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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아침 해에 무릎을 꿇고
어스킨. P. 콜드웰(Erskine Preston Coldwell, 1903-1987)

갑자기 로니는 몸을 떨었다. 크렘의 말이 떠올라 뾰족한 턱에서 손을 뗐다.

아치 가나드의 눈 앞에 얼굴을 내놓고 있는 것이 어쩐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이 여겨졌던 것이다. 그날 오후 주유소로 가는 길을 로니는 크렘과 함께 걸으면서 양식이 떨어져서 야단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크렘은 걸음을 멈추고 길가의 돌을 냅다 걷어차면서 아치 밑에서 계속 일하다가는 얼굴이 비쩍 말라서 죽어서 들어갈 관(棺)조차 외면하고 말 거라고 내뱉었다.

크렘과 헤어져 가솔린 펌프 옆 빈 상자에 앉으면서, 로니는 자기도 크렘처럼 아치를 태연하게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크렘은 흑인인데도 필요할 때는 서슴치 않고 아치에게 식량을 요구했다. 식량이 모자라면 어느 때고 아치를 찾아가서 말하는 것이었다. 아치는 아무 소리 않고 참고 있었지만 기회가 오면 크렘을 꼭 내 쫓으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주유소 모퉁이에 흑인 몇 사람과 함께 서서 크렘이 이 쪽을 보고 있다는 것을,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만, 실은 크렘을 돌아 볼 용기가 안 났다.

아치 가나드는 햇살이 따뜻한 자리에 앉아 장화 밑창에 재크나이프 날을 갈고 있었다. 한두 번 그는 로니의 사냥개 낸시에게 시선을 던졌다. 낸시는 길 복판에 엎드려서 주인이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니, 너희 집 개지?"

로니는 흠칫하며 한 손을 턱에 가져갔다. 만족하게 식량을 주지 않는다는 불평을 살이 빠져 날카로워진 턱이 대신 하고 있는 것 같아 숨기고 싶었던 것이다.

아치는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사냥개는 꼬리를 흔들며 일어났다.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치 씨, 나는 저..."

아치는 개를 불렀다. 아치가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개는 꼬리를 흔들어대며 배를 땅에 붙인 채 그에게 다가 갔다. 5,6피트쯤 가까이 왔을 때 개는 후딱 뒤채며 네 발을 위로 올렸다.

주유소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대드리 스미스와 짐 위버는 그 광경을 보고 소리 내어 웃었다. 둘은 여태까지 건물 벽에 기대어 있었는데, 지금은 아치의 수작을 보려고 몸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아치는 담배를 씹은 침을 장화 끝에 뱉어내며 재크나이프 날을 갈기 시작했다.

"로니, 이 개 품종이 뭐야?" 아치가 말했다. "내가 보기엔 캐치하운드 같은데."

로니는 크렘 헨리의 날카로운 시선 때문에 뒤통수에 구멍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이 개가 만약 크렘의 개고, 지금처럼 아치가 손가락을 튕기며 불러댔다면 크렘은 어떻게 나올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치 씨, 사냥개치곤 꼬리가 너무 길지 않아요?" 로니 뒤에 있던 친구가 이렇게 말하고는 마구 웃어댔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거기엔 아치의 웃음 소리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로니에게 시선을 던지며 무슨 대답이 나올까 기다리고 있다.

"이봐 로니, 저 개는 캐치하운드야!" 아치가 다시 손가락을 튕기며 주장했다.

"아치 씨, 나는 저..."

"로니, 이 개가 새나 여우를 못 잡는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어. 돼지나 토끼를 빨리 잡으려 할 때 집에 개가 있으면 편리하거든. 나도 길러 봤지만 캐치하운드도 꽤 쓸모가 있지" 모두 떠들석하게 웃어댔다.

아치 가나드는 낸시의 꼬리를 잡으려 했다. 로니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주유소 다른 쪽 모퉁이에 있는 크렘의 모습이 보일 때까지 목을 늘였다. 크렘의 눈에는 확실히 뭔가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눈에는 그날 오후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는 아치를 위해서 일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던 그 표정이 들어 있었다. 로니는 눈을 깔았다. 흑인인데도 자기보다 용기 있는 크렘이 그에게는 뭔가 불안했다. 입장을 바꾸어 크렘처럼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어떠한 대가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때때로 그의 머리에 떠오르곤 했다.

"로니, 너의 집 개는 너무 무거워서 일어설 때 여간 곤란하지 않겠어. 캐치하우드는 좀 무게를 줄여 주는 게 좋아!"

