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말의 주어이면서 동시에 여운이 남는 제목이다. 평소 읽을 책을 고를 때 표지디자인을 중시하는 나는 이 책의 표지를 처음 봤을 때 디자인이 예쁘지 않은 전형적인 옛날 책 느낌이어서 별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화수업을 듣고 있는 지금은 책의 의도를 잘 표현한 표지라는 생각이 든다. 빨강, 파랑, 노랑 삼원색과 흰색으로 만들어가는 그림의 세계라고나 할까.
책을 넘기면 나오는 역자서문의 희망적인 문구가 마음에 든다. ‘그림은 절대로 타고난 재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체계적인 훈련과 노력만 있으면 누구나 잘 할 수 있다.’
나는 어린 시절, 그림 그리는 것이 나의 낙이었다. 유치원에 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쌓여있는 A4용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으니. 초등학생때도 각종 미술대회에 참가하고 미술동아리에서도 활동할 만큼 미술은 내가 제일 좋아하고 자신있는 과목이었다. ‘미술학원에도 안다닌다면서 그림을 잘 그리네. 미술에 재능이 있구나’라는 말을 들으면 자부심도 생기고 마냥 좋았었다. 하지만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부터 미술시간엔 늘 잘 그려야한다는 부담감이 생겼고 나보다 못 그린 것 같은 친구가 더 높은 실기성적을 받는 것을 보면서 미술에 흥미를 잃고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그때부터 미술은 하나도 즐거운 과목이 아니었고 입시 준비 속에서 점점 잊혀졌던 것 같다.
그랬던 내가 진주교대생이 되어 미술수업을 다시 받게 된 것은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그림을 자주 안 그려서 감도 잃고 잘하는 친구들 속에서 열등감만 생기지 않을까 했던 나의 예상과는 정반대인 수업이었다. 그림을 그릴 때 만큼은 경쟁이 없고 모두가 함께 즐거운 시간. 마치 그림을 처음 배우는 초등학생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 책의 저자 이름을 딴 일명 ‘기미꼬방식’의 힘인 것이다. 전문가만이 누릴 수 있는 재미가 아니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그림을 그린다’ 라는 것에 대한 발상을 바꿔놓은 기미꼬의 그림 그리는 법은 나에게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기미꼬는 자신의 산악부 리더 경험담을 시작으로 자연스럽게 미술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강한 리더가 미치는 악영향과 약한 사람을 기준으로 하는 리더의 영향을 비교한 것을 읽고는 가장 약한 사람의 리듬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약한 사람을 기준으로 살면 즐거운 것이 많이 있다. 공부를 잘 못하는 아이, 그림을 잘 못 그리는 아이에게 맞춰 수업을 하면 원래부터 잘 했던 아이가 더 잘했을 때보다 부족했던 아이가 그림을 잘 그릴 수 있게 되었을 때 큰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왠지 모르게 줄곧 모범생의 이미지였기 때문에 선생님에게 그다지 새롭거나 큰 기쁨을 주는 존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하긴, 내가 가르치는 입장이었어도 그랬을 것 같다. 산악부 리더 일화를 통해 나중에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서도 남들보다 부족한 아이들이 소외되지 않는 반을 가꾸어야겠다는 다짐 또한 하게 되었다.
기미꼬 방식의 뿌리는 “인간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라고 했다. 기미꼬가 찾아낸 해답은 바로 ‘누구나 그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누구나 그릴 수 있다면 인간에게 분명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하여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기미꼬방식이 탄생된 것이라고 한다. 그림을 그릴 때는 자라는 순서대로, 만들어진 순서대로, 생겨진 결에 맞춰.. 기미꼬 방식의 그림그리기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방식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 같다.
