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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나무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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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김성호 옮김
제4막
<전략>
라네프스카야 : 자, 이젠 떠날 수 있겠다. 실은 떠나는 데 있어 두 가지 일이 걸리는군요. 하나는 병든 피르스. (시계를 들여다보고) 아직 5분쯤 괜찮겠군.
아 냐 : 엄마, 피르스는 벌써 병원에 보냈어요. 야샤가 오늘 아침에 보냈어요.
라네프스카야 : 또 한 가지 걱정은 바랴여요. 그 앤 아침 일찍 일어나 일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지금은 일이 없어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난 거나 다름없어요. 마르고 안색이 좋지 않고, 가엷게도 울고만 있어요. (사이) 당신은 그걸 잘 아시잖아요. 예르몰라이 알렉세예비치. 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애를 당신에게 시집 보냈으면 하고 말이죠. 게다가 당신 쪽에서도 보아 하니 결혼하실 듯한 눈치더군요. (아냐에게 귀띔을 한다. 아냐는 샤를로따에게 끄덕여 보이고 두 사람 퇴장) 그 앤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당신도 그 애가 싫지는 않은 것 같은데 모르겠군요. 아무래도 모르겠어요. 어째서 당신 두 사람은 서로 피하려고만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어요!
로파힌 : 실은 나 자신도 모르겠습니다. 그 뭔가 어쩐지 이상하게 어색한 것 같아서 말이죠 ……. 아직 시간 여유가 있다면 전 당장에라도 좋습니다. 단숨에 결말을 짓고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당신이 안 계시면 아무래도 전 구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군요.
라네프스카야 : 그럼 다행이로군요. 1분이면 충분할 테니, 곧 그 애를 부르기로 합시다.
로파힌 : 마침 샴페인도 있습니다. (작은 글라스를 들어 보고) 아니, 누가 벌써 다 마셔 버렸지. (야샤, 헛기침을 한다.) 퍼 마신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야 …….
라네프스카야 : (기쁜 듯이) 잘 됐군. 우리 저쪽으로 ……. 야샤, 이리 와! 이제 부를 테니까요. (문을 향해) 바랴, 그건 놔 두고 이리 와요. 자, 빨리! (야샤와 함께 퇴장)
로파힌 : (시계를 들여다보고) 옳지 ……. (사이)
문 저쪽에서 킥킥거리는 웃음 소리. 속삭임. 이윽고 바랴 등장
바 랴 : (오랫동안 이것저것 짐을 살핀다.) 이상하군, 아무 데도 보이지가 않으니.
로파힌 : 뭐가 없어졌습니까?
바 랴 : 내가 챙겼는데도 생각이 안 나는군요. (사이)
로파힌 : 앞으로 어떡하시겠습니까, 바르바라 미하일로브나?
바 라 : 저 말인가요? 라굴린 댁으로 갈 겁니다 ……. 그 댁의 살림을 돌보기로 했어요 ……. 가정부라고나 할까요?
로파힌 : 그럼 야쉬네보 마을이군요? 70킬로나 될 걸요. (사이) 그럼 이 집에서의 생활도 마지막이 되겠군요…….
바 랴 : (집을 둘러보면서) 어딜 갔을까, 그게 ……. 어쩌면 궤짝 속에 넣어 두었는지도 몰라 ……. 네, 이 집에서의 생활도 마지막이어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로파힌 : 난 지금부터 곧 하르꼬프로 갑니다. 같은 기차로 말입니다. 일이 많아서죠. 이 집에는 예피호도프를 놓아 두기로 했습니다 ……. 그 사람을 고용했어요.
바 랴 : 네, 그래요!
로파힌 : 작년 이맘 때는 벌써 눈이 왔었죠.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런데 지금은 따스하고 해가 빛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춥긴 춥군요. 영하 3도쯤 되겠어요.
바 랴 : 전 보지 못했어요. (사이) 게다가 우리 집 온도계는 고장이 나서……. (사이)
집 밖의 목소리 : (문 곁에서) 예르몰라이 알렉세예비치!
로파힌 : (벌써부터 이 소리를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음! 이제 곧 간다! (서둘러 퇴장)
바랴는 마룻바닥에 앉아 옷보따리에 머리를 파묻고 조용히 흐느껴 운다. 문이 열리고 조용히 라네프스카야 부인이 들어온다.