그 때 로니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크렘의 말이었다. 크렘은 만일 아치가 자기 개의 꼬리를 자르려고 하는 걸 그냥 놔두지 않을 거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오히려 아치가 고대하던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로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치는 크렘 헨리가 조금이라도 지나친 수작을 하거나, 단 한 마디라도 거슬리는 말을 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만 되면 그 때엔 가만 두지 않는다고 아치는 별러왔다. 크렘이 도망가지 않는 이상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뻔했다. 그러나 크렘이 이 고장에서 56년간 살면서 누구로부터 도망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로니가 크렘의 일을 곰곰히 생각하는 동안 아치는 손을 아래로 뻗어 낸시의 꼬리를 꽉 움켜잡았다. 낸시는 마치 아치가 자기와 놀아 주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낸시는 꼬리를 돌리며 아치의 손을 핥았다. 그는 재크나이프 끝으로 개의 콧등을 두드렸다.

"로니, 이 놈은 애교가 제법인데." 아치는 개의 꼬리를 만지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몸집에 비해서 꼬리가 너무 길어. 캐치하운드치고는 말이야."

로니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아치 씨, 이 개는 토끼 뒤를 퍽 잘 쫓습니다. 사실은 저..."

"뭘 안다고 그래?" 아치는 나이프를 갈면서 말했다.

"토끼 사냥개가 이렇게 긴 꼬리를 가졌어? 보통 캐치하운드치고는 꼬리가 긴 편이야."

로니는 대드리 스미스와 다른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다. 누가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그러나 도우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치의 생각을 돌이킬 수는 없다. 아치란 사나이는 일단 무엇을 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끝내 그것을 해내고 마는 자이기 때문이다. 만일 아치의 화를 돋군다면 그날 해가 지기 전에 농장에서 쫓겨날 것이다. 도와줄 사람은 크렘 헨리밖에 없었다. 그러나 크렘은...

주유소 양쪽 귀퉁이에 서 있는 백인과 흑인들은 로니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고 있었다. 개를 위하여 싸워 주었으면 하고 그들은 바랐다 만약 누군가 개의 꼬리를 못 끊게 할 용기 있는 자가 나선다면 그 후로는 개의 꼬리를 끊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치의 소작인인 로니가 도저히 그럴 용기가 없을 것은 뻔했다. 크렘 헨리라면 주저 없이 항의할지도 모른다. 말썽이 생기더라도 뭔가 항의할 수 있는 것은 크렘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아치도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크렘을 이 고장에서 내쫓든가, 사정없이 총알을 안기든가 둘 중 하나다.

"이봐, 로니. 자넨 군소리를 하지 않을 것 같고." 아치는 말했다. "달리 반대할 사람도 없는 것 같군."

그 때 크렘 헨리가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치는 로니의 얼굴을 보며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곤 낸시를 꽉 잡아 일으켰다. 개는 고통과 놀램으로 큰 소리로 깨갱거렸다. 그러나 아치는 개의 배를 차며 얌전히 있으라고 소리쳤다. 로니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기 개가 걷어차이는 것을 도저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목구멍이 조여 들어 질식할 것만 같아 입을 크게 벌려 거친 숨을 내쉬었다. 주위의 백인들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개가 차이는 것을 보고 기뻐할 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로니는 주유소 또 다른 귀퉁이를 옆 눈으로 살펴봤다. 흑인 세 사람이 크렘의 뒤로 다가가 작업복 바지를 꽉 움켜쥐었다. 크렘은 두 다리를 벌리고 서서 침을 뱉았다. 그러나 그들의 움켜쥔 손을 떨쳐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으니 끊어도 괜찮겠지."아치는 이렇게 말하고 침을 뱉았다. 로니는 머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눈에 비친 것은 낸시의 뒷다리 뿐이었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와 당밀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젠 아무리 식구들이 배고파 해도 식량을 요구할 마음이 생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우선 의견을 들어보지." 아치가 말했다. "만약 누군가 반대하면 당장 꼬리를 끊지는 않겠어. 그건 공평하지 못하니까."

아치는 개의 꼬리를 더욱 세게 잡으면서 엉덩이쪽 2,3인치 되는 곳 꼬리에 나이프를 갖다 댔다. 시가를 씹은 침이 흘러나와 입에 군침이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손으로 입가를 쓱 문질렀다.

