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마마께

아바마마, 안녕하신지요. 저 덕혜입니다. 요즈음 저는 이상한 곳에 있답니다. 웬 간호사들이 제 곁을 돌아다니고 저를 곁눈질합니다. 그들은 항상 저를 가두어놓고 창밖만 보게 합니다. 아바마마, 지금 돌이켜보면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참으로 저를 사랑해주셨지요.

제가 유치원에 다녀왔을 때입니다. 그 날 저는 유치원에서 제가 쓴 시를 아버지께 낭독하였습니다. 그것을 들으시곤 아바마마께서는 제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상을 주신다는 말에 무얼 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대뜸 업어달라는 그 말. 그 말에 아바마마께서는 저를 업으시고 아주 좋아하셨답니다. 아바마마, 그거 아시는지요? 그 때 저는 아바마마의 눈물을 보았답니다. 그래서 어쩔 줄 모르다가 그 어렸을 적 했던 말 " 아바마마, 난 아바마마와 잠시만 떨어져 있어도 보고 싶다오. " 라고 한 말, 지금 그 말이 왜 그리 서럽게만 들리는지요. 그저 창밖만 보게 합니다.

어느 날이었지요. 한밤중에 잠을 자는데 꿈속에서 별안간 폭풍이 부는 것 아니겠습니까? 온몸을 휘갈기던 폭풍이 몰아가고 난 뒤 제 눈앞에 있는 것은 빠져버릴 것 같은 어둠이었습니다. 너무 무서워 잠에서 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 그 불안이 진짜가 된 걸까요. 다음날 아침 아바마마의 승하 소식이 들리더군요. 억장이 무너지는 듯 했습니다. 금방이라도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고 함께 꽃구경, 나비 구경을 다닐 것만 같은데 승하하시다니요? 어찌 제가 살겠습니까? 그러나 정말 서럽게도 살아지더군요. 어찌나 제가 밉던지.. 그 때 유모가 한 말이 저를 견디게 했습니다. " 마마, 견뎌야 하옵니다. 살아야 하옵니다. 그것이 바로 붕어하신 선왕의 뜻일 것입니다. " 멀리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제 머리와 가슴에 꽂이는데 문득 아바마마의 말이 떠올라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무얼 할런지.. 그저 창밖만 보게 합니다.

아바마마, 복순이 아시는지요? 항상 제 옆에서 저를 챙겨주는 저에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사람입니다. 복순이와의 만남은 참으로 인연인 듯합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웬 꽃잎 같은 것들이 팔랑팔랑 내려오는 게 아닙니까? 보니 징집서요, 우리 민족을 끌고가는 악한 것이라 노하여 보고 있자니 저 멀리서 여자아이 하나가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는 것이 아닙니까? 정신대에 끌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바마마, 제 성품 아시지요? 불의를 보고 참지 못 하는 이 불같음이 당장에 저를 그리로 몰았습니다. 그리고 순사와 정면으로 붙을 때 다리가 후들거리고 입이 벌려지지 않는 것이 어찌나 무섭던지. 그러나 저는 용기를 내어 그들을 쫗고 복순이를 구했습니다. 그 뒤에 복순이는 궁에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덕혜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그 궁핍한 이유로 학문을 배운다는 이유로 저는 일본에 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서럽습니다. 그 때 본 삼각산이 눈 앞에 어른거려, 그저 창밖만 보게 합니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지옥 같았습니다. 그래도 의친왕께서 저를 가여이 여겨 잘해 주신 덕에 그나마 마음의 의지를 하고 살았지요. 어느 날 그 분께서 제게 그러셨습니다. " 연꽃은 썩은 물에서도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매화는 엄동설 한중에 꽃을 피우지. " 그 말. 저는 그 말에 가슴이 벅찼답니다. 어느 날 영친왕께서 물으셨습니다. 학교생활은 재미있었냐구요. 저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저는 조선 황녀였으니까요. 그들 나름대로 지위와 위엄을 갖추고 있었지만 저를 향한 은근한 비웃음과 멸시를 숨기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루는 저를 화장실에 가두기도, 제 보온병의 물을 쏟기도 책상과 의자를 없애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저는 꿋꿋하게 행동하려 애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저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울지 않았습니다. 입술을 깨물고 이를 앙 물고 참았습니다. 저는 연꽃과 매화였기 때문에, 조선의 황녀였기에.. 그러나 지금 그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그저 창밖만 보게 합니다.

