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에 흐릿하게 그림자가 비추었다. 문살 너머의 저것이 무언인지 문을 열어볼 용기는 없지만 대충 짐작 가는 것이 있긴 하다. 그건 밤마다 다양한 소리를 남기고 가는데, 짐작은 그 소리들에서 나름대로 유추한 것이다. 단서는 두가지 였다. 물이 첨벙첨벙 살결 맞대는 소리, 질퍽질퍽 진흙 밟는 소리. 오빠가 건넛마을 도깨비에게 떡을 주고 사온다던 이야기 중 물귀신의 이야기가 있었다. 자기를 질투하는 언니에게 등 떠밀려 강에 빠진 물귀신. 이 우리 방문 옆 우물으로 들어가 기생하는 게 틀림 없다고 생각한다. 더 무서운 건 그런 소리가 우리 방 건너의 예민한 엄마마저 깨우지 않고 아주 오묘하고 은밀한 방법의 소음으로 날 괴롭힌다는 거다. 다시 말해 우리 가족 중 물귀신의 존재를 인지하는 건 나뿐이란 거다.
“얘들아, 학교 가니? 민경이랑도 같이 가라.”
계단으로 내려오는 길에 아랫집 사는 민경언니를 만났다. 우리 집은 마을에서 -사실 마을이라기엔 몇 가구 안 사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집이었다. 대문 주위로 쳐진 담벼락 너머로는 이웃집들이 훤히 잘보였다. 담벽 너머로 몇 없는 또래인 민경 언니를 불러내어 학교에 함께 가곤 했다.
“그런데 글쎄 요놈이 자꾸 귀신타령을 하는 거야.”
오랜 만의 민경언니와 동행길에 신이 난 나의 신통을 깨는 덴 역시 오빠가 제 격이다. 재잘 재잘 이야기꽃 피우는 와중 뜬금없는 오빠의 말에 민경 언니 호호호 우습다는 듯 웃는다.
“요즘 세상에 귀신이 어디있니?”
나는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민경언니와 오빠의 놀림감 반찬거리 정도 되었다.
기필코 물귀신의 존재를 밝혀내어 오빠의 코를 납작하게 해줘야지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은 게 오밤중만 되면 마치 무릎반사처럼 몸이 먼저 반응해 오소소 소름돋은 몸에 이불을 씌인다는 거다. 그러니 ‘우물 옆에서 잠복’ 같은 용감한 발상은 한 켠으로 밀어두어야 했다. 나름 강구한 방안은 파리 잡는 끈끈이 였다. 찐덕 찐덕한 풀 따위를 바닥에 바르고 파리처럼 잡힐 물귀신을 아침까지 기다리면 되는 거였다. 그럼 물귀신의 존재를 증명함과 동시에 날 무시하던 이들의 항복과 사가를 받아낼 수 있을 거야 상상하며 혼자 킬킬 웃어대다 선생님께 혼이 났다. 오빠는 그 이야길 전해듣고 또 나를 놀려댔다. 나는 이가 갈렸다.
그런데,
“신발?”
“야, 요새는 귀신이 신발도 신나봐?”
“…그럼 이게 왜 있어?”
끈끈이에 걸린 건 물귀신 아닌 신데렐라가 남기고 간 구두처럼 놓여진 신발 이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유리구두와 비교해보면 형색은 보잘 것 없었다. 초라한 땜빵 자국 구석구석 나있는 고동색의, 왼쪽발의 신이었다. 나의 발에나 오빠의 발에는 맞지 않았다. 엄마에게 이러저러 해서 신발을 주웠다 말하니 엄마표정이 묘하다.
“그냥 제자리에 갔다 놓아.”
그리고 며칠 뒤 우물 옆의 신발이 사라졌다.
“감방 가봐야 정신 차리겠슈?”
아침부터 들리는 다소 격해보이는 말소리에 담벼락 너머 까치발 들고 쳐다보니, 민경언니네 엄마가 옆집 할아버지께 혼나고 있었다. 고개 푹 숙인 채였다.
“당신네 집 가난한 거 누가 몰라? 그래서 사정 봐주고 눈 감아주니까 노인네 눈 먼거 같소? 딸내미 주려 쟁여놓은 곶감까지 훔쳐?”
순간 내 눈이 멀어버린 줄 알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며 담벼락에서 물러났다. 엄마가 시끄러운 소리에 뭔일 있는 가 싶어 마루로 나왔다.
“엄마! 저번에 내가 말한 물귀신 정체 알아내었어. 민경이 언니네 엄마야! 우물 옆 신발을 신고 있었어! 말하기도 전에 엄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옆에 있던 오빠의 표정도 엄마 눈치 살피며 굳어갔다.
“물귀신 이면 마을에서 쫒아내야지!”
막냇동생만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정말 민경언니네 엄마는 마을을 떠났다. 우물 옆, 아니 고추장 간장 담겨진 장독대 옆에 있었던 자신의 신발 만큼 휑한 집터 남긴 채.
물귀신의 진짜 이야기를 알게 된 건 담벼락을 까치발 들지 않고서도 너머를 볼수 있게된 아주 오랜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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