27페이지에 ‘그림을 잘 못 그리던 사람이 잘 그릴 수 있게 되어진다.’라는 말을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라는 말로 해석한 것을 보고 감탄했다. 대자연을 사랑하는 기미꼬의 마음이 느껴짐과 동시에 나는 그동안 얼마나 자연에 무관심했나 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2장부터 본격적인 기미꼬 방식이 소개된다. 첫 번째 그림의 모델은 콩나물이다. 한국화 시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콩나물을 그려보았다. 콩나물 한 개를 집어 들고 그릴생각에 책에 나온 사람들도 당황했고 나도 당황했다. 기미꼬방식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스케치할 연필과 스케치북 그리고 최소 12색 물감세트를 준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교수님께서는 스케치를 하지 않고 검정 도화지에 바로 물감을 이용해 그리라고 하셨다. ‘이게 과연 제대로 그려질까?’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렸는데 다 그린 그림을 친구 것과 비교해보니 모양은 각기 다르지만 모두 멋지고 싱싱한 콩나물을 완성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그렸던 방법이 이 책에서 저자의 말로 그대로 제시되고 있다니 신기했고 내용에 몰입이 더욱 잘 되었다.
기미꼬는 생활화니, 정물화니, 풍경화니 하는 용어에 얽매이지 않았다. 콩나물이라는 그림 자체가 하나의 생활화, 풍경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용어들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고 중요한 테마는 ‘누구나 그릴 수 있는 사물을 그린다.’이다 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몇몇의 사람만 그리는 것은 인간이 하기에는 의미 없는 것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48쪽엔 삼원색 사용을 고집하는 이유를 설명해놓았다. 삼원색만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기미꼬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필요한 도구인 물감에는 빈부의 차이가 없으면 더 즐겁지 않겠냐’고 반문한다.
초등학교 때 나는 큰 파레트와 다양한 색상의 물감을 가지고 다니시는 미술선생님이 부러웠다. 하지만 정작 선생님께서는 우리보고 세가지의 색만을 이용해서 그리라 하셨고 그 의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몰래 검은색과 살색물감을 쓰기도 했었다. 생각하는 색에 맞게 골라 쓰면 편할 것을 뭐하러 복잡하게 섞어서 그려야 하냐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삼원색과 흰색을 이용해야 그리려하는 사물의 색과 최대한 유사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물감 하나의 원색은 아무래도 밋밋하고 개성이 부족한 느낌이다.
기미꼬는 삼원색 사용을 그토록 고집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했다. 어느날 기미꼬 반의 어떤 학부모가 아들의 색맹을 걱정하며 상담을 청해왔다. 기미꼬는 그런 부모님에게 아이의 그림을 보여주며 말했다. “삼원색과 하얀색만으로 색깔을 만들면 각각 다른 색깔이 되니까 누구의 것이 기준이 되거나 누구의 것이 ‘이상하다’라고 할 수 없잖아요?” 일리 있는 말이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과학이나 예술이 있는데 그 과학이 많은 사람에게 불안을 준다면? 색맹검사라는 것이 없었으면 좋겠다. 삼원색과 하얀색만으로 그리면 색맹은 핸디캡이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색맹에게 색깔은 공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미꼬는 색맹이라는 것은 ‘개성적인 그림’을 낳기 위한 하나의 ‘개성’이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렇게 정의함으로써 힘이 되어 주었다. 이 문장에 밑줄을 치면서 사전에 실려도 될 만큼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예술이 있다. 그것에 기준을 두는 한 기미꼬는 삼원색과 하얀색을 영원히 고집할 것이다.
