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찾아 온 옛 고향. 아내와 아들과 함께 온 이 곳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어릴 적에 살던 집이었다. 어릴 때부터 살던 터라 이웃들은 아직까지도 기억해주고 있었다. 미리 마중나온 어머니는 우리 식구들을 반겼다.
"할머니!"
아들 철구가 자기 할머니가 보고 싶었는지 엄마에게 달려와 안겼다.
"어이구! 내 새끼! 어서 와라. 저녁이라도 먹을련?"
"아니요, 괜찮아요. 아까 먹고 왔어요."
"그려."
철구는 할머니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고 아내도 따라 들어가 오순도순 얘기를 나눴지만 난 곧바로 발걸음이 향한 대로 이끌려 뛰었다. 아내가 어딜 가냐고 물었지만 아내의 말은 안두에도 없이 뛰어갔다.
옥수수 밭이었다. 여전히 싱싱하게 햇볕에 잘 받아서 그러지 오늘따라 왠지 유난히 튼튼해 보였다. 날 기쁘게 해주려는 건지 이제 다 컸다고 자랑하는 건지 으쓱 어깨를 올려 치켜세운 옥수수가 듬직하게 커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흐뭇했다.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분명 이 옥수수 밭에서 슬피 우셨겠지. 그런데도 엄마 혼자서 이 많은 옥수수를 키워낸 걸 보면 아버지의 빈 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우기 위해 여전히 아빠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그랬다는 걸 안다.
문득 형이 생각났다.
아내 순정은 문 밖을 눈동자로 서성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철구 아빠가 어딜 급하게 뛰어갔을까?
순정의 말에 어머니는 갈대가 축 늘어진 채 흔들리는 입가가 쓸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들이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아직 너한테 말하지 않았나 보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는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기다 곧 말하기로 했다.
"아들이 어릴 때 남편과 같이 키우던 옥수수 밭에서 지 형하고 뛰어놀았다고 했다. 근데 내 첫 아들이 원래 몸이 약했는데 놀고 하루 지나고 그만 죽어버린 거다. 자기 때문에 그랬단 생각에 죄책감이 든 거지. 그 후로 한동안 굶고 안 먹으려 하고 옥수수 밭에만 가서 울었었다. 지금도 잊지 못한 게로군. 하긴. 어느 누가 가족 하나가 죽었는데 잊을 수 있겠나……."
"그랬었군요. 몰랐네요……. 철구 아빠도 참. 말 좀 해주지……."
남편의 가족 사진을 보았을 때 어릴 적의 남편보다 더 커 보이는 남자애가 있었는데 누구냐고 물었을 때 형이라고 알려줬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하자 이 세상엔 이미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말끝을 흐린 채 끝맺지 못하고 먼 곳만 바라보았었던 기억이 난다.
남쳔의 서재를 청소하던 중 그 앨범이 눈에 보였다. 남편 어릴 때 사진이 들어 있는 앨범을 꺼내 보았을 때 형이란 사람과 같이 찍은 사진은 정말 행복한 형제 같아 보였다. 앨범을 보고 있는데 남편이 보고 있던 앨범을 휙 채가더니 "내 앨범 함부러 보지마!"라고 말하고는 앨범을 바닥에 던지고 화내며 쫓아냈다. 나가고 살짝 열린 문틈으로 보니 남편은 내동댕이쳐진 앨범을 털고 원래 있던 서랍장에 다시 집어넣었다. 남편에게 이 앨범은 추억과 그리움이 담긴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만큼 생처도 받았을 것 같아 두 번 다시 남편의 과거 형 얘기와 앨범에 관한 말은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말해야겠다.
철구는 할머니와 엄마의 말을 다 듣고 있었다. 너무 배고파서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가서 누워 있으려고 했는데 엄마와 할머니가 우연히 아빠에 대해 얘기하는 게 들려 몰래 문에 귀를 바싹 대고 듣게 되었다.
아빠는 옥수수를 제일 좋아했다. 옥수수가 배달와 택배를 풀어 옥수수를 하나 꺼냈다.
"옥수수 먹으면 좋다! 할머니가 보내주신 거니까 우리 철구 많이많이 먹어야 한다.!"
옥수수를 보면 아빠는 항상 기분이 좋은 듯이 웃고 있었다. 아빠한테 형이 있었다는 소리는 음 들었다.
"나한테 얘기도 안 해 주다니! 아빠 실망이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철구는 이미 밖에 나갈 준비를 다 마친 상태다.
"엄마! 나 여기 동네 친구들과 놀고 올게!"
"그래, 늦지 말고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놀아."
철구는 지금 아빠가 어디에 있고 뭘 하는지 모른다. 다만 아빠가 어떤지는 알 것 같았다. 아빠는 아프다. 마음이. 마음이 아프다.
운동화 뒷 발꿈치를 두 번 탁탁 두들기고 밖으로 나갔다.
