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아야, 놀이터 가자.”
준이의 말에 영아가 방에서 달려 나옵니다. 영아의 손을 잡는 준이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습니다. 준이는 학교에서부터 속이 상해 있었습니다. 영아는 신발을 신겨주는 준이를 요리조리 살핍니다.
“오빠, 화났어?”
“아니.”
얼른 눈길을 돌립니다. 눈치 빠른 영아를 속이기가 어렵기도 했지만 여섯 살 영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순 없었습니다.
영아는 엄마가 돌보는 아이입니다. 영아의 엄마가 영아를 키울 형편이 못되어 엄마가 돌봐주기로 했습니다. 엄마가 나가면서 영아를 부탁하지 않았다면 준이는 방에 그냥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엄마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힘든 엄마를 조금이라도 돕고 싶었으니까요.
대문을 나서자마자 영아는 신이 나서 앞으로 달려갑니다.
“하나, 둘, 셋….”
깡총거리며 바닥에 깔린 블록의 수를 셉니다. 요즘 숫자공부에 폭 빠져 있는 영아는 무엇이든 세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영아야, 넘어질라. 천천히 가.”
준이는 걸음을 빨리 했습니다. 걸을 때마다 무릎이 따갑고 쓰라렸습니다. 기태와 뒤엉기며 넘어질 때 생긴 상처입니다.
“기태, 이 자식!”
준이는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달려가던 영아가 돌부리에 걸려 비틀거립니다. 준이는 얼른 가서 몸을 잡아주었습니다. 영아 때문에 무릎이 더 아픕니다. 하지만 영아는 준이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갑니다. 영아에게는 놀이터만 보이나 봅니다. 조그만 영아는 생쥐처럼 조르르 잘도 달립니다. 준이는 영아의 뒤를 쫓느라 달음질을 쳐야 했습니다.
가끔 영아가 성가시고 귀찮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준이가 짜증을 내면 엄마는,
“너는 혼자뿐인데 동생이 생겨서 좋고 엄마는 딸이 생겨서 좋잖니. 이웃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지.”
하고 말합니다. 하지만 준이는 일부러 힘든 일을 맡은 엄마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놀이터에 도착하자 영아는 곧 친구 보라에게 달려갔습니다. 영아와 보라는 모래 장난을 시작합니다. 준이는 겨우 한숨을 놓고 의자에 앉습니다.
놀이터 한 쪽에 아이들이 모여 있습니다. 준이가 아는 아이들입니다. 그 쪽에서 준이를 본 모양입니다. 한 친구가 준이에게 축구공을 들어 보입니다. 축구 하자는 신호입니다. 하지만 지금 준이는 그럴 기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두 팔로 가위표를 해 보였습니다. 친구는 곧 다른 아이들과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준이는 의자에 앉아서 공을 따라 가는 아이들을 눈으로 좇았습니다. 어느 새 그 아이들이 기태와 자신의 모습으로 바뀝니다.
기태가 공을 차며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골대가 바로 앞에 있습니다. 준이는 있는 힘을 다해 기태를 따라갔습니다. 이번 반 대항 릴레이 경기에 기태와 준이 중 한 명이 대표로 나갈 거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준이는 기태를 이기고 싶었습니다. 준이는 슬라이딩을 하며 태클을 걸었습니다. 기태는 슛을 하기 직전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와아, 골인이다!”
아이들의 고함소리가 놀이터에 울려 퍼집니다. 준이는 문득 정신을 차렸습니다. 친구가 찬 공이 그네 골대 안으로 막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준이가 방해하지 않았다면 기태가 찬 공도 저렇게 골대 안으로 들어갔을 겁니다. 기태는 넘어지며 팔꿈치와 다리에 상처까지 났습니다. 그때 기태가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마음을 누릅니다. 그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넌 비겁해!”
영아를 돌아봅니다. 모래성을 쌓고 있습니다.
“여덟, 아홉, 열….”
영아는 모래를 쌓을 때마다 수를 셉니다. 그러다 마음에 들지 않는지 갑자기 무너뜨려 버립니다. 모래성은 다시 평평해졌습니다.
준이의 무거운 마음도 저렇게 무너뜨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준이는 나무에서 한들거리는 잎사귀 하나를 꺾었습니다. 반지르르 윤기 흐르는 잎사귀가 기태 얼굴 같습니다.
기태는 그날 이후 준이에게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릴레이 선수 선발전이 다가올수록 두 사람 사이에는 알 수 없는 벽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오늘 오후였습니다.
“야! 너 왜 내 필통 떨어뜨리고 그래!”
기태가 눈을 부라리며 준이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 아냐. 지나가다 스쳤을 뿐이라고.”
준이는 교실 바닥에 떨어진 필통을 주우려다 그만 두었습니다. 괜히 마음이 뾰족하게 치솟아 오릅니다.
“거짓말 하지 마. 일부러 그런 것 다 알아!”
기태가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랬잖아!”
준이도 소리를 지르며 기태를 노려보았습니다. 미안했던 마음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때 기태의 주먹이 날아왔습니다. 둘은 뒤엉켜 바닥을 뒹굴었습니다.

“이거 내 거야.”
“아니야, 내 거야.”
영아와 보라의 고함소리가 들립니다. 준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이들을 보니 모래가 든 음료수 병을 사이에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습니다.
“내 거야!”
영아가 힘껏 당기자 보라가 비틀거립니다.
