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 봄이네 집 뒷마당에 수상한 그림자가 아른거렸어요. 하수구 옆 담벼락에 조그만 구멍이 나 있었는데 거기로 집쥐 두 마리가 들어온 거예요.
“여보, 이 집은 안전할까요?”
“글쎄, 잘 살펴봅시다.”
쥐들은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코를 씰룩거렸어요.
“여기는 괜찮은데 저쪽으로 가 봅시다.”
아빠 쥐가 엄마 쥐에게 말했어요. 둘은 화단 근처로 갔어요. 화단엔 색색의 예쁜 꽃들이 피어 있었어요. 바람이 불자 화단에서 꽃향기가 날아왔어요.
“정말 좋아요. 매일 하수구 냄새만 맡다가 이런 좋은 냄새를 맡으니 날아갈 것 같아요.”
엄마 쥐가 몸을 쭉 펴서 향기를 맡았어요. 둘은 향기에 취해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잠시 후에야 커다란 고양이 한 마리가 마당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어요.
“헉! 큰일났다. 고양이야!”
아빠 쥐는 너무 무서워서 다리가 후들거렸어요.
“여, 여보. 어쩌죠? 난 꼼짝도 못하겠어요.”
엄마 쥐도 온 몸을 떨며 속삭였어요. 얼마 전, 골목길에서 만난 무서운 길고양이에게 새끼 들을 잃은 적이 있어요. 그 생각만 하면 끔찍했어요.
“여보! 정신 차려요! 남은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무사히 빠져나가야 해. 가만 보니 저 고양이는 자고 있는 게 분명해요. 살짝 모르게 지나갑시다.”
둘은 힘을 내어 살금살금 걸어갔어요.
그때 고양이가 코를 킁킁거리다가 눈을 살짝 떴어요. 수상한 기척을 알아차렸나 봐요. 고양이가 고개를 들었어요. 그러다 아빠 쥐와 눈이 마주쳤어요.
아빠 쥐는 깜짝 놀랐어요.
“아아, 이제 죽었구나. 내가 없으면 불쌍한 내 자식은 어떻하나?”
아빠 쥐는 앞이 캄캄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양이는 다시 누워 눈을 감았어요. 다 귀찮다는 듯이요.
‘이 때다!’
아빠 쥐는 엄마 쥐와 재빨리 달아났어요.
쥐들은 무사히 하수구 속의 집으로 돌아왔어요. 한숨을 돌리고 난 아빠 쥐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이상하지 않소?”
아빠 쥐가 말했어요.
“뭐가요?”
엄마 쥐는 생각에 잠겨 있는 아빠 쥐를 보았어요.
“그 고양이 말이오. 우릴 보고도 모른 척 했잖아요. 아무래도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고양이가 우릴 잡아먹지만 않는다면 그런 좋은 집이 어디 있겠소? 이런 냄새 나는 하수구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 보다 나아요.”
“그야 그렇지만…….”
엄마 쥐도 그 집이 마음에 들긴 했어요.
아빠 쥐는 그날부터 고양이를 관찰하기 시작했어요. 멀리서 고양이의 행동을 살펴보고 이웃 쥐들에게 물어보기도 했어요. 고양이와 그 집 주인에 대해 알면 알수록 아빠 쥐는 그 집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리고 얼마 뒤, 쥐 가족은 봄이네로 이사를 했어요.

해님이 기분 좋은 날이었어요.
“학교 다녀왔습니다.”
봄이가 가방을 내려놓고 마루에 누워 있는 고양이 단비를 쓰다듬었어요. 봄이는 늘 학교에서 돌아오면 단비부터 찾아요. 그러고 나서 엄마에게 달려가지요.
“봄이 왔니?”
부엌에서 나오는 엄마의 낯빛이 구름 낀 하늘처럼 찌푸둥 했어요.
“엄마, 무슨 일 있어요?”