59페이지의 사진을 보니 한국화수업 첫 시간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신기하게도 네가지 색에서 스무가지가 넘는 예쁜 색들이 만들어졌던 즐거운 기억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그 다음장의 내용은 나의 예상을 깨는 것이었다. 제목이 ‘칭찬해 주는 것을 기다려라’였으므로 나는 당연히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에게 칭찬을 많이 해줘야 한다 라는 내용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래서 ‘그림을 못 그리는 아이는 없는데 어른이 이상하게 지도하니까 아이들이 잘 못 그리는 것이다, 그림은 형태랑 색깔 양쪽 다 있으니까 그 중에 하나만이라도 좋은 점을 찾고 칭찬해야한다, 그것이 의욕을 불러 일으킨다’고 자신감 있게 말하는 차장의 말에 나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칭찬은 더할나위 없이 중요한 것이지’ 라고 말이다. 그런데 기미꼬의 반응은 전혀 긍정적이지 않았다. 아이가 그림 그리는 것을 싫어하게 되는 것은 어른들이 칭찬을 안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기의 그림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못 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칭찬하기만 하면 아이가 기뻐한다고 생각을 한다니 너무 인간을 바보 취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이에게는 칭찬하는 것이 소중하다.’라는 말 뒤에는 ‘아이니까 어차피 객관적인 판단을 못 한다니까’라는 얕보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이 대목에서 나는 뜨끔했다. 칭찬 이면에 담긴 어두운 마음을 지금까지 무시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기미꼬도 처음에는 ‘칭찬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칭찬하고 또 칭찬하려 노력했지만 거짓된 칭찬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특히 어린아이이 작품은 잘못되었다고 하면 안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아이의 작품을 아무리 칭찬해주어도 잘못된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아이 자신도 자신의 작품이 이상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더욱 근거 없이 칭찬을 했다가는 아이들의 긍지를 죽일 수도 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대신에 왜 이상하게 됐는지, 어떻게 하면 확실하게 잘 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것이 기미꼬의 입장이었다. 실패를 위로해 주는 것보다 성공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만족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후자가 확실히 아이들을 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미술을 가르칠 때 무엇보다 ‘그린 사람이 제일 잘 안다.’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기미꼬 방식에서 주된 그림 그리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물이다. 사물과 똑같이 보이기 위해서는 정해진 기미꼬방식을 따라야 한다. 예를 들어 ‘사물을 그릴 때는 테두리를 그리면 안되고 반드시 어떤 색깔을 만든다고 하고 삼원색을 혼색해야하며 뿌리를 그릴 때는 천천히 붓을 움직여야 한다’ 등의 원칙이다. 이러한 원칙이 존재하는 한 우리들은 칭찬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다. 원칙을 지키지 않은 그림에 대해서는 칭찬을 할 필요가 없고 약속을 잘 지켜 그린 그림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칭찬을 하면 되니까 말이다.
‘칭찬해라’라고 하는 말 뒤에는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니까’라는 단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이것이야말로 아이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생각임을. 기미꼬는 마지막에 ‘괜찮다. 기미꼬방식을 지키고 그린 작품은 누구나 칭찬을 하고 싶어진다.’라며 자신의 방법에 대한 자부심을 내보였다.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멋진 사람임을 느낀다. 뜬금없지만 홋카이도 출신이라는 점이 나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작년 겨울에 홋카이도로 여행을 가보고는 그 분위기에 완전히 반했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성장한 기미꼬가 자연과 미술을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어서 큰그림, 작은그림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둘 중 무엇이 바람직할까? 대부분의 선생님은 큰 그림을 선호한다. 늘 ‘공간도 많은데 작게 그리지 말고 크게크게 그리세요’ 말했던 선생님 대사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큰 그림이 보기에도 좋고 구애됨이 없이 그린 그림이라나 뭐라나. 나도 어렸을 때는 큰 그림을 칭찬하는 어른들 때문에 자신감있게 크게 그릴 수 있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작가의 의도는 몇장 더 넘겨 보고나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앞부분에서는 작가 역시 큰그림 예찬론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헷갈렸다. 80쪽의 ‘그림엽서 만들기’ 수업일화에서 기미꼬다운 결론이 제시되었다. 구미꼬가 그린 작은 그림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반 친구들에게 기미꼬는 말했다. ‘그림의 크기는 상관없다는 것. 작은 것도 큰 것도 똑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단다. 마치 신체의 크기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아이들이 기미꼬의 마음을 이해했길 바란다.
‘그림의 가치는 그 크기와는 전혀 상관없다.’ 이것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겠다는데 왜 굳이 크기라는 기준에 끼워 맞추려 하는가. 그림이 작다면 ‘글씨를 많이 쓸 수 있는 멋진 엽서가 되네.’하고 말할 수 있고 큰그림이라도 똑같은 방법으로 양쪽을 모두 칭찬할 수 있다. 이렇게 그림엽서 만들기는 기미꼬 방식의 소중한 재산이 되었다. 한국화 시간에 하는 엽서 만들기에 이러한 깊은 뜻이 있었다니.