어릴 적부터, 아바마마께서 저를 시집보낸다 하셨을 땐 아주 어릴 때였는데도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어떤 사람일까, 성품은 어떠할까, 다정하시기는 할까... 그런데 저는 그 모든 두근거림들이 사라진 뒤에야 제 혼사가 들어왔습니다. 일본 사람에게로 말이지요. 저는 가슴이 미어져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저를 걱정하던 복순이가 과자와 화선지를 사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화선지에 글이 있지 않던가요. 그래 보니 저를 구하겠다는 청년들의 글이었습니다. 너무 좋아 가슴 떨며 편지를 주고받던 중 저는 청년들중 박무영이라는 자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왜일까요 저는 그를 보고 가슴 두근거림이 일어나니.. 마치 오래전 연인을 다시 만난 듯이 제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그와 만나고 잘 성사될 것 같던 계획은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어찌나 허탈하고 한스럽던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그 때 그 무영이라는 사나이, 지금은 어찌 살고 있을지... 그저 창밖만 보게 합니다.

그렇게 제 결혼 생활이 시작되었고, 그는 저에게 정말 잘 대해주었습니다. 저를 위해 첫날밤을 그대로 지나가주고 아침을 조선식으로 차려주는 등 여러가지로 저를 위했지만 저는 도저히 마음을 열 수 없었습니다. 도저히..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가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서는 들어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고는 별안간 하소연을 합니다. " 당신을 진심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나를 이해해다오. 나는 행복한 가정을 이룰 자신이 있다. 일본이든 조선이든 우리는 상관하지말자. 나부터 노력하겠다. " 이런 말들을 두서없이 떠들어 대더니 " 당신은 나의 아내요..." 라는 말과 함께 방 한가운데 푹 고꾸라지는 것이 정신을 잃을 지경으로 취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래 많은 고민 끝에 살며시 그에게 마음을 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와의 결혼생활은 행복해질 것만 같았습니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까지.. 제 아기의 이름은 정혜였습니다. 정혜는 아주 곱게 자라주었지요. 저는 정혜에게 조선말과 조선식 예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 남편은 몹시 싫어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혜가 눈치 채고 제 애비에게 재롱을 부려 간신히 화를 면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정혜는 제 딸이었으니까요 제 유일한 혈육이었기에... 그러던 어느 날 정혜가 울며 들어오더니 " 엄마, 나는 일본인이에요! " 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 순간 다리가 풀리며 주저 앉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지요. 다른 아이들의 놀림에 참지 못한 정혜는 끝끝내 정혜는 정혜를 거부했습니다. 그 뒤론 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해 매일 숲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누구와도 접촉을 끊고.. 그 때였을 겁니다. 복순이가 사라진 것이. 영친왕 댁에 일손을 도우러 가던 것이 홀연히 사라진 것입니다. 그 때부터 더더욱 저는 마음의 문을 닫고 지냈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창밖만 보게 합니다.

아바마마! 그렇게 서러운 날이 가고 슬픔의 눈물들이 아롱아롱 기쁨의 눈물로 바뀔 때가 드디어 왔었습니다. 일본의 패망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저는 도저히 웃지를 못 했습니다. 저는 또 한 번 슬픔의 눈물로 옷깃을 적셔야했습니다. 일본 패망 후 저와 같이 그를 기뻐할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딸 정혜조차도 말입니다. 어느날 정혜는 학교를 가지 않았습니다. 다락방에서 아이는 혼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혜는 엉엉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친구들이 일본의 패망이 자기같이 조선인의 피가 섞인 사람들때문이라고 놀린다고, 정작 정혜 자신은 일본의 승리를 기원했는데 아무도 몰라준다고, 그게 다 제 탓이라고 하며 펑펑 웁니다. 그 말을 보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 때부터 졍혜는 귀가시간도 늦어지고 밤늦게 남자친구들과 돌아다니다 들어오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손수 아침을 차리고 과자를 구웠습니다. 웃으며 아이에게 아침을 청하자 흔쾌히 응하더군요. 아침을 먹고 과자를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잠시 미쳤나보지요, 문득 지금 조선에 갈 수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정혜에게 수면제를 먹인 겁니다. 그런데 너무 많이 먹인 탓일까.. 정혜는 병원에 실려가버렸습니다. 남편은 그런 저에게 미쳤다며 책망을 하자 저는 더이상 살 기운이 없어 수면제를 입에 물었습니다. 아바마마 그런 저를 가엾게 보지 마시오. 잠과 죽음이 무엇이 다르리오. 눈앞이 잠기고 조용한 어둠이 저를 감싸더니... 그 때 남편이 제 입을 벌리고 아직 입안에 남아있던 약을 뱉어내게 했습니다. 그 길로 그는 저를 이곳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나아지면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하지만... 그저 창밖만 바라보게 합니다.

아바마마, 저는 어찌해야할까요. 그 옛날 아버지의 등이 그립습니다. 이 답답한 구석에서 벗어나 아버지 곁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이 옹주의 맘을 아시는 지요.

아바마마, 아바마마가 그리워 그저 창밖만 바라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