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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yheenamu) 일반부 최우수상
인생을 그리다.

아파트 베란다 너머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가 엷게 퍼진 주황빛으로 그림처럼 아름답다. 한낮에는 정열적으로 힘 있는 에너지를 분출하였던 태양이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어둠에게 희미한 빛으로 맞서고 있을 뿐이다. 곧 그 주황빛 하늘도 어둠에게 밀리어 자취를 감출 것이다.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 온다. 그럴 때면 지난 삶을 반추해 보는 습관이 생긴 지 오래 되었다. 허전함을 메꾸어 보려는 생각들은 오늘 다하지 못한 일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허전함은 그날그날의 되풀이 되는 일상의 누락이 가져다주는 불안함은 아닌 것이다. 어제처럼 살고 싶지 않았던 오늘을 또 특별할 것도 없이 속절없이 보내 버렸기 때문이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다보면 그것이 쌓이고 쌓여 후회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을 생각해 본다. 오늘의 나의 하루는 내가 새파랗게 젊었을 때 그리기 시작한 인생이라는 그림에서 과연 어떤 색으로 덧 입혀졌을까? 얼마만큼 완성도에 가까운 빛깔로 그려졌을까?

여고생이었을 때는 삶이 내가 원하는 바대로 흘러갈 줄 알았다. 나는 그때부터 아름다운 미래를 그렸었다. 그 때의 나의 인생에 대한 가상의 완성된 그림은 강렬하면서 명암이 분명하고 선이 굵고 안정된 채색으로 무게감 있는 그림을 남긴 거장의 삶과 같았다. 고난이 있어도 능히 이겨내는 삶. 신념은 단단하고 정신은 강해서 그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을 자신감이 넘치는 삶. 물질적으로 가난한 삶은 정신세계의 풍요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인생은 해피엔딩일 것이라는 생각. 이렇게 근거 없이 낙관적인 생각들로 내가 원하는 삶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생의 청사진을 위한 밑그림은 잘 지워지는 연필로 시작했다. 이미 고등학교 문을 나서면서 나의 밑그림은 수정되기 시작하였다. 친구들이 대부분 대학의 문으로 들어갈 때, 나는 어느 화장품회사에 들어가 화장품을 팔고 있었다. 단단하게 여물지 못했던 정신은 돈도 모으지 못하였다. 가장 절실하였던 학업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물코처럼 엮어진 인간관계조차도 상처뿐이었다. 열정 하나만으로는 내가 그리던 밝고 활기찬 청춘이라는 밑그림에 도저히 채색을 할 수 없었다. 지우고, 다시 그리고 또 지우며 수없이 다시 그렸지만 결코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욕망은 더 부풀어 졌는지도 모른다. 어느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던 나의 황폐한 정신은 늘 허기졌고 그 정체가 모호해졌다. 오랫동안 수정되기만 하였던 밑그림 때문에 단단하고 두꺼웠던 종이는 얇아지기 시작했다.

운명이라는 것이 있어 지쳐있던 나에게 도피처로서 준비되어 있었던 것일까? 처음, 나의 인생이라는 밑그림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산사라는 아주 이질적인 곳에서 이십여 년이 다 되는 세월 동안 붙박이로 살게 되었다. 나는 완전한 승가의 세계로 출가는 하지 않았지만 내가 그동안 허상만을 쫓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에 그리기 시작한 밑그림이 너무 무른 연필로 그려진 무지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지만 나는 좀 더 인내를 발휘하였다. 명확한 선으로 단순하지만 아름답게 형태를 잡아서 새로운 밑그림으로 인생을 다시 설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산사를 떠날 때, 드디어 나의 그림에 채색이 시작되었다. 비로소 비옥한 대지위에 뿌리가 깊이깊이 내리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 동안의 시간은 하루하루가 지치도록 지루했다. 그런데 지금 그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처럼 느껴진다. 지난 시간들이 쓸모없이 소비되어진 시간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이제 철이 들어서 뿌리 깊은 나무로 세상을 본다. 나의 무색이었던 밑그림에 드디어 색이 입혀지고 보니 또 다른 생각들이 꿈틀대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좀 더 빛나고 아름다운 색으로 칠하고 싶다는 욕망들이다. 빛이 나지만 천박하지 않고, 아름답지만 결코 화려하지 않은 색들을 골라 남은 인생을 채색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 말이다.

자신의 설계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비옥한 농토위에 훌륭한 유전인자를 가진 씨를 뿌리고 적절한 비와 바람과 기온으로 풍성한 농작물이 수확 되듯이 완벽한 조건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들처럼 그 모든 조건 중에 어느 것 하나 갖고 있지 못하더라도, 자랑할 만한 성공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더라도 나는 열심히 나의 그림을 그려 나갈 것이다. 나의 인생은 잘못된 밑그림으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종이였지만 새롭게 그린 그림으로 채색되어지고 있다. 오늘처럼 다소의 회한 섞인 마음으로 하루를 돌아보며 아쉬워할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산등성이 너머 마지막까지 남은 여광으로 희미하지만 붉은 빛을 뿜어내는 태양처럼 살아갈 것이다. 나의 인생이라는 그림의 완성을 향해서 아름다운 색으로 그려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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