그때 자동차 한 대가 푸석한 붉은 모래먼지 속을 요란하게 달려왔다. 자동차가 지나칠 때 사람들은 누가 타고 있는지 보려고 했다. 로니도 힐끗 눈길을 돌렸지만 다시 머리를 숙여 뾰족한 턱이 가슴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아치는 살이 쑥 빠진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도 집에 캐치 하운드를 두세 마리 키우고 있어." 아치는 개의 꼬리로 날을 갈면서 말했다. 꼬리를 면도날 가는 가죽띠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캐치 하운드에게 긴 꼬리는 소용이 없어. 돼지나 토끼를 잡으러 보내는 데 방해가 될 뿐이지."

아치 가나드는 왼손으로는 잡아당기고 오른손으로 밀어제치듯 재빨리 꼬리를 잘라냈다. 소를 모는 회초리로 쓰기 위해 목장에서 나긋한 버들가지를 잘라내듯 간단했다. 잡혔던 꼬리가 자유로워지자 개는 아치의 손이 미치지 않는 멀리까지 뛰어가 반 마일 저편까지 들릴 것처럼 울부짖었다. 낸시는 껑충거리다 멈추고 아치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길 한가운데까지 뛰어나가 낑낑거리며 괴로운 듯 뛰고 구르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며 피 묻은 자기 꼬리를 물기도 했다.

아치는 돌아서서 한쪽 손으로 잘라낸 꼬리를 휘두르고 장화 밑바닥으로 더러워진 재크나이프를 닦았다. 그는 붉은 모래먼지 속에서 제 꼬리를 물고 빙글빙글 맴도는 개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로니는 자기 개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또 크렘 헨리 쪽도 보지 않으려 했다. 그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쥐꼬리만한 식량을 얻기 위해 소작을 하고, 날로 쇠약해지면서도 나는 왜 이토록 오래 아치의 농장에 있는가 자문했다. 아치 농장에서 일하는 소작인들의 얼굴은 정말 '관 뚜껑이 외면할 정도'로 날카로워졌다. 크렘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다. 그의 손은 자기도 모르게 턱으로 갔다. 그러나 턱의 뼈와 두드러진 광대뼈에 생각이 미치자 얼른 손을 내렸다.

식구들이 굶주리고 있기 때문에 지금 식량을 좀 얻어간대도 일 주일도 못 갈 것이 뻔하다. 아내인 하티는 공복과 고된 밭일로 무척 약해져 있었다. 아버지 마크 뉴섬은 20년 전부터 전혀 귀가 들리지 않는다. 그런 아버지도 왜 집에 먹을 것이 없느냐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로니의 머리는 더 아래로 수그러졌다. 눈시울이 젖어왔다. 그러나 뾰족한 턱을 가슴에 파묻고 있는 것이 언짢고 괴로워 종내 얼굴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얼굴을 들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왼손으로 낸시의 꼬리를 휘두르는 아치 가나드의 모습이었다. 아치 가나드는 개 꼬리가 가득 들어있는 트렁크를 집에 보관하고 있다. 그가 개 꼬리를 잘라 모으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다. 그 동안 수집한 것도 꽤 많다. 그는 그것을 무척 자랑스러워 했다. 트렁크에 자물쇠를 채우고 그 열쇠 끈을 목에 걸고 있었다. 일요일 오후에 목사가 왔을 때나 사람들과 함께 베란다에서 서성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아치는 컬렉션을 자랑스럽게 펼쳐보이며 마치 꼬리표라도 붙어있는 것처럼 그 개의 이름을 들어보이는 것이다.

크렘 헨리는 주유소를 떠나 농장을 향하여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크렘의 집은 아치가 살고 있는 큼직한 저택의 아래쪽, 흑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거기까지 가려면 아치의 집 앞을 지나야 했다. 일어나 걸으면서 로니는 아치가 자기를 보는 것을 느꼈다. 아치는 자기의 여윈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크렘과 같이 가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일까. 짐작할 수가 없었다.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면서 그는 자기가 뭣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새삼 떠올랐다. 조금만이라도 저녁 전에 식량을 구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아치 씨, 저는..." 아치는 잠시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묘한 소리를 듣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로니는 입술을 깨물었다. 야위어 굶주림에 지친 내 얼굴에 대해 아치가 불만스러워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아치는 그런 걸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쪽 손으로 다리를 두드리며 크게 웃었다.

"난 때로 흑인에게도 꼬리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어." 아치는 낸시의 꼬리를 돌돌 말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개 꼬리보다 흑인의 꼬리를 잘라 보고 싶어. 우선 수가 많으니 말이야." 뒤에 서 있던 대드리 스미스와 다른 친구가 껄껄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이내 그쳤다.