형은 나에게 있어 항상 고마운 존재였다. 너무 착하고 언제나 양보만 할 줄 아는 그런 바보 같은 형이였다. 유독 몸이 약했던 형은 밖에서 놀 때보다 집 안에 있을 때가 더 많았다. 어릴 때는 밖에서 실컷 놀고 싶었던 때라 형한테 졸라 축구, 술래잡기 하자고 말했지만 엄마가 안 된다며 형을 집 안에만 가뒀다. 애꿎은 형은 빈약한 웃음을 지으며 같이 놀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동네 친구들은 형을 잘 알지 못했다. 형이 밖으로 나온 적이 많이 없었다. 항상 애들 노는 거 구경만 해야했고 아무도 끼워주지 않았다. 다들 형처럼 될까봐 형을 피해 다녔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머릿속에서 외쳤을 뿐 그건 내 변명일 뿐이다. 형을 싫어하거나 겁내거나 무서워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우리 형 괴롭히지마!'
그러던 어느 날 바멩 가족 모두가 자던 중 형이 내 어깨를 흔들며 깨웠다.
"형……. 왜 깨워. 아직 밤이야……."
"엄마 자는 틈에 우리 나가서 놀자!"
"무슨 말이야?! 안 돼 워험해! 형은 약하잖아! 지금은 밤이라고……."
"밤이니까 더 좋은 거야. 들키지 않을 수 있잖아. 우리가 언제 또 놀 수 있을 지도 모르고……."
형의 마지막 말이 왠지 신경에 거슬렸지만 내 할을 끌며 나갔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밖에 나왔을 때는 형의 말을 듣기 잘했다고 새각했다. 밤하늘의 많은 별들을 보고 귀뚜라미가 합창하는 소리도 듣고 반딧불이가 비쳐줘 우리를 안내하고 있었다. 우리는 반딧불이를 따라 서로 마주보고 웃으며 손 잡고 뛰어갔다. 뛰다 멈춘 곳은 옥수수 밭이었다.
"바로 여기야. 엄마 아빠가 키운 옥수수 밭."
"옥수수 밭은 왜?"
"여기 앉아봐. 내가 옥수수 하모니카 노래 불러줄게."
형은 나에게 옥수수 하나를 쥐어주었다. 그리고 형은 옥수수를 하모니카 연주하듯 흉내 내어 베어 먹으며 노래를 불렀다.
우리아기 불고 노는 하모니카는 옥수수를 가지고서 만들었어요
옥수수 알 길 게 두 줄 남겨가지고 우리아기 하모니카 불고 있어요
도레미파 솔라시도 소리가 안나 도미솔도 도솔미도 말로 하지요
난 박수를 치며 형일 칭찬하고 또 칭찬했다. 형이 착한 거 말고도 다른 잘하는 게 있다는 사실이 놀랐기에. 형은 멋쩍은 듯 얼굴이 새빨개지며 수줍은 듯 앏게 미소만 지었다.
아침이 되어 일어났을 때 엄마는 형의 가녀린 앙상한 손을 잡은 채 시시컬컬 눈물만 흐르고 있었다. 난 형이 어디 아픈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자고 일어나면 곧 눈을 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형은 죽은 거였다. 싸늘한 시체가 되어 시퍼래진 형의 모습을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형은 아픈 몸인데도 불구하고 날 위해서 참아준 것이다. 어쩌면 형은 마지막으로 동생과 밖에서 뛰어놀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억지로라도 형이 밖에 나가지 않고 자게 했어야 한다. 후회와 그리움을 남기고 가버린 형을 찾아 지금도 이 옥수수 밭에서 헤매고 있었다.
"아빠!"
메아리처엄 들려오는 철구의 목소리에 형하고의 옛 추억의 연기가 바람에 날아갔다.
"철구 네가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어떻게 알고 오긴. 아빠가 옥수수 좋아하니까 여기 있다고 생각했지!"
철구는 숨을 헐떡이며 땀 범벅이 된 자기 얼굴을 손으로 닦았다. 길을 많이 헤맨 듯 했다.
우리 아들한테 칭찬 한 번 해줘야겠다.
"아빠가 어디 있는 지도 알고 대견해라."
철구가 자기 배를 문지르며 배고프다는 시늉과 함께 손가락으로 옥수수를 가리켰다.
"아빠, 나 옥수수 먹고 싶어!"
그래? 옥수수 따가지고 갈까?"
"응!"
"옥수수 따서 엄마랑 할머니랑 다같이 먹자. 옥수수 먹으면서 아빠가 옛날 이야기 들려줄게."
"정말? 어떤 이야기인데?"
"어떤 이야기냐 하면……."
바구니에 옥수수들을 담아 안고 철구와 함께 갔다.
저녁노을 진 햇살 아래의 먼 하늘에서 형이 옥수수 하모니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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