라네프스카야 : 어떻게 됐니? (사이) 이젠 가야지.
바 랴 : (이미 눈물을 그치고, 눈을 닦는다) 네, 시간이 됐어요, 어머니. 전 오늘 중으로 라굴린 댁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기차만 놓치지 않는다면.
라네프스카야 : (문 쪽을 향해) 아냐, 준비는 다 됐니?
아냐는 좀 늦게, 가예프, 샤를로따 등장. 가예프는 모자가 달린 따뜻한 외투를 입고 있다. 하인들과 마부들 모인다. 예피호도프는 집 시중을 든다.
라네프스카야 : 자, 이젠 떠날 수 있겠구나.
아 냐 : (기쁜 듯이) 출발!
가예프 : 친애하는 여러분! 경애해 마지않는 친구 여러분! 이제 영원히 이 집을 떠남에 즈음하여, 어찌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별을 위해 지금 나의 온몸을 차지하고 있는 이 감개를 어찌 터놓고 말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아 냐 : (애원하듯이) 아저씨!
바 랴 : 아저씨, 그만 두시라니까요!
가예프 : 빈 쿠션으로 노랑 공을 한 가운데로, 그만 두자…….
트로피모프, 이어 로파힌 등장
트로피모프 : 아직 준비가 덜 됐습니까, 여러분. 이제 출발할 시간이어요!
로파힌 : 예피호도프, 내 외투!
라네프스카야 : 잠깐만 더 앉아 보자. 난 마치 여태까지 한 번도 이 집의 벽이 어떻게 생겼는지, 천장이 어떤지 본 일이 없는 것 같아. 이제야 겨우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고 말할 수 없이 정다운 기분으로 모든 걸 바라보고 있지 뭐야.
가예프 :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만, 내가 여섯 살이었을 때, 성령 강림 주일에 이 창문에 걸터앉아 교회에 가시는 아버지를 보던 일이 꼭 어제만 같아.
라네프스카야 : 짐을 모두 가지고 나왔어요?
로파힌 : 그럭저럭 다 나온 것 같습니다. (외투를 입으면서 예피호도프에게) 알았나, 예피호도프, 잘 부탁한다.
예피호도프 : (목쉰 소리로) 염려 마시고 잘 다녀오십시오.
로파힌 : 도대체 목소리가 왜 그래?
예피호도프 : 지금 물을 마시다가 뭔가 삼켜 버린 모양입니다.
야 샤 : (멸시하는 듯이) 바보 같은 자식!
라네프스카야 : 우리가 가 버리면 여긴 아무도 남지 않는군.
로파힌 : 봄이 올 때까지죠.
바 랴 : (보따리에서 파라솔을 빼낸다. 마치 휘두르는 것 같은 자세가 된다. 로파힌 깜짝 놀라는 몸짓) 어어, 왜 그러셔요? 전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트로피모프 : 여러분, 자, 타십시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어요! 이제 곧 기차가 옵니다!
바 랴 : 뻬짜, 여기 있어요, 당신의 덧신. 손가방 옆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하지만 어쩌면 이렇게 더럽고 낡았을까!
트로피모프 : (덧신을 신으면서) 자, 가십시다, 여러분.
가예프 : (눈물을 글썽이며 어쩔 줄 몰라한다.) 기차가 저, 정거장이……. 비틀어서 한 가운데로, 흰 공을 빈 쿠션에 구석으로…….
라네프스카야 : 가십시다!
로파힌 : 모두 여기 계시죠? 저긴 아무도 없는 거죠? (왼쪽 문에 자물쇠를 채운다.)
여긴 물건이 있으니까 잠가 둬야지. 자, 가십시다!
아 냐 : 잘 있거나, 나의 집! 낡은 생활이여, 안녕!
트로피모프 : 새 생활 만세! (아냐와 함께 퇴장)
바랴는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 천천히 퇴장, 야샤와 개를 데리고 있는 샤를로타도 퇴장.
로파힌 : 그럼 봄까지. 자, 가십시다, 여러분……, 안녕! (퇴장)
라네프스카야와 가예프 둘만 남는다. 두 사람은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서로 목을 얼싸안고, 남에게 들리지 않도록 소리를 죽여 조용히 흐느껴 운다.
