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 다르게 나를 부르는 오빌의 목소리가 개구지지 않고 따스하게 다가온다. 나는 녀석이 뭘 잘못먹었나 싶어 멀뚱히 녀석을 쳐다본다. 녀석은 저 답지않게 우물쭈물 거리며 내 시선을 회피한다. 한참을 안절부절거리더니 눈을 꾹 감고 주먹을 꾹 쥐고 소리친다.
'어, 음, 도리스! 그러니까 난!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이런 내 마음, 받아줄래?'
녀석의 부자연스러운 고백에 나는 깔깔대며 웃는다. 녀석의 얼굴이 한여름의 태양처럼 새빨갛게 익어갈 때 즈음, 그제서야 웃음을 그치고 오빌의 손을 잡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녀석은 갑작스런 접촉에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뜬다. 나는 녀석을 따라 입가에 커다란 호선을 그린다. 오빌의 부드럽고 믿음직스런 손이 내 손을 꽉 잡는 순간 나는 깨닫는다.
아, 이건 꿈이구나.
* * *
시간의 걸음 上
* * *
선실에서 한참을 꿈의 나락에 젖어 허우적거리는데,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낮잠에서 깨어난 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강 빗어내린 후 갑판으로 나가기 위해 튼튼한 판자 바닥에 발을 딛었다. 두 발을 모두 내려놓은 후 무릎을 피고 일어서자 순간 몸이 휘청였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비몽사몽한 상태인지라 흔들리는 배에서 균형을 잡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나는 위태롭게 비틀거리며 한 발짝 두 발짝 침대에서 3미터 가량 떨어져 있는 문으로 발을 떼었다. 오, 그 3미터라는 거리가 얼마나 멀고 험하게 느껴지던지! 결국 제 딴에는 조심스럽게 걸었다고 생각했던 나는 문을 열음과 동시에 싸늘한 갑판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얼얼한 통증이 온몸에 흐르자, 둔탁한 물건에 부딪힌 듯이 멍했던 머리가 말끔하게 정돈되었다. 쓰러진 채로 도리질을 몇 번 한 후 몸을 일으켰다. 서늘한 바닷바람이 내 품에 안겼다. 기분 좋은 바다 향기가 코를 간질이자 내 입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그렇게 늦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더 강한 바람을 맞이하고 싶어 뱃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뱃머리에 도달한 나는 심호흡을 하고 재빠르게 뱃머리를 기어올랐다. 용의 머리로 조각되어 있는 마거리트 호의 뱃머리는 울퉁불퉁해서 올라가기가 편했다. 나는 용의 정수리에 자리를 잡고 앉은 후 뻐근한 목을 천천히 올려 보랏빛이 섞인 하늘을 응시했다. 갈매기들이 구름이 살짝 섞인 허공에서 여유롭게 비행을 즐기고 있었다. 하늘에 걸려있는 붉은빛에 가까운 오후의 태양이 정열적인 그들을 한 층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짝을 지어 날아다니고 있는 갈매기들의 움직임을 감상하는데, 문득 오빌이 지금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오빌과 헤어진지 3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는 마거리트 호의 긴 항해가 끝나고 우리의 고향인 육지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뜻했다. 또한, 존경하는 아버지가 나를 오스틴 가문의 한 주체로써 인정해주실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마거리트 호는 며칠 뒤 항구에 다다를 것이다. 나는 그간 수고가 많았던 선원들에게 감사를 뜻하고, 항구에 배를 묶어두겠지. 배가 묶여지는 모습을 본 직후 나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억누르고 그리웠던 집을 향해 서둘러 발을 놀릴 생각이다. 그리고 내가 도착한 것을 알리기 위해, 당신의 방에서 안식을 취하고 계실 아버지께 곧장 갈 것이고, 아버지께서 방 안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시면 공손한 몸가짐으로 한 쪽 무릎을 꿇고 문안 인사를 올릴 것이다. 그 분은 그런 나를 고요히 응시하시고, 성인식 ─ 열다섯 살이 되면, 가문에서 하사한 선박에 직접 이름을 붙이고 그 배의 선장이 되어, 3년 동안의 항해를 하고 고향에 귀환하는 오스틴 가문의 성인식은 해적 가문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 을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도리스 오스틴. 성인식을 치룬 너를 이제부터 오스틴 가문의 한 주체로서 인정한다. 우리 가문에 대한 자신감과 긍지를 지니고 가문을 번창시키길 빈다.'
그리고,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휘장을 경건하고 위품있는 몸가짐으로 내게 하사시겠지 ─ 물론 내가 성인식을 무사히 마치고 귀환했을 때 해당되는 것이지만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내 마음 속은 환희와 기쁨, 즐거움이 가득 차오른다 ─ 나는 휘장을 조심스레 받아들고 아버지의 방을 나온 후, 성인식을 치루지 않은 어린애 마냥 오빌의 집으로 달음박질 칠 것이다. 오빌의 집에 도착하면 조급하게 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고 나온 녀석의 목을 와락 끌어 안아야지.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랐을 녀석에게 인사보다는 물음을 먼저 건넬 것이다.