놀게 해도 그림은 못 그린다 라니.. 단정적인 소제목에 웃음이 나왔다. 아이들은 왜 그림을 못그릴까 라는 의문을 가졌을 때 들었던 ‘놀게 안하니까’라는 대사는 신선했다고 기미꼬는 말한다. 앞서 아이들은 왜 그리는 것을 싫어할까라는 질문에 ‘칭찬을 안하니까’ 와 상당히 비슷한 맥락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놀게 안하니까’는 뭇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생각일 것이라 짐작을 했고 기미꼬는 이러한 반응에 어이없어 할 것으로 예상해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 예상을 깨고 기미꼬는 놀게 하면 아이들이 기뻐하니까 그 기쁨이 그림으로까지 연결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교실에 토끼를 데려왔다. 결과는 실패였다. 한시간 동안 토끼와 놀게 했지만 지겨워하는 아이까지 나왔고 기대했던 그림은 여태까지의 작품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고 한다. 기미꼬는 그 결과에 실망했지만 다른 몇 개가 반에서도 적용해본 결과 ‘토끼의 털에 방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동물들을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의식적으로, 하지만 이해하고 예뻐하는 마음으로 쓰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쓰다듬어 보면서 비로소 동물의 따뜻함이나 말랑말랑한 살아있는 감촉을 느낄 수 있었고 무엇보다 귀엽다라고 절실히 느꼈다고 한다. 식물은 성장방향에 따라서 동물은 털의 방향에 맞춰서.. 이런식으로 기미꼬방식 중 한 원칙이 탄생했구나 생각하니 신기했다. 덤으로 식물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만지는 기쁨을 강조하는 사람이니 미술관에 붙어있는 ‘만지지마시오’라는 경고문이 이상하게 느껴졌을 수 밖에 없다. 이에 맞서 기미꼬는 전람회의 조각작품에 ‘어서 조각을 만져보세요’하고 붙여놓았다. 나도 가끔 미술관의 작품들을 유리너머로 만져보고 싶을 때가 있다. 이제는 만지는 방법까지 알았으니 더욱 더 만지고 싶다.
100쪽부터 이어지는 ‘서로 가르쳐서 인관관계를 넓히자’ 파트에서는 가장 많은 공감과 동시에 의문이 생겼다. 보통 사람들은 항상 인간관계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곤 한다. 책속의 기미꼬도 마찬가지고, 나도 마찬가지다. 아이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그림을 지도하지 않았다는 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기미꼬는 그림을 통하여 인간관계를 성립하라고 말한다. 원리는 대략 이렇다. 도망가면 쫓아가고 도구를 빌려주고 붓을 손에 쥐게 하고 그냥 오로지 그림을 그리게 하면 된다. 만약 그 아이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다면 그 아이는 교사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 때 교사와 아이와의 인간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말이 쉽지 현실적으로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다. 나 같아도 일단 껄끄러운 학생과는 수업이든 뭐든 다 껄끄러울 것 만 같은데. 고등학교 때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선생님에게 질문은 절대적으로 피했었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친구에게는 문제 하나를 가르쳐 주는 자체가 고역이었던 나로서는 쉽게 공감할 수 없는 말이었다. 전하는 것만으로 유쾌한 인간관계가 된다고?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보통 책을 읽으면 그 책의 작가의 말에는 거의 전적으로 동의하는 습관이 있는 나로서는 보기 드문 이 삐딱함이 그저 낯설 뿐이다. 마음을 고쳐먹고 기미꼬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본다.
기미꼬 방식의 좋은 점은 바로 ‘누구나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다’라는 것인데 기미꼬는 자신의 엄마가 계시던 시절에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유감스러워했다. 기미꼬는 엄마에게 그림을 가르치려고 노력했지만 엄마는 스스로 포기해버렸고 엄마가 돌아가신지 10년 후에야 엄마도 잘 그릴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던 것이다. 엄마가 근무하는 양로원에 그림을 가르치러 간 날, 배우기 전 불안해 하는 할머니의 사진과 콩나물 그림을 다 그린후의 다른 사람처럼 보일정도로 환하게 웃는 얼굴의 사진을 봤을 때 기미꼬의 심정을 알 것만 같다.