아치의 말을 들은 흑인들은 모래먼지 속에 다리를 끌며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3분 후에는 주유소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흑인들은 붉은 목조 건물 뒷길로 자취를 감췄다.

아치는 일어나자 기지개를 켰다. 해는 지고 차가운 10월의 공기는 결코 상쾌하지 않았다.

"슬슬 돌아가서 저녁이나 먹을까." 그는 말했다.

그는 서서히 길 복판까지 걸어가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개천을 따라 뺑소니치는 낸시를 보고 있었다.

"내 집 쪽으로 갈 놈은 하나도 없나?" 그는 말했다.

"로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자넨 저녁 먹으러 가지 않는 거야?"

로니는 힘차게 일어서려고 했다. 그의 머리에는 햄이나 옥수수를 달라고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몇 걸음 발을 옮기며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면 아치가 어떻게 나올지 짐작할 수 없었다.

"하티가 찾고 있을 거야" 아치는 말을 던지고 곧 등을 보이며 걸어갔다. 그는 자기 집으로 걸어가면서 뒷주머니에 손을 넣어 낸시의 꼬리를 꺼내 휘두르기 시작했다. 대드리 스미스는 주요소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다른 사람들도 자취를 감췄다. 아치가 수백 야드 멀리 가버리자 로니는 가솔린펌프 옆 상자에 가만히 앉았다. 조금 전 아치가 말을 걸었을 때 일어났던 그 상자이다. 그는 지금 다시 거기 가만히 앉으며 어깨를 맥없이 떨구고 벌린 다리 사이로 팔을 떨구었다.

얼마나 오래 눈을 감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눈을 뜨자 낸시가 다리 사이에 엎드려서 잘린 꼬리를 핥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낸시의 꼬락서니를 보자 다시 뾰족한 턱 끝이 가슴에 파고들었다. 마침내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집으로 돌아 가는 대드리 스미스의 발소리가 들려 왔다.

로니는 선잠을 자다가 갑자기 잠이 깼다. 하티가 그를 흔들었다. 그는 팔을 짚고 일어나 어두운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몇 시 쯤인지 알 수 없지만 날이 밝기까지는 아직 두어 시간 남은 것 같았다.

"로니" 하티가 차가운 밤 공기에 몸을 떨면서 다시 그를 불렀다. "로니, 아버님이 어디 가신 것 같아요." 로니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디로 갔다니? 어떻게 알아?" "누워 있었지만 잠이 안 와서 깨어 있었는데 아버님이 나가시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리고 돌아 오시지 않았어요."

"아마 잠깐 밖에 나가신 모양이지." 로니는 창 밖을 내다보려 했다. "로니, 내 말이 맞을 거예요." 하티는 고집을 부렸다. "아버님이 나가신 지 시간이 꽤 되는 걸요."

그들은 마크 뉴섬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가 귀를 기울이며 몇 분 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 로니는 일어나 램프에 불을 켰다. 와이셔츠와 작업복 바지를 입고 구두를 신으며 그는 몸을 떨었다. 희미한 불빛으로 더듬어서 맨 구두 끈이 너무 단단하게 매어졌다. 창 밖은 캄캄했다. 10월의 습기찬 공기가 얼굴에 와 닿았다.

"나도 함께 갈까요." 이불을 밀치며 하티가 일어나려고 했다. 로니는 침대로 가서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자리에 눕혔다. "하티, 좀 자는 게 좋아." 그는 말했다. "밤새 한 잠도 안 잘 수는 없지. 아버지는 내가 모셔 올 테야."

그는 불을 끄고 어두운 현관을 더듬어 두 손으로 벽을 짚으며 베란다 쪽으로 걸어갔다. 베란다에 나와도 앞이 안 보였지만 점점 어둠에 익숙해졌다. 잠시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는 현관 앞 계단을 더듬어 뜰로 내려섰다. 그리고 집 모퉁이를 돌았다. 부친을 부르기 전에 다시 한번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 그는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 그는 침실 창문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가. "무슨 바보 짓이야..." 그는 자신을 꾸짖었다. "천둥 소리가 난대도 아버지에게 들릴 리 없지."

그 때 하티가 창문 너머로 소리쳤다. "나가신 지 꽤 되는데 네거리나 더 멀리 나가봐야 할 거예요." "하티, 당신은 좀 눈을 붙이는 게 좋아." 로니는 말했다. "곧 모시고 돌아올 테야."