가예프 : (몸부림 치며) 아아, 류바, 내 귀여운 동생 류바…….
라네프스카야 : 오오, 사랑하는 나의 동산, 정답고 아름다운 나의 동산! …… 나의 생활, 나의 청춘, 나의 행복이여, 모두 다 안녕! 안녕히!…….
아냐의 목소리 : (즐겁고 감격적인 목소리로 재촉하듯이) 엄마!
트로피모프 : (흥분한 감격적인 목소리로) 여어이!
라네프스카야 :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벽이며, 창문을 봅시다. 돌아가신 어머님은 이 방을 거니시기를 좋아하셨어요.
가예프 : 아아, 류바, 귀여운 류바!
아냐의 목소리 : 엄마!
트로피모프의 목소리 : 여어이!
라네프스카야 : 지금 곧 간다! (두 사람 퇴장)
무대 위엔 아무도 없다. 문마다 자물쇠를 채우는 소리가 나고, 곧 몇 대의 마차가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고요해진다. 그 고요 속에 나무를 찍는 도끼의 둔탁한 소리가 쓸쓸하게, 구슬프게 울려 퍼진다.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오른편 문에서 피르스가 나타난다. 여느 때나 다름없이 양복에 흰 조끼를 입고, 발에는 덧신을 신고 있다. 그는 병들어 있는 것이다.
피르스 : (문에 다가서서 손잡이를 만져 본다.) 잠겨 있군. 모두 가 버렸구나……. (소파에 앉는다.) 나를 잊고 갔군 그래……. 그렇지만 괜찮아……. 이렇게 여기 앉아 있지……. 그런데 나리께서는 아마 털외투도 입지 않고, 보통 외투를 입고 가셨을 거야! (걱정스러운 한숨) 내가 잘 보살펴 드리지 못했으니 ……. 정말 젊은 사람들이란! (뭐라고 중얼중얼하지만 들리지 않는다.) 한평생이 지나고 말았어, 산 것 같지도 않게……. (눕는다.) 어디, 누워 볼까! 에이, 이게 무슨 꼴이야, 힘도 근력도 다 빠져 버렸어, 빈 껍질뿐이야. 에이, 이…… 머저리 같은 놈! (누은 채 꼼짝도 않는다.)
저 멀리서, 마치 하늘에서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난다. 마치 줄이 끊어진 듯한 소리로 차츰 슬프게 사라져 간다. 다시 정적. 그리고 멀리 정원 쪽에서 나무를 찍는 도끼 소리만이 들린다.
▶ 줄거리 요약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한 류보피 안드레예브나 라네프스카야 부인은 고향을 떠나 오랫동안 외국에서 생활한다. 하지만 가산을 탕진하고 벚나무 밭이 있는 고향 러시아로 돌아온다.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재산이라고는 벚나무 밭뿐이다. 그러나 몰락했어도 귀족 계급에 속한 그녀는 현실의 변화를 자각하지 못한다. 자신이 처한 경제적 궁핍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알지 못한다. 결국 벚나무 밭은 경매에 넘겨지게 되고 하루하루 경매 일자가 다가온다.
류보피를 비롯한 귀족 일가를 안타깝게 여긴 로파힌은 이들의 경제적 고충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자 벚나무 밭을 별장지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벚나무 밭을 귀족들의 유일한 자랑이라고 여기는 류보피와 그녀의 오빠인 가예프는 이를 완강히 거분한다. 아무 대책도 없이 경매 결과만을 기다리던 류보피 일가에게 로파힌은 자신이 벚나무 밭을 샀다고 알린다.
로파힌은 류보피 집안 농노의 아들이다. 장사를 해서 번 돈으로 주인의 영지를 사들인 로파힌은 신흥 계급의 상인답게 아무 미련없이 벚나무를 베어 낸다. 저택을 잃어버린 귀족 일가는 뿔뿔히 흩어지게 된다. 류보피는 다시 외국으로 떠나고, 바랴는 가정부로 가기로 하나, 아냐는 그녀의 애인 트로피모프와 새로운 생활에 희망찬 기대를 갖는다.
모든 사람이 떠나고 난 텅 빈 벚나무 밭에 벚나무 찍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린다. 교과서 수록 부분은 전 4막 중, 이 작품의 하강과 대단원에 해당하는 제4막의 뒷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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