봄이가 묻자 엄마는 대답 대신 손에 든 자루를 보여주었어요.
“이것 좀 봐라. 고구마를 누가 갉아 먹었어.”
정말 고구마 자루엔 구멍이 나 있고, 안에 든 고구마도 여기저기 갉아 먹힌 흔적이 있었어요.
“고구마뿐만이 아니야. 무우도 그렇고 당근도 그래. 음식 찌꺼기도 흩어져 있고.”
“그래요? 도대체 누가 그랬을까요?”
봄이는 갉아 먹은 자국을 요리조리 살펴보았어요.
“아무래도 우리 집에 쥐가 사는 모양이구나.”
엄마는 이미 범인을 짐작하고 있었어요.
“예에? 쥐요? 엄마, 그렇다면 걱정 마세요. 단비가 있잖아요. 단비가 쥐를 잡을 거예요.”
봄이는 자신 있게 말했어요. 그리고는 단비에게 달려갔어요.
“단비야!”
봄이가 부르자 단비는 배를 보이며 발라당 드러누워 꼬리를 흔들었어요. 단비의 뱃살이 축 늘어졌어요. 목살도 여러 겹으로 접혔어요.
“단비야, 이럴 때가 아니야. 큰일 났단 말이야. 쥐를 잡아야 해.”
그러면서 단비를 일으켰어요. 단비는 천천히 힘들게 일어났어요. 단비는 봄이에게 몸을 비볐어요. 쓰다듬어달라는 몸짓이예요. 단비는 봄이의 손길을 좋아했어요. 그러나 오늘 봄이는 군인처럼 딱딱하게 단비를 대했어요. 마치 전쟁터에라도 나가라는 듯 자꾸만 단비를 몰아붙였어요. 그러나 단비는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봄이를 볼 뿐이었지요. 그리고 마침내 드러누워 움직이지 않았어요.
봄이가 아무리 타일러도 단비는 꼼짝하지 않았어요. 봄이와 단비가 옥신각신 하는 소리가 온 집안에 퍼졌어요. 봄이는 마루 밑 구석에서 쥐들이 이런 소리를 듣고 있는 줄 꿈에도 몰랐죠. 아빠 쥐가 좋아하는 것도, 엄마 쥐가 앞으로 여기서 오래오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몰랐어요.
아무리 애를 써도 말을 듣지 않자 봄이와 봄이 엄마는 단비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갔어요.
“의사선생님, 단비가 쥐를 잡으려고 하지 않아요. 어디 아픈 게 아닐까요?”
엄마와 봄이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어요.
“흠, 보자.”
단비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의사 선생님이 말했어요.
“봄이야, 봄이 어머니. 단비는 비만입니다. 그 동안 너무 잘 돌봐주어서 체중이 많이 늘었어요. 움직이면 힘이 들고, 또 먹을 것이 많아서 쥐를 잡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요. 어릴 때부터 사람의 손에 자라서 고양이의 본성을 잃은 것도 원인이 될 수 있어요.”
봄이 엄마와 봄이는 깜짝 놀랐어요. 단비를 잘 돌봐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니 놀라울 수 밖에요. 봄이는 단비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쎄요……, 훈련을 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만 해낼 수 있을지…….”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는 무거웠어요.
“할 수 있어요, 선생님. 우리 단비는 제 말을 잘 들어요. 제가 단비를 잘 훈련시킬게요. 방법을 알려주세요.”
봄이가 말했어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하는데 잘할 수 있을까요?”
의사선생님은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어요.
“선생님. 봄이는 커서 동물 조련사가 되는 게 꿈이예요.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한번 믿어보세요.”
봄이 엄마가 말했어요.
“그렇다면 방법을 알려줄게요. 우선 단비의 먹이를 바꿔야 합니다. 병원에서 주는 다이어트용 사료를 먹이고, 다른 먹이는 절대 주지 마세요. 그리고 운동을 시키는 겁니다. 간단한 것에서 시작하여 단계를 높이면서 고양이의 본성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운동 방법은…….”