집 뒤에서 낸시가 벼룩에 물린 자국을 긁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낸시가 마크를 찾아낼 수는 없다. 꼬리를 잘린 충격에서 회복하려면 며칠은 걸릴 것이다.

"시간이 꽤 됐어요." 하티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입을 열었다. "그런 건 대단치 않아." 로니는 말했다. "금방 찾아 모시고 올 테니 당신은 잠이나 좀 자 둬."

로니는 무슨 소리라도 들리지 않을까 귀를 기울이며 헛간을 향하여 걸었다. 저만큼 멀리 큰 집에서 돼지가 꿀꿀거리고 있다. 다른 소리가 잘 들리도록 얌전하게 있으면 좋으련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치 가나드 집 개도 짖어댔지만 그 소리는 늘 들어와 익숙했다.

로니는 헛간으로 가서 안팎을 모조리 살폈다. 헛간을 한 바퀴 돌아본 뒤 면화를 넣어두는 다른 헛간까지 가 보았다. 쓸데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부친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불러봤다.

"아버지!" 그는 어둠을 꿰뚫듯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다시 밭 가운데로 걸어갔다. "도대체 아버지는 어떻게 된 거야?" 그는 걸음을 멈추며 다음은 어디를 찾아야 할까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다시 앞뜰까지 왔을 때 비로소 불안한 마음이 스며들었다. 요 1주일 동안 마크에게 별다른 점은 없었지만, 아치 가나드가 식량을 조금밖에 주지 않아 화를 내고 있었다. 이처럼 적은 식량으로는 석 달도 못 가 굶어죽을 거라고 투덜대곤 했다.로니는 뜰에서 나와 흑인들 오두막집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골목길을 따라 크렘의 집 앞에 와 문을 몇번 두드렸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그는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

"누구야?" 크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냐야." 로니는 말했다. "좀 만나고 싶어. 앞뜰에 있겠네." 그는 자리에 앉아 크렘이 옷을 입고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 그 동안에도 그는 뭔가 들릴까 싶어 귀를 기울였다. 밭 너머 큰 집쪽에서 식용으로 살찌운 돼지의 꿀꿀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크렘이 나타나 문을 닫았다. 그는 잠시 서서 자기 아내에게 곧 돌아올 테니 염려 말라고 했다. "대체 누구야?" 뜰에 내려선 크렘이 물었다. 로니는 일어나 가까이 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크렘은 작업복 단추를 채우며 물었다.

"우리 아버지 침대가 비어 있어." 로니는 말했다. "밤새 쭉 자리를 비우신 것 같아. 밭에도 가 보았고 헛간도 뒤졌지만 전혀 찾을 수 없어." 크렘은 단추를 채우고 담배를 말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로를 향해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주변은 아주 어두었다. 새벽까지 적어도 한 시간은 있어야 할 것 같다.

"비참해서 침대 속에 배겨 있을 수 없었던 모양이지." 크렘은 말했다. "어제 만났을 때, 뼈와 가죽만 남아 목숨이 얼마 안 남았다고 하시던데, 이젠 더 여위려고 해도 여윌 수 없다고 하시더군." "어제 저녁 식사 뒤 식량을 좀 달라고 아치에게 사정했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와 당밀을 조금 달라고 했지만 그는 날이 새고 나서 보자고 했어."

"조금 주려거든 차라리 안주는 것이 났다고 왜 말을 못해? 정 안줄 때엔 이곳을 떠나 더 나은 주인을 찾아갈 수도 있지 않아?" "나는 오랫동안 아치 가나드 밑에서 일해왔어. 새삼 그를 떠날 마음이 내키지 않는군 그래."

크렘은 로니를 쳐다봤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큰 집으로 통하는 차도를 따라 길을 돌아갔다. 돼지는 여전히 우리 속에서 꿀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때 아치의 사냥개 한 마리가 차도를 따라 심어진 목화나무를 지나 그들의 구두 냄새를 맡았다.

"저 살찐 돼지는 언제나 먹을 것이 충분하지." 크렘이 말했다. "지금도 칠백 파운드는 넉넉히 나갈 거야. 앞으로도 계속 살이 찔 테고. 놈들은 주는 것만 먹는 게 아니야. 우리 속에 들어와 먹이를 찾는 병아리까지 먹어치운단 말이야." 큰 집을 향하여 차도를 걸어가며 로니는 꿀꿀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아치 씨를 깨워서 같이 찾자고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로니는 말했다. "깨우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런데 어버지가 늪에라도 들어가 영영 못 찾게 될 수도 있어. 벼락 소리도 못 듣거든. 그런 델 들어갔다간 찾아내기 어려울 거야." 이때 크렘이 작은 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리며 헛간과 돼지 우리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로니보다 먼저 돼지 우리에 왔다. "빨리 와." 로니를 뒤돌아보며 크렘이 말했다.

