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누군가와 맞설 때, 더군다나 집단의 왕처럼 군림하는 사람에게 맞선다는 건. 하지만 어릴 때는 악당을 통쾌하게 무찌르는 주인공의 모습만 봐와서 그런지 한병태가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왜 엄석대에게 강인하게 맞설 수 없는지, 반학생들은 엄석대에게 작은 저항조차 시도하지 않는지.
그렇지만 스무살이 되어 다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읽어봤을 때, 영웅이 되지 못한 한병태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하는 것에 나아가서 나도 한병태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 되기도 했다.
한병태가 서울에 오고 나서 자기 나름대로 필사의 저항을 할 때 그에게는 분명한 신념이 있었다. 그래서 물을 떠오라는 엄석대의 명령에 저항하고 학급의 최고 권력인 선생님께 엄석대의 비행을 고발하며 애썼다. 하지만 병태의 말에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내게 달려오기 전에 아이들부터 먼저 네 편으로 돌려놨어야 했다고, 나는 반 아이들 모두의 지지를 받고 있는 석대를 지지할 수 밖에 없다, 아이들의 그 지지란 것이 실상은 석대의 위협이나 속임수에 넘어간 거짓일지라도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석대의 힘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생님께서도 엄석대를 전적으로 깨끗한 반장이라고 신뢰하진 않았지만 위협도 학급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눈 감아주신 모양인 셈이다. 나는 선생님의 태도를 보고 또 한병태가 점점 엄석대의 달콤한 꼬임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 과연 이 학급이, 작은 사회가 변할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걸까? 하고 생각했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심부름을 시키지만 한병태는 옆에서 같이 얘기를 하게 하며 쉬게 하는 등의 특권을 주며, 차별되었다는 느낌과 상위에 있다는 느낌을 주는 엄석대의 행동에 넘어가지 않을 친구가 있을까?
의외로 변수는 새로운 담임선생님의 등장 이었다. 새로운 담임선생님은 예전 담임선생님과 달리 잘못된 방법으로 유지되는 학급을 가만히 두고 못 보았다. 엄석대의 시험지에서 다른 아이들이 이름을 쓴 흔적을 발견하고선 선생님은 분노하며 잘못을 꼬집었다. 그리고 엄석대의 다른 잘못들을 아이들에게 꼬집게 했는데 예전 학급에선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봇물처럼 쏟아나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한병태는 ‘저는 잘 모릅니다.’ 하고 대답했다. 왜? 이유는 다음장에 나와있었다. 진심과 오기가 반반 섞인 말. 첫 학기에는 엄석대의 보이지 않는 손에 저항했고 다른 절반은 엄석대의 한 팔처럼 되었기 때문에 불의가 존재한다는 막연한 느낌 뿐고, 오기에 관해서는 석대에 관해서 쓸개라도 내어줄 듯 굴다 돌변하는 아이들의 태도에서 였다.
석대를 비난하는 아이들은 두 분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석대의 총애를 받길 원했으나 끝내 실패한 부류였고 다른 부류는 석대의 곁에 붙어 숱한 나쁜 짓을 하던 부류였다. 석대가 반을 장악하고 있을 땐 겁이 나 말하지 못했을 수 있던 건 이해한다. 이것도 비겁의 한 종류지만 위험부담을 가지면서까지 나서기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석대의 곁에서 부하처럼 굴고 특권을 가지길 원하면서도 속에서는 엄석대가 꺾이길 바라며 말이나 행동 하나 실천하지 못한 아이들은 비겁하다. 하지만 가장 비겁한 건 나인게, 모두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거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읽으며 사람의 미세한 감정을 굉장히 잘 잡아냈다는 걸 느꼈다. 아무리 명예나 권력에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모두에게나 일말에 권력욕이 있음을, 그래서 비겁하다고 욕하지만 나에게도 같은 상황이 오면 굴복할 수 밖에 없음을 느끼게 해준다. 석대의 곁에서 남들과 다른 특권을 누릴 수 있다면 그런 생활도 나쁘진 않지 않을까, 하고 순간적이나마 생각한 것을 보면.
새로운 선생님의 활약으로 석대의 길고도 짧은 세상이 끝나고 그 후로는 모든 걸 투표로 결정했는데 당연히 혼란스러운 점이 많았다. 그야말로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바뀌는 길이었다.
한병태가 어른이 되어서 엄석대와 다시 재회를 했을때, ‘우리들의 석대는 그렇게 작아서는 안되었다. 또 우리들의 석대는 그렇게 쉽게 그의 힘과 성공이 눈에 띄어서도 안되었다. 보다 은밀하고 깊은 곳에 숨어 지금의 이 반을 주물러대고 있어야 했고, 그래서 내가 자유와 합리의 기억을 포기하기만 하면 다시 그의 곁에 불러 앉혀 주어야 했다.’ 병태가 생각한 석대의 이미지는 이러했나 보다. 석대를 만난 그날 밤 병태가 눈물까지 흘린 이유를 본인도 몰랐을 때 나는 병태가 새롭게 느껴졌다.
HOM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