기미꼬 방식의 또 다른 장점은 ‘누구나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다는 것을 누구에게나 가르쳐줄 수 있다’라는 확실한 방법론이 있는 것이다. 전하는 것이 너무 복잡하거나 특별한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아니면 특별히 긴 연습기간을 요구하는 것이면 특별한 사람만이 그것의 전승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미꼬 방식은 누구나, 심지어 초등학생도 할 수 있다. 그 예로 이 책에서는 기미꼬가 초등학생에게 그 방식을 주위사람들에게 전하라는 과제를 내주고 그 과제를 실행하는 초등학생의 일화를 들려주고 있다. 남에게 가르쳐주고 그 사람이 잘 그릴 수 있게 될 때, 그 사람의 기쁨을 볼 수 있을 때, 그 기쁨은 자기가 잘 그렸을 때 이상의 기쁨일 수도 있다. 인간은 결국 사회적인 동물이다. 혼자서 히죽거리면서 좋아하는 것보다 남과 같이 기뻐해주는 편이 자신의 기쁨도 더 많아지는 것 같다. 앞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될 우리들은 특히나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
마지막 대목은 첫 대목을 읽었을 때와 달리 엄청난 공감이 되었다. 마치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말하기도 싫을 만큼 싫어하는 사람에게 그림을 가르쳐 봅시다. 인격이나 인간성은 허용할 수 없어도 그림은 칭찬해 줄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하면 최소한의 인간관계는 유지할 수 있으니까.)
예술은 인간관계를 기분 좋게 넓히기 위해서 있다. 흔히들 예술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예술은 분명히 가르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다음 세대에 전할 수 없으면 문화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을까. 나도 현재 기미꼬 방식을 배우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할 수 있어야겠다.
‘부분에 얽매이지 말고 전체를 보아라’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에게든지 한 번 이상은 들어본 말일 것이다. 상식 같이 들리는 말이지만 기미꼬는 그 반대말을 지지한다. ‘전체를 보면 정신이 흐트러져서 잘 안 된다. 부분만 보아라’고 말이다. 부분인지 전체인지 그것은 인식하는 초점의 문제, 모델에서의 거리의 문제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콩나물이나 딸기를 그릴 때도 뿌리부터, 꼭지부터 부분에 먼저 집중하면서 그렸고 점점 그 부분을 늘리고 늘려서 마침내 전체에 이르도록 했었다. 기미꼬는 전체라는 것에 대해서 아예 정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기 시작하는 부분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것인데 전체는 무엇일까? 한 개의 콩나물? 콩나물이 놓여있는 화용지까지? 화용지가 놓여있는 테이블까지? 테이블이 놓여있는 방까지는 어떨까? 방이 있는 집, 집이 있는 토지, 지구, 우주... 도대체 어디까지를 전체라고 할까 ) 작가의 생각이 너무 극단적인 것처럼 보여서 웃음이 나왔지만 어느 정도 맞는 말인 것 같다. 콩나물을 뿌리나 줄기나 콩이나 잎을 포함해서 전체라고 가정하면 뿌리는 부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콩나물의 뿌리’라고 한다면 뿌리는 그것만으로도 전체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미꼬는 기존에 있던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봐라’ 이 말을 ‘숲을 보면 나무는 안보인다’라고 멋지게 반박했다.