로니는 돼지 우리를 향하여 달렸다. 걸음을 멈추고 나무와 가시 철사로 된 울타리 중간까지 올라갔다. 처음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차츰 안쪽에서 우글거리는 돼지 떼가 눈에 보였다. 그들은 목줄이 풀려 토끼에게 돌진하는 굶주린 사냥개처럼 물어뜯기도 하고 울부짖기도 했다.로니가 울타리 위에 올라가자 크렘이 그를 잡아당겼다. "그렇게 우리에 들어가면 안 돼." 그는 말했다. 사나운 돼지들에게 갈기갈기 물어 뜯긴단 말이야. 저 놈들은 지금 뭔가 흥분하고 있어." 그들은 우리 모퉁이를 돌아 돼지들이 몰려있는 쪽으로 갔다. 그 때 돼지들 발 밑 땅바닥에 엎어진, 하얀 반점이 있는 검은 덩어리가 얼핏 눈에 띄었다. 그러나 금방 돼지 한 마리가 그 위를 짓밟아 짧은 순간밖에 보지 못했다. 크렘은 몇 번 입을 벌렸다 닫았다. 간신히 말이 나왔다. 그는 로니의 팔을 꽉 잡으며 몸을 흔들었다.

"어쩐지 자네 아버지 같애. 틀림없을 걸." 로니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울타리 가장 높은 데서 뛰어내려 발로 걷어차 돼지들을 쫓기 시작했다. 그러나 돼지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동안 크렘은 달구지 헛간에 들어가 몽둥이 두 개를 들고 뛰어왔다. 그는 로니를 쿡쿡 찔러 몽둥이를 쥐어주었다.

크렘은 울타리를 넘어 우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돼지를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로니도 돼지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달려갔다. 돼지 한 마리가 로니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크렘이 돼지의 목을 힘껏 내리쳤기 때문에 잠시 동안은 다가오지 못했다. 로니도 사태가 긴박함을 깨달았다. 그는 무거운 구두로 돼지들을 걷어차며 쇠붙이가 붙어 있는 몽둥이로 대가리를 내리쳤다. 찌르는듯한 고통을 느끼고 내려다 보니 돼지 한 마리가 종아리를 물어뜯고 있었다. 그는 곧장 몽둥이로 쳐 쫓았다. 다행히 다리는 뜯기지 않았다. 그러나 종아리에 선뜻 밤공기가 느껴졌다. 작업복 바지 가랑이가 물어 뜯긴 것이다.

크렘은 앞에서 돼지들을 쫓고 있었다. 그 밖엔 방법이 없었다. 사나워진 돼지들을 쉴 새 없이 몽둥이로 쫓아야 했다. 마침내 로니는 간신히 손을 뻗쳐 마크의 다리를 잡았다. 크렘의 손을 빌려 부친을 울타리까지 옮겨갔다. 그리고 울타리 위로 들어올려 그 너머로 떨어뜨렸다.

둘은 숨이 가빠 잠시 동안 말도 못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살찐 돼지들은 울타리로 몰려와 말뚝과 가시 철사를 물어뜯으며 더 요란하게 떠들었다. 로니가 주머니를 뒤져 성냥을 찾자 크렘이 성냥을 그었다. 그는 불을 마크 뉴섬의 머리에 가까이 댔다.

둘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뚫어지게 내려다봤다. 크렘이 성냥불을 불어 껐다. 둘은 어둠 속에서 얼굴을 마주봤으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크렘이 몇 발짝 걸어가다 몸을 돌려 로니 옆으로 돌아왔다. "역시 아버지야." 땅에 주저앉으며 크렘이 말했다. "아버지야, 틀림없어." "내 보기에도 그래." 로니는 말했다. 달리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마크를 가운데 놓고 땅 위에 앉아 그의 몸을 살폈다. 그들이 처음 손을 댔을 때 이미 마크는 죽은 상태였다. 얼굴, 목, 배, 할 것 없이 사정없이 물어 뜯긴 것이다.

