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 먼지 진드기에 물려 혹독하게 앓고 건강을 회복하고 나니 머리에 통증 없이, 얼굴에 열꽃이 피는 일 없이 걸음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일상적 리듬을 찾아 자신이 추구하는 일에 매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상은 축복처럼 여겨진다. 2010년 타계한 작가를 그리워하는 이들은 그녀가 남긴 산문집 <<세상에 예쁜 것>>을 통해 그리움의 깊이를 달래며 미처 일깨우지 못했던 작가의 삶의 편린들 속에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어머니는 자기 철학이 뚜렷한 실천가로 중농 정도의 농사를 건사하며 주경야독을 생활신조로 삼던 아버지가 복막염으로 이승을 떠나자 서울로 남매를 데리고 나가 공부를 시키겠다고 선언한 뒤 짐을 꾸려 거처를 옮겼다. 전근대적인 인습과 병 치료에 대한 무지로 남편을 잃었다고 여긴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자식들 학비를 벌면서도 교육열에 끈을 놓지 않았다. 딸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던 어머니는 주소를 허위로 신고하여 도심에 있는 학교로 딸을 진학시키고 훗날 딸이 남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길 바라며 평등한 자식 사랑을 쏟아 부었다.
시골에서 자연과 더불어 지내는 동안 상상력을 키워왔던 작가는 서울 학교에서 박노갑 선생님을 만나 문학적 감성을 키우며 표현하는 가운데 자연스레 국문학과 진학을 결정하였다. 여고를 졸업하고 청춘 시절의 자유와 정열을 채 맛보기도 전에 6・25전쟁이 발발하여 꿈에 그리던 대학 생활은 접어야했다. 전쟁은 단란했던 가족의 행복을 앗아갔고 친족이 전사(戰死)하여 실질적인 가장으로 생계를 전담해야 하는 이들이 늘어나 결핍은 우울함을 낳았지만 그저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기고 견디어 온 살아남은 자들의 아픔이 곳곳에 묻어난다. 5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숭동 소재의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할 꿈에 부풀어 오른 작가 차마 못 볼 것을 보게 하고 견디기 어려운 경험을 하게 한 잔혹한 전쟁은 작가만의 무늬를 짜기 시작하려는 찰나 날카롭고도 잔인한 칼로 인생의 피륙을 잘려나간 버린 일은 작품 속에서도 형상화되어 드러난다.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꿈이 물거품으로 화하였을 때도 작가는 세상을 원망하기보다는 좋은 것을 좋다고 느낄 수 있는 감수성과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하고 고뇌할 수 있는 정신력을 견지하며 살 수 있는 바탕을 이뤘다고 토로하였다. 좌절하고 체념하며 푸념을 늘어놓기보다는 참혹한 경험을 작품 속에 융해시킨 작가의 철학이 가슴 속을 울린다.
늙으면 입맛이 U턴을 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나이 들어갈수록 인공적인 틀을 벗어나 자연적인 흐름에 순응하는 삶을 꿈꾸며 전원생활을 동경하는 이들이 늘어난다.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흙을 만질 수 있는 집에서 살아온 작가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피어나는 꽃들을 보면서 시절 인연을 떠올리고 생명력의 충일함을 전했다. 눈이 와야 생명을 발산하는 노란 복수꽃이 마당에 피어난 것을 보고 자연적 질서 내에 자신이 존재하는 기쁨을 토로하며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고 방송국으로 향하는 이에게 쓴 편지는 동생을 먼저 떠나보낸 이의 상실감을 덜어주고 싶은 바람이 커 보인다. 현대사적 비극으로 상실의 아픔이 컸던 작가가 1988년 남편과 아들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두문불출하며 몸 속 진액이 빠져나가 몸을 추스르기 힘들 정도로 피폐해졌다. 슬하의 자식을 먼저 떠난 보내고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의 고통을 떠안고 살아야 했던 작가는 참혹한 일을 겪으면서도 그저 견디어 냈을 뿐이었다는 글에서는 충격 받을 일 없이 평화롭고 고요하게 살고 싶은 소망을 자연 속에서 찾으며 아픔을 치유하여 왔는지도 모른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이야기다.’
라 말한 것처럼 어려서부터 이야기를 구성진 언어에 담아 감흥을 더하여 전해 준 할머니와 어머니의 말하기는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하였고 방학 때마다 찾은 시골은 자연적 풍광이 빚은 물상의 변화에 감성을 길러줬다. 작가를 꿈꾸는 어린이의 질문에 답하며 공부, 독서, 나이에 걸맞은 경험을 소홀히 하지 말고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며 관심을 가지며 사물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하는 세심한 조언은 자애로운 할머니가 전해주는 금언처럼 들린다. 무엇보다 좋은 글을 많이 읽어 감수성이 무뎌지는 것을 막고 평범한 문장보다는 정제된 좋은 문장으로 표현하기 위해 며칠을 고민하며 글을 쓰는 열정적인 작가는 문학 외의 예술 분야에도 애정을 갖고 자주 접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살아온 횟수가 누적될수록 지인들을 떠나보내는 일이 잦아진다. 가까운 혈육에서부터 정신적 가르침을 전하는 스승, 오랜 시간을 공유하며 추억하는 공간이 비슷한 친구 등을 보내는 영결식은 헛헛함이 더하다. 식도락 남편을 떠나보낸 지 20년이 지나 그와 함께 하였던 추억의 공간을 찾았을 때 남편이 즐겨 찾던 음식을 먹고 체하고 말았는데 시간이 더 많이 흘러 그 음식을 달게 먹을 수 있었던 점을 알아차린 작가는 시간이 해결하지 못할 악운과 재앙은 없다는 점에 착안하였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친구를 문병한 곳에서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아기의 생명력은 임종의 자리에도 희망을 불어넣는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는 소중한 경험은 마음을 가볍게 한다. 시절 인연에 따라 피고 지는 꽃들처럼 생명이 다한 자리에서 움트는 생명의 불씨처럼 여유를 품고 살아 갈 일이다. 영면(永眠)한 이들을 불러내 추모하는 글은 지독한 자기 관리로 자신에게는 엄격하였고, 타인에게는 관대하였던 이들의 아름다운 삶의 풍경은 사람들을 넌지시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의 가치를 일깨운다.
돌연한 교통사고로 생때같은 아들을 떠나보내고 얻은 외손녀의 탄생은 황폐화된 인생길에 정을 붙이고 살아갈 힘을 줬다는 작가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매일 누군가와 이별하며 살아가는 삶에 그리움 너머 존재하는 이들과의 교류도 끊어질 수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아름다운 시절은 그것을 채 누리기도 전에 사라져 버릴 수 있기에 집중할 수 있을 때 집중하고 그것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적절히 이완하며 살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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