봄이는 의사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단비를 훌륭한 고양이로 만들겠다고 결심했어요.

병원에 다녀온 뒤부터 단비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어요.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을 뿐이었죠. 편안했던 생활이 사라지고 힘들고 귀찮은 일들만 생겼어요.
“단비야, 이것 잡아봐.”
봄이가 저 쪽에서 공을 굴렸어요. 단비는 몇 번 앞발로 공을 건드려보았지만 그게 전부였죠. 공에 관심이 있었지만 몸을 움직이기 귀찮았어요. 단비는 곧 자리에 누워버렸어요. 그러자 봄이가 이번엔 딸랑이를 흔들었어요. 단비가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자 멀리서 육포를 들고 흔들기도 했어요. 단비는 맛있는 냄새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어요.
봄이는 전과 달리 육포를 입에 넣어주지 않았어요. 높이 들고 먹으라고 하는 거에요. 단비는 기가 막혔어요. 단비에게 뛰거나 달리거나 덤벼드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어요. 그 대신 단비가 할 수 있는 건 애교 뿐이었어요. 단비는 봄이에게 몸을 비비며 ‘냐아옹’하고 애교 섞인 소리를 냈어요.
“안 돼. 단비야, 뛰어서 먹어야지!”
봄이는 물러서지 않았어요. 단비는 봄이가 저러다 말겠지 여겼지만 봄이의 결심은 단단했어요.
며칠이 지났어요. 단비는 배가 고팠어요. 봄이는 과자나 아이스크림, 육포 같이 단비가 좋아하는 간식들을 주지 않았어요. 맛없는 사료만 주었어요. 게다가 봄이가 어찌나 귀찮게 하는지 여기저기 몸이 욱신거렸어요.
“봄이는 너무 해. 먹이도 조금만 주고, 자꾸 야단만 치네. 자꾸 쥐만 잡으라고 하니 아이, 귀찮고 배고파.”
단비는 마당으로 나갔어요. 마당에 풀들이 자라 있었어요. 전에는 눈여겨 보지도 않던 풀이지만 배가 고프니 길죽한 과자처럼 보였어요.
“저거라도 먹어볼까?”
풀잎을 씹어보았어요.
“아이, 써, 퉤 퉤.”
곧 풀잎을 뱉어내고 말았어요.
“이게 모두 쥐 때문이야.”
단비는 더 기분이 나빠졌어요.
그때였어요. 쥐 냄새가 났어요. 쥐 한 마리가 마루에서 부엌 쪽으로 가고 있었어요. 작은 새끼였어요. 단비는 쥐를 잡기로 했어요.
‘잡아서 봄이에게 갖다 주면 좋아할 거야.’
단비는 몸을 낮추고 살글살금 다가가다가 단숨에 쥐를 덮쳤어요.
“꼼짝 마!”
단비는 앞발로 쥐를 쳤어요. 그리고 요리조리 놀려 정신을 못차리게 했어요. 쥐는 꼼짝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어요.
“흥, 너로구나. 나를 괴롭게 만든 게. 아직 새끼라 안됐지만 가만 둘 수는 없어.”
단비는 새끼 쥐를 물려고 했어요.
그때였어요.
“안 돼!”
아빠 쥐가 달려왔어요. 단비는 아빠 쥐를 보았어요.
“내 아들을 돌려줘. 차라리 나를 잡아가.”
아빠 쥐가 울먹이며 말했어요.
“길고양이들에게 새끼를 모두 잃고 아들 하나만 남았단 말야. 제발 살려줘. 뭐든지 시키는대로 할게.”
아빠 쥐의 말을 들으니 불쌍했어요. 처음부터 먹을려던 것도 아니었고요. 어쩌면 작은 새끼 쥐 한 마리를 잡는 것 보단 아빠 쥐의 말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았어요.