그림뿐만 아니라 먼저 전체 같은 것을 정하고 그 다음에 그 안을 메우는 방식은 ‘청년이여! 큰 뜻을 가져라.’ ‘목적을 가져라.’라고 계속 말해왔던 모든 학교 교육에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기미꼬도 예전에는 ‘대학교에 들어간다’ 라는 목적을 가지고 모든 생활을 거기에 맞추어 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대학교에 들어가서 알았던 것은 ‘나는 어제와 똑같은 나’라는 것이었다. 결국 깨달은 것은 ‘사는 것은 일상을 되풀이 하고 쌓아올리는 것이었구나.’ 하루하루라는 부분을 열심히 만드는 것이었다. 나 또한 책에서 권유하는 대로 혹은 어른들이 말하는 대로 고교시절에 목표를 가지고 계획을 세웠었다. 하지만 작가가 얘기한 것처럼 장밋빛 인생은 갑자기 다가오지 않았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오늘을 충실히 사는 것이 답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기미꼬 방식의 그림그리기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방식, 즉 인생철학을 얘기하는 것 같다.
뒷장에 ‘마음을 소중하게 여기지 마라’ 라는 제목이 나온다. ‘뭐 이리 부정적이야?’ 하고 단정 짓기보다 작가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마음을 소중하게 여기자.’, ‘감동을 표현하자.’ ‘그림은 마음으로 그리는 것’ 이러한 목표는 그림을 잘 못 그리는 사람을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없는 사람’, ‘감동이 없는 사람’이라고 결정짓고 있다. 기미꼬는 교육서를 읽을 때 항상 그 문장 중에 ‘아이’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바꿔서 읽는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아름다운 말의 마술에 속지 않는 경우가 많아지니까. 예로 ‘아이의 마음을 소중히 여기자’는 곧 ‘사람의 마음을 소중하게 여기자’라는 말이 된다. 아이를 내세워 무작정 긍정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어른들의 심리, 거짓말이 눈에 훤히 보인다고. 소름이 돋았다.
기미꼬 방식에서는 기본적으로 밑그림을 그리라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그려왔던 그림을 보면 하나같이 다 스케치를 한 흔적이 보인다. 거의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스케치는 당연한 첫 번째 순서였던 것이다. 지금은 밑그림을 안 그리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만약 초등학생에게 스케치하지 말라고 하면 그게 무슨 말도 안돼는 말이냐며 오히려 나를 우습게 생각할 것 같기도 하다.
입체를 표현할 때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빛과 그림자를 쫓는 일이었다. 밝은 부분에는 하얀 물감을 섞고, 어두운 부분에는 까만 물감을 섞는 것이다. 하지만 기미꼬는 빛과 그림자, 윤곽선으로만 물건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러 가지의 색을 가지고 거기에 빛을 받아서 그림자가 생기는 것이다.
밝다 어둡다 라는 ‘빛의 말’ 대신에 색깔이 어떻게 다른지 부분을 보며 그 색깔의 변화를 그려가며 입체감을 표현할 때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게 되면 연필로 하는 뎃생 연습은 불필요하게 된다고 한다. 이것을 아이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려면 내가 먼저 경험을 통해 원리를 확실히 깨달아야겠다고 느꼈다.
소방서의 그림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사생대회가 끝나고 기미꼬는 출품작을 골라야 했다. 여기서 책을 읽었다면 맞출 법한 퀴즈! 기미꼬는 고를 수 있었을까? 물론 아니었다. 작품마다 다 좋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곤란해진 기미꼬는 교감선생님에게 문의했다. 교감선생님께서는 그림을 훑어보시고는 이것은 이래서 안되고 저것은 저래서 상을 못 받는다고, 즉 상을 받을 수 있는 구도가 없어서 불안해하셨다. 그리는 사람의 기쁨에 관해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교감선생님의 상태를 보고 기미꼬는 안타까워했다. 문득 초등학교 4학년 때 정물화, 풍경화 그리기 대회에 학교대표로 나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꽃병, 과일 등을 앞에 두고 스케치북에 채워나갔을 때의 긴장감과 분위기는 작년 수능을 볼 때의 그것과 같았다. 학교대표라는 부담감을 안고 어떻게 그려야 입상을 할까 그런 생각 뿐이어서 그릴 때의 기쁨이라곤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기미꼬 방식에서 주어지는 모델은 그릴 수 있게 되겠지만 자기가 그리고 싶은 테마도 그릴 수 있어요?” 당연한 것 아닌가. 콩나물을 그린 뒤에 당근을 그리고 싶으면 그리면 되고 사과를 그리고 싶으면 그리면 된다. 기미꼬 방식에서는 ‘그리는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는 기술’과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인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소재와 그 소재의 순서’를 동시에 중시해 왔다. 고로 이미 ‘자기만의 테마’를 발견한 사람이 있으면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했다. 실제로 프로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에서도 기술은 있지만 뭘 그리면 되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 수만큼의 각각 다른 테마가 존재한다. 기미꼬는 책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테마를 소개했다. 여기서 얻은 교훈은 그림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삶 전반에서 자신만의테마를 찾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테마는 무엇일까? 지금으로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인데 선생님이 되고나서는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다.