"아치 가나드를 깨워야겠어." 조금 있다 크렘이 입을 열었다. "깨울 필요는 없지 않아?" 로니가 물었다. "이제 손을 빌릴 필요가 없어. 너무 늦었어." "그런 문제가 아니야." 크렘이 강하게 말했다. "그를 깨워서 보여줄 것은 보여줘야 해. 아침까지 그대로 두면 돼지들이 한 짓이 아니라고 우겨댈지도 몰라. 그의 돼지가 한 짓이란 걸 보여 주려면 지금 당장 깨워야 해."

크렘은 되돌아보며 아치가 살고 있는 큰 집을 쳐다보았다.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윤곽을 드러낸 그 집에는 뭔가 그를 초조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소작인에게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는 녀석에게 이 시체를 땅에 파묻기 전에 똑똑히 보여 줄 필요가 있어."

로니는 불안하게 크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크렘의 말이 옳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지만 백인을 욕하는 흑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웬지 마음이 불안해졌다. "아치를 그렇게 말하면 못써." 로니는 말했다. "그 사람은 지금 침대에서 자고 있어. 이번 일은 그 사람과 아무 관계가 없지 않아? 나에게 책임이 없듯이 아무 관계가 없는 거야." 크렘은 슬쩍 웃으며 땅에다 몽둥이를 던졌다. 그러나 다시 몽둥이를 집어들고 땅을 쾅쾅 두들겼다.

로니는 천천히 일어섰다. 여태까지 크렘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는 말없이 크렘의 옆을 떠나 아치 가나드를 깨우기 위하여 어둠 속을 걸어갔다.

아치는 좀처럼 잠을 깨지 않았다. 그리고 잠을 깬 뒤에도 쉽사리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로니가 서 있는 곳은 침실 창 밖이었기 때문에 아치의 침대까지는 6 내지 8피트가 떨어진 거리였다. 몸을 뒤척이며 투덜거리는 아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런 밤중에 나를 깨우라고 누가 그랬어?" 아치는 말했다. "실은 크렘 헨리가 저기 와 있습니다. 아치씨도 알고 싶어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치는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거리며 주먹으로 베개를 여러 번 두들겼다.

"그 녀석에게 머지 않아 단단히 뭔가를 보여줄 거라구 그렇게 전해." 그러나 로니는 물러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치가 일어나 돼지우리에 가서 봐야 한다고 크렘이 주장했던 것이다. 로니도 그 주장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새삼 헛간 앞뜰로 돌아가 크렘에게 아치가 나오지 않는다고 전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반드시 그럴지는 모르지만 크렘 같으면 침실 안에까지 들어가 아치를 끌어낼지도 모른다.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로니, 너 아직도 가지 않고 있는 거냐?" 아치가 큰소리로 야단을 쳤다. "네, 아직 있습니다. 그런데 아치 씨-" "졸리지만 않다면 당장 나가 몽둥이로 요절을 낼텐데!" 로니는 아치가 나오는 뒷문 쪽으로 걸어갔다. 아치는 돼지 우리로 가면서 로니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치는 앞서 걸어가며 뒤에서 로니가 오는지 어쩐지 돌아 보지도 않았다. 아치가 쥐고 있는 등불은 길고 흐릿한 빛을 땅에 던지고 있었다. 마크의 시체 옆에 흑인의 눈이 어둠 속에서 번들거리고 있었다.

"마크는 이런 밤중에 내 돼지우리에서 뭘 하고 있었단 말이야?" 아치는 둘을 보고 소리질렀다. 크렘도 로니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없는 둘을 아치는 쏘아보았다. 그리고 발 밑 땅 위에 누운 마크 뉴섬의 물어뜯긴 시체를 연신 바라봤다.

"일이 이쯤 됐으니 어떻게 할 수 없군." 아치가 입을 열었다. "날이 새는 것을 기다려 장의사를 부를 수밖에 없어." 그는 서너 걸음 집으로 걸어갔다. "구태여 나를 깨울 필요는 없잖아. 너희들만 아침까지 기다리면 될 일을 가지고..." 그는 등을 돌려 크렘을 노려봤다. 크렘이 벌떡 일어나 아치를 똑바로 쳐다봤다.

