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새싹이 땅구멍 사이로 툭 튀어오르던 때가 언제인지, 벌써 나뭇잎이 붉은 빛을 띄는 가을이 다가왔다. 시간은 느리면서도 빠르게 흘러간다고 하던데, 그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요즘엔 너무 빨리 가는 것 같기도 하다. 독서 좀 하려고 하니 한파가 몰려오지 않는가. 참 난감하다. 무릎 시린데 어떻게 책을 읽으란 것인지. 하지만 월로 치면 아직 시월이니 독서의 계절, 가을이긴 하다. 또, 아직 완전히 앙상하게 마른 나무들이 그득한 건 아니잖아? 사람은 어쨌거나 저쨌거나 긍정적이고 밝은 사고를 갖고 살아야 한다니까. 내가 밝고 긍정적인 건 아니나 그렇다고 어두침침한 사람은 더 아니야. 그래서 더 권하고 싶은 말, 긍정적이고 밝은 사고를 갖으라.
단풍잎은 나에게 초등학교 5학년 때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동영상 같은 존재다. 동영상은 갖고 있으면 언제든지 재생버튼을 눌러 다시 볼 수 있지 않은가. 단풍 드는 건 가을이 되면 꼭 거쳐야 할 필수 요소다. 비로소 단풍이 들게 되면, 나는 5학년 때 추억을 곱씹어본다. 선생님과, 나와, 내 친구 한 명이 함께였던 그 때를.
꼭 이맘때 즈음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모두 하교를 할 시간인데도 나는 하교를 하지 않고 꼭 4시나 5시가 되어서야 하교를 했었다. 선생님과의 추억을 많이 쌓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학기 초, 첫인상이 무척 좋은 분이셨고, 첫인상 만큼이나 반 아이들에게 친절히 대해주셨다. 가끔 속을 썩이게 될 때 화를 내시다가도 좋게 타이르셨던. 나는 그런 선생님이 무척 좋았다. 그래서 일부러 한 친구와 늘 교실에 남아있었다. 선생님이 의자에 앉아 일을 처리하고 계시면 아이들 책상 서랍을 뒤져 만화책을 꺼내 보고, 교무회의를 가시면 칠판에 한가득 낙서를 채워놓고 선생님 오시기 전 도망치듯 학교를 빠져나가기도 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내가 그 선생님과의 추억이 많은 건 분명하다.
한 날은 선생님이 나와 내 친구를 불러 권유를 하셨다.
“이번 주 주말에 너랑 수진이랑 시간 되니?”
“주말 말입니까?”
“어, 선생님 모임인데, 가면 재밌을 거다.”
“가겠습니다! 갈 겁니다! 너도 갈거지, 수진아?”
“어, 뭐…….”
“아싸, 그럼 이번 주 토요일에 학교 주차장에 있으면 됩니까?”
“어, 그래. 수진이랑 같이 있어.”
이제, 나의 동영상이 재생된다.
선생님과 만난 나와 나의 친구 수진은 선생님 차에 올라탔다. 모든 것이 두근거렸고, 한 편으로는 감동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 중 유일하게 나와 내 친구가 선생님 모임에 같이 가는 것이라 자랑스러웠다.
차가 출발하였다. 친구 수진과 한참을 떠들다가 문득 심심해져 창 밖을 내다보았다. 거리의 나무들은 물기가 다 빠져 말라버린 나뭇잎들이 다 떨어져 수북히 쌓여 있거나 아직 단풍이 든 나뭇잎이 파들파들 떨며 나뭇가지를 힘겹게 붙잡고 있었다. 마침 선생님은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더니 배고프지 않냐고 물으셨다. 사실 배가 조금 출출했던 우리는 배고프다고 말하였고 그 길로 불고기버거를 사먹었다. 선생님은 친절하게도 콜라와 감자튀김까지 들어있는 세트를 사주셨다. 나는 버거 세트를 먹는 것에 감동 먹었다. 원래 사소한 것에 좀 많이 감동받는 스타일인 나에게 버거 세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에서 우리는 복도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미니 폴라로이드 사진기에 주황색 점퍼를 입고 있는 나와 선생님, 그리고 친구가 예쁘게 찍혔다. 그 곳에서 선생님은 학교 안의 교사가 아닌 학교 밖의 ‘아저씨’가 되었다. 삼촌이라고 하기엔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그냥 옆 집 철수네 아저씨 같은 느낌. 우리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이 모여 파격적인 걸그룹의 댄스를 추기도 하셨고, 갑작스럽게 교회를 다니라는 종교적인 발언도 서슴치 않으셨다. 선생님의 발언에 종교가 같은 선생님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눈치를 챈 나는 그 와중에 뿌듯해하며 난 눈치있는 여자라고 몇 번을 속으로 외쳐대었는지.
끝났을 땐 무척 피곤했다. 선생님이 나와 내 친구를 바래다 주시고, 나는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눈꺼풀이 스르륵 내려앉는 것이 금방이라도 길거리에서 잠을 잘 것만 같았다. 내 몸이 아닌 것 같았다. 무거운 짐을 질질 끌듯 무거운 내 몸을 질질 끌어 집 앞에 도착했다. 열쇠로 문을 열고 거실로 기어들어가 그 상태로 잠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단풍은, 생명이 꺼져감을 알려주는 슬픈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초등학교 5학년, 그 때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 준다. 태엽을 돌리면 오르골이 돌아가며 계속 맑은 소리를 내는 것처럼, 단풍은 내 머릿속의 태엽을 돌려서…….
선생님은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서 다른 초등학교로 전근하셨고, 그 사이에 이 년이 흘렀다. 점점 선생님을 찾아가는 것에 힘겨움을 느낀다. 학교는 늘 의무 방과후로 다른 학교보다 늦게 마치고, 영재학급 수업을 듣는다고 5시 넘어 마친 적도 꽤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번엔 시간을 꼭 내어 선생님 얼굴 한 번 보아야지. 날 이렇게 성장하게 만들어주신 장본인, 고맙습니다.
단풍, 너는 날씨가 쌀쌀해짐과 동시에 한 잎 두 잎씩 떨어져 나가는데,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까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준 존재는 늘 이맘 때 사라진다.
나에게 단풍이 드는 것이란……, 선생님과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오르골, 혹은 동영상 재생 버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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