‘누구나 잘 그릴 수 있게 되면 누가 곤란해질까?’ 파트에서는 현재 교육의 평가방식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 학생의 성적을 1점에서 5점까지 고르게 매기라는 학교의 방침을 무시하고 기미꼬는 대부분의 학생에게 4점이나 5점을 주었다. 누가보아도 다들 잘 그렸으니까 말이다. 성적표에 대한 직원회의가 열렸을 때 기미꼬는 용기를 내어 자기 생각을 전달했다. 교사의 역할은 잘 못하는 아이를 잘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냐. 모두 5점으로 이끄는 것이 교사의 일이 아니냐. 그것을 위해서 교사들이 밤낮으로 애를 쓰는 것이 아니냐.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5단계 상대평가 제도가 한 순간에 무너지지는 않을 터였다. 기미꼬는 대신에 Best 10과 자기평가의 방법을 도입했다. 모두가 자신의 작품을 전시해 놓고 좋다고 생각하는 작품에 투표를 해서 결정하는 학생 모두가 참가하는 일종의 상대평가인 셈이었다. 나는 솔직히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가끔 사용했던 이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친구들이 고른 작품을 보면 절대로 그들이 엉성하게 고른 것이 아니라, 진짜 인정할 만큼 잘한 작품을 고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불공평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어떤 아이가 자기평가로 2점을 기입했다. 당연히 그 학부모는 화가 났을 것이고 교사에게 따지려 했지만 오히려 아이가 막아서서 평가라는 것에 대해 진지한 설교를 했다고 했다. 이에 학부모는 반성을 하고 교사에게 감사했다는 것. 영화에서 나올 법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일을 실제로 경험했던 기미꼬는 얼마나 뿌듯했을까.
누구나 잘 그릴 수 있게 되면 누가 곤란해질까? 라는 질문에 책을 읽기 전에는 어리석게도 ‘학생이나 평가를 해야하는 선생님이겠지’라는 답을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누구나 잘 그릴 수 있게 되면 그야말로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는가?
마지막 소제목은 바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이다. 나는 이렇게 제목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그대로 다시 제시되는 점이 참 마음에 든다. 책을 읽으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상기시켜주니 말이다.
나이, 직업에 관계없이 연습을 하지 않고도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생기면 그때부터 바로 기미꼬 방식으로 그려서 그림을 잘 그릴 수 있게된다. 그 후에는 인생이 달라진다. 그런 사람이 앞으로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내 경우는 인생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지금까지의 미술에 대한 생각을 바꿔놓았다. 기미꼬 방식은 단순히 여태까지 했던 방법과 반대로 발상하는 것이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그림은 결정된 크기 안에 그리는 것’, ‘많은 물감’ 이것들을 그냥 반대로 한다는 것이다. 그럴 뿐인데도 결과는 최상이었다. 만약 한국화 수업시간에 기미꼬 방식이 아닌 초중고 시절 그렸던 수준의 그림을 그려야 했다면 스트레스만 쌓였을 것 같다.
기미꼬 방식을 처음 접할 때는 솔직히 별거 없어보여서 의심을 했는데 매주 거듭할수록 미술시간에 집중하고 즐기고 스스로 만족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순수하게 그림을 좋아했던 예전 모습을 되찾았다고나 할까.
예비교사로서 훗날 아이들이 미술을 두려워하지 않고 놀이처럼 즐길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 “나는 그림을 좋아해요”라는 말을 듣는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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