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살이 되기 전까지 난 너무나 재미없게 살아왔다. '공부 못하면 성공할 길이 없어.'
'네 얼굴엔 공부라도 잘해야지.' 학교,학원,집, 학교,학원, 집, 학원, 학원....
수능 날 엄마는 딱 한 마디를 하셨다. "못 치면 니 인생이니까 알아서 해." 격려의 따뜻한 말 한 마디 못 들었지만 학원에서 살다시피 한 나는 높은 점수로 수능을 끝냈다.
난 엄마 말씀대로 수능 치고 나면 다 끝인줄 알았고, 이제 돈 벌어서 행복할 일밖에 안남았다고 생각했다. 그 반대였다. 취업을 하기 위해 아둥바둥 살아야 했고, 공부는 커녕 아르바이트 하기에 바빴다.
너무 힘든 날만 계속 되던 어느 날,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났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눈동자에 호수가 담겨 있다는 말이 뭔지 알것만 같았다. 화장이 연한 그녀는 마치 때묻지 않은 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웃는 게 이뻣고, 나한테 너무 잘해주었다.
나랑 같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녀는 나이가 같았고, 나도 너와 똑같다고 말했다. 나도 공부만 해왔다고, 대학 들어와도 뭘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하루하루가 걱정스럽다고. 정말 나랑 똑같았다. 이 사람에게는 마음을 털어놓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때부터 같이 공부만 해온 친구 한명이 편의점에 왔다가 나와 그녀가 친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는 '야, 진짜 이쁘네. 여친이냐?' 하고 물었다. 그녀는 소위 남자들이 말하는 '이쁘다' 가 아닌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난 그녀를 좋아했다.
항상 생활비를 뺀 남은 월급을 조금씩 아껴 편의점 앞 폐지 줍는 할아버지께 매일 식사를 챙겨드리고, 자기는 삼각김밥 한 개로 점심을 때운다. 자기 먹고 살기도 힘든데.
그렇게 2년이 나도 모르게 흘러갔다. 난 그녀도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고, 마침내 용기 내어 고백을 하게 되었다. '좋아해.' 그 고백을 받으면 좋아하는 것 까진 아니더라도 기뻐할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휙 돌아서더니 '미안해. 나 먼저 갈게.' 이러고 그냥 가버렸다. 그 자리에 서서 이게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한참을 서있었다. 장난이겠지. 좀있으면 저기 모퉁이에서 걸어나와 말을 걸겠지. 한참 있다가 이게 사실이란 것을 알았다.
실망했다. 그녀가 미웠고, 나한테 아무 마음 없이 그렇게 잘해줬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편의점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하나. 돈을 벌어야하니 편의점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날, 편의점에 갔다. 알바생이 나밖에 없었다. 뭐지 하는 마음에 점장님께 그 여자애는 왜 안나오냐고 물었다. 그러자 점장님이 '나도 잘 모르지. 오늘 안나온다고 월급에서 빼달라고 말하더라.' 하고는 창고로 걸어갔다.
그래, 그렇겠지.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 다음날, 다음날, 모레, 일주일 뒤에도 그녀가 나오지 않았다. 언제까지 안나오려고 그러나. 할아버지가 며칠 째 그냥 오셨다 갔는데. 안타까운 마음에 할아버지의 식사를 내가 챙기게 되었다. 마음 한쪽에는 걱정을 안고.
그러던 어느 날, 띠링- 하고 편의점 문이 열렸다. "어서오십시오." 하고 고개를 들었는데 순간 그녀가 온 줄 알았다. 이름을 불렀는데 울기만 하길래 무슨 일인가 하고 봤는데 그녀가 아니고 그녀와 똑 닮은 사람이었다. 무슨 종이를 건네주고는 "언니가 전해주래요. 언니가 많이 좋아했었나봐요." 하고는 다시 펑펑 우는 것이었다. 좋아'했'었다고? 기쁜 마음보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종이를 펼쳤다.
'안녕, 00아. 나야. 나 많이 미워했지. 그랬을 거야.
미안해. 나 지금 많이 아파. 예전부터 그랬어. 사실 너에게 고백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나 공부 그런거 해보지 않았어. 난 안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친구들이랑 어울려서 나쁜 짓만 하고 겨우 아르바이트 한 자리 찾아서 들어왔어. 처음에는 너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지. 근데 계속 아파왔던 배가 그 날따라 너무 아픈거야. 그래서 병원에 갔는데 1년이 남았다 그러더라. 1년 안에 뭘 할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해봤는데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부모님 볼 낯은 없고. 그래서 터덜터덜 편의점에 오는데 네가 너무 밝은 미소로 날 맞아주더라. 열심히 살고 싶었어. 너와 같은 상황에서 고민해보고 걱정해주고 싶었어. 그래서 너한테 그런 거짓말을 하게 된거야. 1년 남짓 남았다고 했는데 벌써 1년이 더 흘렀어. 기적이지. 의사 선생님도 놀랍다고 하셨어. 그런데 난 알겠더라. 얼마 안남은걸. 너한테 어떻게 말하지 하고 있는데 네가 좋아한다고 말하더라. 기뻤어. 사실 나도 너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어. 하지만 그러면 네가 나중에 슬퍼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어. 괜히 내가 널 힘들게 하면 어떡하지, 네가 그 예쁜 미소를 잃으면 어떡하지. '
이정도 읽자 눈물이 뚝뚝 쏟아졌다. 달려가고 싶었지만 참고 편지를 계속 읽었다.
'네가 이걸 읽을 때쯤이면 난 널 만날수 없게 될거야. 이거 정말 웃긴 말이긴 한데 나 너 저 위에서 지켜볼거야. 슬퍼하면 안된다. 그 미소 계속 보여줘. 내가 위에서라도 마음 놓을 수 있게. 좋아했어. 그리고 앞으로도 좋아할 거야. 좋아해, 00아.'
뛰쳐나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미 늦었다는 걸 직감으로 알았다.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동생과 택시를 타고 영안실로 출발했다. 그녀의 가족들이 있었고 나는 그 속으로 파고들어가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차가워진 모습에 다시 눈물이 났다. 네 눈동자를 한번이라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네 미소를 한번 다시 볼 수 있다면, 난 무슨 일인들 못할까. 계속 울었다.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00아, 10년이 흘렀어. 난 정말 행복해. 우리 집 앞에는 그 때 널 만났을 때와 똑같이 너를 닮은 벚꽃이 많이 피었어. 지나갈 때마다 생각해 너를. 우리 집 앞을 지나갈 때마다 널 보는 것 같아서 좋아. 어떻게 보면 봄이랑 너는 정말 많이 닮았었는데. 그래서 난 봄이 좋아. 널 볼 수 있으니까. 아직도 좋아해,00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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