'작별 인사 할 때, 네가 한 말. 아직, 유효한거야?'
녀석은 내게 어떤 대답을 할까?
2년 전 오빌과 작별하던 날, 그러니까 항해를 떠나기 전날도 오늘 같았다. 지나치도록 나른하고, 신비로운 일이 일어날 법한 오후. 언덕에 서식하는 잔디들의 끝은 붉은 노을에 불그스렘했고, 서늘한 바람은 칭얼대는 아기를 잠재우는 잔잔한 자장가였다. 언덕에서 오후를 즐기고 있던 나는 항해에 대한 설렘과 기대로 잔뜩 들떠있었다. 아직도 전날밤 항구에서 아버지가 보여주신 선박이 눈에 어른거렸다. 아버지가 성인식을 치루러 떠나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을 푸르른 바다가 가슴 속에 넘실거렸다. 드디어, 어릴 때부터 갈망하던 항해를 떠나게 되는구나. 눈을 감고 선장이 된 나의 모습을 그리며 한참을 행복에 겨워하고 있는데, 자박자박거리는 잔디 밟는 소리가 상상에 잠긴 나를 깨웠다. 고개를 돌려보니 소꿉친구인 오빌이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로 서 있었다. 뛰어왔는지 머리가 산발이 되어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헥헥거리는 꼴이 영 말이 아니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주려고 손을 뻗는데 녀석이 팔을 꽉 붙들었다. 당황스러울 틈도 없이 오빌이 크게 소리쳤다.
'도리! 내일 떠난다며?'
응! 나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 때는 너무 들떠서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오빌은 인상을 찌푸렸던 것 같다.
'…… 리타 말이 사실이었잖아. 아니길 바랬는데.'
오빌은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은 옆에 털썩 주저앉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오빌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져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오빌, 왜 그래?'
'뭐가.'
오빌은 눈을 감은채 대꾸했다. 쓸쓸하고 공허해 보이는 모습에 너 화나 보여, 라는 말을 차마 뱉을 수가 없었다. 녀석은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더니 얼굴에 어떤 결심을 가득 담고 내 어깨에서 머리를 떼어냈다.
'에라, 몇 년뒤에 말하려고 했는데. 그냥, 지금 말해야겠다.'
무얼 말이야? 내 물음에 오빌은 씨익 웃었다. 아, 그 표정 오랜만이였다. 개구지지만 어떤 면에서는 어른스러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녀석의 표정. 오빌이 내 이름을 불렀다.
'도리스.'
오빌이 나를 애칭인 도리, 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놀라움과 경악, 혼란으로 다가왔다. 내가 놀란 기색을 보이자 오빌은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나, 너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아. 어, 난 너를…, 아, 이게 아닌데…!"
오빌은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당시 나는 그날따라 요상한 녀석의 모습이 적응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얼떨떨하게 녀석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오빌은 말을 맺지 못한 직후부터 계속 고개를 숙인채 정지되어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녀석은 갑자기 고개를 홱 치켜들고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윽고 굳은 의지가 서린 녀석의 입술이 벌어졌다.
"도리스, 나는 오래전부터, 너를 좋아해왔어. 친구를 넘어선 감정으로, 말이야. 그러니까. 난 너를……많이 사랑해."
말을 마친 오빌은 내 표정을 조심스레 살폈다. 내가 그 때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밝은 표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진심이야! 라고 불안하게 소리치는 오빌의 모습을 보며, 그 때 내가 어떤 생각을 했었지? 아, 그래.
"도리스!"
나는 무작정 몸을 틀어 오빌에게서 도망쳤었구나. 오빌의 부름도 무시한 채. 그리고 그날 밤, 나의 성년식을 기념하는 파티에도 참석하지 않았었지. 내 침대에 누워 배게에 고개를 푹 파묻고 있었어. 오빌을 마주칠까봐. 파티가 모두 끝난 후, 부모님이 버릇없다고 야단치실 때도, 오빌을 보지 않아 다행이야, 라는 안도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다음날, 항해를 떠나기 전 뱃머리 위에 서서 마을 사람들의 축복을 받을 때, 나는 그제서야 저 멀리서 보이는 오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자신을 보기를 꺼리고 있다는 걸 알았던걸까. 오빌은 카키색 베레모를 쓰고 고개를 숙인 채 바닷가의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나무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녀석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눈 마주쳤다.
나는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어떡하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갑자기 들이닥친 우발적인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나는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안절부절거리다가 조심스레 오빌을 쳐다보았다. 오빌은 힘차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입을 벙긋거리며.
잘 갔다와.
순간 가슴이 턱 막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또 도망쳤다. 그렇게 나와 오빌의 이별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
.
.
그 때의 나는 너에 비해 성숙하지 못했다.
아직 내 감정에 무지했던 나는, 유년기의 우리의 마지막 시간을 미처 마무리짓지 못했다.
시간을 걸어 내가 너만큼의 성숙함을 가질 수 있었을 때, 내 곁에는 네가 없었다.
네가,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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