“아니야, 내가 먼저 봤어!”
보라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병에 매달립니다. 준이가 달려가 말렸지만 소용 없습니다. 영아는 준이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립니다. 준이는 짜증이 났습니다.
“그 병 이리 내!”
준이는 소리를 지르며 음료수 병을 빼앗았습니다. 둘은 비틀거리더니 모래 위에 넘어졌습니다. 커다란 울음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주위에 있던 아이들이 준이를 힐끔거리며 쳐다봅니다. 준이는 겨우 둘을 진정시키고 영아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엄마는 모래와 눈물로 범벅이 된 영아를 보자 깜짝 놀랐습니다.
“겨우 병 하나 가지고 싸우다니 아이들이란. 준이 네가 잘 살피지 그랬니?”
엄마는 혀를 끌끌 차더니 준이를 보았습니다. 마치 자기 때문이라는 듯 쳐다보는 엄마 때문에 준이는 더 속이 상했습니다.
“엄마는 보지도 않았으면서 내 잘못이래!”
준이는 욕실로 들어가 물을 확 틀었습니다. 찬물을 얼굴에 끼얹습니다. 그러나 찬물은 준이의 마음까지 씻어주지 못했습니다.
욕실에서 나오는 준이를 영아가 따라왔습니다.
“오빠, 더하기 가르쳐 줘.”
간식을 먹고 난 영아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나 봅니다. 조금 전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런 영아가 신기합니다. 그러나 준이는 영아와 놀아줄 기분이 아닙니다.
“오빠 숙제해야 해.”
준이는 일부러 차갑게 말했습니다.
“숙제는 나중에 해. 더하기 가르쳐 줘. 응? 영아는 오빠하고 공부할래. 오빠가 좋아.”
영아가 맑은 눈으로 준이를 올려다보며 팔에 매달립니다. 이럴 때 영아는 제일 사랑스럽습니다. 준이는 어쩔 수 없이 더하기 공부를 시작합니다.
“사탕 한 개가 있는데 엄마가 한 개를 더 주셨어. 그러면 모두 몇 개지?”
준이가 영아의 또랑또랑한 눈을 봅니다.
“오빠, 사탕 먹으면 이빨 썩는단 말이야. 사탕은 안 돼.”
영아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 준이를 쳐다봅니다.
“그래, 그래. 알았어. 사탕 말고 연필로 하자.”
준이는 영아의 손가락을 하나씩 펼치며 설명을 해줍니다. 똑똑한 영아는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들었습니다.
“아하, 한 개하고 한 개하고 더하면 이렇게 두 개가 되는 거네. 음… 그럼 오빠, 뭐든지 더하면 두 개가 될 수 있어?”
“한 개하고 한 개하고 더하면 뭐든지 두 개가 되지.”
준이의 말에 영아는 한참 생각을 합니다.
“그럼 왜 빨강하고 노랑하고 더하면 주황색이 되는 거야? 미술학원에서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단 말이야.”
“음, 그건 말이야….”
준이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대답을 못하면 오빠로서의 자존심이 말이 아닙니다. 준이는 난처했습니다.
그때 엄마가 끼어들었습니다.
“야, 우리 영아 정말 똑똑하구나! 유명한 과학자 중에 에디슨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도 물방울 하나와 또 하나가 만나면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된다고 한 적이 있었지.”
엄마 덕분에 준이는 한숨을 돌렸습니다.
“영아야, 둘이 만나서 두 개가 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둘이 만나서 더 큰 하나가 되는 것도 있단다. 앞으로 영아가 더 많이 배우게 되면 알 수 있을 거야.”
엄마의 말에 영아는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그럼, 보라하고 나는요? 보라하고 나하고 더하면 하나에요?”
“아유, 싸워도 보라가 최고지? 그래, 서로 친하면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있단다.”
“그럼 영아와 아줌마는요? 영아와 오빠는요?”
영아는 신기한 것을 알았다는 듯 눈을 빛냈습니다.
“영아와 아줌마도 하나지, 영아와 오빠도 하나고. 우린 가족이니까.”
엄마가 영아의 손을 잡습니다. 그러자 영아가 준이의 손을 잡습니다.
“그럼 우리 모두 하나네. 더하기 정말 재밌다.”
“호호, 우리 영아 정말 똑똑해. 그렇지? 준아.”
준이는 엄마를 봅니다. 엄마가 준이의 손을 잡습니다. 엄마의 마음이 손을 통해 전해진 걸까요? 준이는 마음이 따뜻해옵니다.
“준아, 고마워. 엄마는 네가 있어서 정말 든든해. 아마 영아도 그럴 거야.”
“엄마, 난…….”
준이는 목이 메어와 말을 잊지 못합니다. 엄마는 준이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입니다.
영아는 엄마와 준이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크게 하품을 합니다. 잠이 오는지 눈을 껌벅거립니다. 영아가 준이에게 스르르 기댑니다. 그래도 잡은 손을 놓지 않습니다. 준이에겐 가끔 귀찮기도 하지만 귀여운 동생입니다. 준이는 영아가 넘어지지 않게 몸을 받쳐주었습니다.
“엄마, 난 영아보다 더하기를 못하나 봐.”
“호호호, 그래? 그럼 영아에게 한 수 배워야겠다.”
엄마와 준이는 마주보고 웃었습니다.
‘기태는 더하기를 잘 할까?’
준이는 내일이 기다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