겨주었고, 삶은 한순간에 찍히는 판화가 아니라, 한 붓 한 붓 그려가는 세밀화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월든’은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2년여 동안 자급자족하며 살았던 기록이다. 그러나 숲 생활의 단순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자연의 예찬이면서 동시에 문명사회의 비판이며, 참다운 삶에 대한 고민과 그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으려는 자유를 향한 외침이다. 월든 호수에 들어간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 신중하게 살아보기 위해 숲으로 들어 갔다. 오로지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 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잘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고 싶지 않았고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체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쳇바퀴 돌 듯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접고 자연으로 돌아가 마음의 여유를 찾고, 느린 삶을 살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가지는 소망이다. 요즘 말하는 ‘웰빙’이 바로 그런 개념이다. 친환경적인 주거공간과 자연 그대로의 식품, 최소한의 스트레스, 생태주의적, 자연주의적 삶을 그는 이미 160여 년 전에 예견하고 실천했던 것이다. 소로우처럼 살고 싶기는 하되, 소로우처럼 살지 않는 나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절름발이로 살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는
“간소하게, 간소하게, 더 간소하게 살라.”
고 외친다. 그리고 몸소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절제하고 소박하게 살았다. 상징적이고 관념적인 경제가 아니라, 현실에 근거하고 실천 가능한 경제를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소박한 삶’과 ‘자발적 빈곤’때문에 그에게는 은둔자의 조용한 삶이 아니라, 치열하고 실천적인 삶이 느껴진다. 특히, 집을 사기 위해 진 빚을 갚기 위해 오히려 더 곤궁한 생활을 하게 된다는 말은 요즘의 우리 생활을 예견한 것 같아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몸을 쉬고 에너지를 축적할 공간인 집이 돈으로 환산되는 시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가치로만 성공을 가늠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병아리를 기르지 않으므로 솔개를 걱정하지는 않는다는 그의 말이 뼛속까지 와 닿는다.

주말이면 나는 늘 운동화 끈을 당겨 매고 어디론가 떠난다. 그 자유롭고 과감한 일상의 탈출은 언뜻 호사스러워 보이지만, 실상은 가지고 싶었던 무엇를 포기하는 대신 얻게 된 여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집을 마련하고 집 때문에 더 곤궁해지는 삶을 경계했던 소로우의 가르침이, 내 마음 속의 콜럼버스를 잠 깨워 미지의 대륙과 세계를 탐험하게 하고, 사고의 지평을 넓혀 깨어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었다.

‘월든’은 탁월한 자연묘사로 시인들의 필독서로 꼽히기도 하는데, 그가 언덕 위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호수를 내려다보며, 물 위에 비친 하늘과 나무, 끊임없이 그려지는 동그란 파문을 관찰하는 부분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시월의 어느 날, 청송 주산지 물안개를 보기 위해 새벽을 가르고 나섰던 적이 있다. 그날 본 주산지 역시, 물안개가 사라지자 월든 호수처럼 완벽하게 숲의 거울이 되어 주변 풍광을 담아내고 있었다. ‘신의 눈물’이라 형용한 월든 호수의 청정한 풍광이 주산지에서도 느껴졌다. 주산지에 비친 짙푸른 청록색은 아닌 게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는 대지의 눈을 연상시켰다. 그 맑은 눈 속에 있다고 생각하니 마치 내가 소로우가 된 듯 했다. 콩코드 숲속의 작은 호수 월든, 주산지보다 조금 더 큰 이 호수는 어느덧 세계적인 문학의 호수이자 사상의 호수가 되었다. 호수의 이름을 그대로 옮긴 ‘월든’은 19세기와 20세기를 아우르는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고전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낡았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통찰과 깨달음을 준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삶, 그리고 소박하고 검소한 삶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월든’의 메시지는 좀 더 풍족한 물질가치를 소유하고자 하는 나를 반성하게 만들었다. 특히, 소로우의 아름다운 문장은 반복해 읽을 때마다 깊은 안정과 위로를 준다.

요즘은 반신욕 할 때마다 ‘월든’을 읽는다. 페이지마다 밑줄이 그어지고, 색색의 갈피가 끼워진 ‘월든’은, 내 땀과 눈물까지 머금어 본래의 두께 이상 부풀어 너덜거린다. 그 갈피갈피 사이에는 내가 흘린 사념의 땀과 고뇌의 눈물이 선명한 동그라미를 그리며 묻어 있다. ‘월든’을 읽고 나는 조금씩 가벼워진다. 내가 가벼워진 만큼, 딱 그만큼의 무게가 ‘월든’에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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