“그래? 그럼 우리 집 음식 건드리지 마. 그리고 여길 떠나.”
단비가 말했어요.
“알았어.”
아빠 쥐가 힘없이 말했어요. 그때 엄마 쥐가 나타났어요.
“안 돼! 우린 갈 곳이 없어. 여기서 나가면 언제 남은 아이도 잃을지 몰라. 하수구에서 더러운 음식만 먹다간 오래 살지 못할 거야. 넌 쥐를 잡아먹지 않는 좋은 고양이고, 너 때문에 다른 고양이들이 여긴 얼씬 못한다고 들었어. 부탁이야. 우릴 여기서 살게 해줘.”
엄마 쥐가 울면서 사정했어요.
“흠, 내가 다른 고양이들보다 힘이 쎄긴 하지. 그런 떠돌이들에게 맛있는 먹이를 뺏기는 바보는 아냐. 그렇게 사정하니 마음이 약해지는 걸. 좋아, 음식만 손대지 않는다면 여기 있어도 좋아. 내가 먹는 맛없는 사료가 있는데 말이야. 그걸 조금 나눠줄 순 있어. 너희들이 조용히 있으면 다시 맛있는 간식들을 먹게 될 테니까 나도 손해볼 건 없지.”
단비는 좋은 고양이라는 말에 기분이 좋아졌어요.

“엄마, 단비는 구제불능이에요. 아무리 해도 안 움직여요. 사료도 잘 안 먹고, 입에 맞는 먹이를 안 주니까 그냥 굶고 있어요.”
봄이가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어요.
“우리가 단비를 그렇게 길렀으니 어쩌겠니? 이제 와서 습관과 입맛을 고치기가 쉽겠니? 그래도 요즘 쥐들이 조용해졌어.”
엄마의 말에 봄이는 다시 기운을 찾았어요.
“그래요? 단비가 쥐를 쫓았나봐. 다이어트는 실패했지만 훈련은 효과가 있었네. 아이, 기특해라.”
봄이는 단비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어요.
“엄마, 단비에게 상을 줘야겠어요. 아이스크림과 과자 조금 주는 건 괜찮겠죠?”
봄이는 예전처럼 단비와 간식도 먹고 같이 놀고 싶었어요. 사실 봄이도 그 동안 많이 힘들었거든요.
“그래, 갑자기 모든 걸 바꾸는 건 힘들지도 몰라.”
봄이 엄마도 그동안 봄이와 단비를 지켜보며 힘들었던 마음을 스르르 내려놓았어요.
“단비야, 우리 간식 먹자.”
봄이는 부엌으로 달려갔어요. 단비가 봄이를 따라갔어요.

한편, 마루 밑에서는 쥐 가족이 모였어요.
“여보, 길고양이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먹이도 쉽게 얻게 되니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아이도 편하게 지내고 있어요.”
엄마 쥐가 말했어요.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요.”
아빠 쥐는 아까부터 생각에 잠겨 있었어요.
“다 잘 되었는데 뭐가 문제에요?”
“아이가 걱정이오. 편하게만 지내면 단비처럼 될지도 몰라. 단비는 착한 고양이지만 너무 오랫동안 사람에게 기대어 살아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게 되었어요. 이 집을 떠나면 살 수 없을 거야.”
아빠 쥐가 말했어요.
“그럼 우리도 오래오래 여기서 살면 되잖아요.”
엄마 쥐의 말에 아빠 쥐가 고개를 저었어요.
“그게 아이에게 좋은 걸까? 모르겠어. 깨끗하고 안전한 곳이면 아무 걱정이 없을 줄 알았는데 너무 편하고 좋은 것도 문제군.”
아빠 쥐의 말에 엄마 쥐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마루 위에서 ‘코르릉’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은 단비가 달콤한 잠에 빠져들고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