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버지, 막냅니다.
벚꽃이 비 되어 내리는 길을 홀로 걷다 막 돌아와 아버지를 기억합니다. 이 시간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납니다. 그 꽃길을 함께 걸으며 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듣고 싶었음은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이 아버지가 제 곁을 홀연히 떠나신 지 백일이 되는 날입니다. 평안하시지요. 
 
자식에게 아버지는 특별한 존재임이 확실합니다. 저에게도 아버지는 늘 존재감이 컸습니다. 어떨 때는 태산 같기도 하였고 또 어떨 땐 작은 동산의 아기자기한 둔덕이기도 하였지요. 분명히 흔들림 없는 큰 나무 같았는데 어느 순간 깡마른 인간이었음을 느꼈습니다. 저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보니 그제야 철이 들어, 내 아버지의 삶이 애처롭기만 하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 아버지는 가셨습니다. 갑작스레 아버지를 여의고 문득문득 아버지 얼굴을 떠올리며 가슴이 아려오는 날이 많습니다. 지난 명절에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너무도 크게 느끼며 생전에 불효를 다시금 생각하며 그 보고 싶음에 머리 조아렸습니다. 이제 아버지를 잊어야 하지만 쉬이 떠나보내지 못하고 먹먹한 가슴이 오래도록 이어짐은 어쩌면 당연하겠지요. 현재는 바로 과거에 자신이 선택한 결과이니 아버지 향한 이 아픔은 불효에 대한 결과라 생각합니다. 자식인 저에게 그 무엇도 바라지 않았으나 사뭇 머리 숙여짐은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모자랐음이 확실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토록 아버지가 보고 싶은 것은 당신의 사랑을 무조건 받았고 그러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으며 나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사랑이 된 사람, 한 때는 당신을 미워하고 부끄러워하며 세상과 멀어졌다가, 화해하며 세상과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기억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매섭게 매를 든 적이 있으셨지요. 남의 것을 탐하였을 때입니다. 벌이 더욱 가혹했던 것은 훔치지 않았다고 거짓말까지 보태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회초리의 가르침으로 지금껏 남의 물건에 손대는 버릇은 가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저에게 회초리의 매운맛을 주었던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 제가 아버지가 되어 제 아들에게 매를 들면서 아버지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제 심장은 느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무척 사랑하고 계셨다는 것을요.

가난에 기죽지 않으며 삶을 사랑하셨고 조금씩 세상과 어울리려 노력한 아버지. 함께한 추억들이 새록거립니다. 가난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 보려고 몸서리치게 발버둥치는 모습 속에는 철부지의 부끄러움이 함께 했습니다. 평생 거짓 없는 농군이었으니 초라한 형색을 정당화하시며 ‘일하기 편해서’ 라는 변명을 늘 하였더랬습니다. 아버지는 천상 땅의 힘으로만 사셔야 했으니까요.

한 인간이 역사의 큰 흐름 앞에 놓이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그 시대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당대의 고난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가야 할 운명을 얻는다는 것을 압니다. 고난의 근, 현대사를 꿰뚫고 살아야만 했던 아버지 세대 삶의 고단함을 우리가 감히 짐작기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아버지의 아들이었음을 부끄러워 한 적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죄송합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데 어린 마음에 전 그때 삶이 공허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와 생각하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아버지의 지혜는, 세상을 향해 현명한 시선을 던짐으로써 실존의 행복한 측면을 선택하였던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향해 던진 실존주의적 철학은 실로 위대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참으로 위대하였습니다. 이제야 조금은 알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내 아버지,

지난주에 군대 간 손자 민준이가 휴가를 나왔어요, 할아버지를 보고 싶다고 하여 아버지가 영면해 있는 곳에 갔었습니다. 준이가 입대한 직후에 아버지가 떠나셔서 이제야 인사드리러 갈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마당까지 나와 반겨 주었던 아버지 모습은 이제 없고 살랑이는 봄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누워만 계시더군요.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어 주니 다소 위안은 되었습니다. 사랑합니다. 자주 찾아가 아버지를 기억하겠습니다. 오래도록요, 아버지에게 보내는 짤막한 이 편지를 갈무리하며 약속을 합니다. 제 삶이 다하는 날까지는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노라고,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노라고 말입니다.

삶을 사랑하며 신념을 지니고 사셨던 사랑하는 아버지 모습 떠올리며 제 삶이 다하는 날까지는 기억하겠습니다. 이 시간 온 마음 다해 아버지를 만납니다. 부디 편히 영면하십시오.                                                                        막내아들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