"크렘, 넌 도대체 뭐야?" 아치가 말했다. "이 밤중에 왜 내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거야? 내가 부른다면 몰라도 깜둥이가 함부로 이곳에 드나드는 것은 삼가는 게 좋을 거야." "사람이 돼지에게 물어 뜯겨 죽어가는데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지요." "남의 일에 참견 말고 자기 일이나 하는 게 어때?" 아치가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말할 때는 먼저 모자를 벗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게 돼. 너 같은 녀석 요절 내는 건 누워 떡 먹기야." 로니는 뒷걸음쳤다

아치와 크렘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크렘과 아치의 시비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시작됐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랬다. 크렘이 그냥 사라지면 아무 일 없이 끝나지만, 그는 가끔 단호하게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마치 백인인 것처럼 아치에게 맞대꾸를 하는 것이다.지금 그런 말썽이 일어나지 않아야 할 텐데... 로니는 생각했다. 이미 아치는 한밤중에 잠이 깨서 무척 화가 나 있다. 그리고 아치가 흑인에게 화를 내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가 흑인을 죽이는 것을 본 사람은 없지만 그는 자기 입으로 흑인을 죽인 적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고, 한 번 더 죽이는 것쯤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곤 했다.

"어째서 마크가 이렇게 물어 뜯겼는가 당신은 알 거요." 아치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크렘이 말했다. 아치는 크렘 쪽으로 휙 몸을 돌렸다. "말하고 싶은 게 바로 그거야?" "바로 그거요." 크렘이 말했다. "뭐? 참 입맛 더럽군. 피가 노란 녀석이..." 아치가 소리 지르며 크렘의 머리를 등불로 후려쳤다. 크렘은 얼른 피했다. 등불이 그의 어깨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졌다. 석유가 땅바닥에 흩어지고 심지의 불이 옮겨 붙었다. 다행히 크렘의 얼굴과 작업복에는 석유가 튀지 않았다.

"이봐요, 이게 무슨 짓이요..." 크렘이 대들었다. "뭐야? 피가 노란 검둥이 녀석이." 아치는 다시 덤벼들었다. "말대꾸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 주지. 네 신분도 모르고 건방지게 지껄였지만 이젠 마지막이다. 지금까지 참고 참았어. 이젠 견딜 수 없어." "아치 씨 저는..." 로니는 둘 사이를 가로막으려 했다. 그러나 아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치는 한 발 물러서 땅에서 꺼져가는 석유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크가 돼지들에게 뜯긴 이유는 잘 알고 있겠지요." 크렘은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내뱉었다. "굶주린 나머지 먹을 것을 찾아 밤중에 침대에서 빠져 나와 어둠 속을 여기까지 걸어 온 거요. 아마 훈제 창고를 찾았던 게지. 그러나 이런 내막이야 어찌 됐건, 그는 다른 소작인들처럼 먹을 것이 모자랐던 거요. 게다가 노인이라서 훈제 창고 외에 식량이 있는 장소를 몰랐던 거요. 당신도 알겠지만 어두워서 길을 잘못 들어 돼지 우리에 들어간 겁니다."석유불은 완전히 꺼져 버렸다. 최후의 불꽃이 확 피어 올르는 순간 아치는 손을 뻗쳐 로니가 땅에 떨어뜨린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와락 크렘에게 달려들었다. 크렘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 그러나 아치도 다시 몸을 가누어 크렘이 피하기 전에 팔꿈치를 내리쳤다. 크렘의 한쪽 팔이 힘없이 옆으로 쳐졌다.

"피가 노란 깜둥이 녀석이!" 아치는 소리를 질렀다. "맛 좀 봐라 깜둥아. 이번이야말로 마지막이야. 전부터 널 혼내주려고 벼르고 있었지. 도저히 잊을 수 없게 단단히 혼을 내줄 테다."

크렘은 발로 더듬어 또 하나의 몽둥이를 찾아냈다. 그는 몸을 구부려 얼른 그것을 주어 들었다. 그는 몽둥이를 쳐들었지만 아치를 내리치지 않고 앞에 내민 채 공격을 막으려 했다. 그는 여전히 한 발도 뒤로 물려서지 않았다.

"몽둥이를 버려!" 아치가 말했다. "아까처럼 맞고만 있을 수야 있나." 크렘이 지지 않고 대꾸했다. "말 잘했다. 그걸로 충분해." 아치는 입을 뒤틀며 소리쳤다. "각오해, 깜둥아. 정말 마지막인 줄 알아라."

그는 다시 크렘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크렘은 휙 몸을 피하자 헛간 쪽으로 달려갔다. 아치는 그를 몇 발짝 쫓아갔지만 뭘 생각했는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몽둥이를 팽개치고 집으로 달려갔다. 로니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리 크렘이 자기를 도와주었다 해도 공공연히 흑인 편을 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욱이 자기가 할 말을 크렘이 다 해 버린 지금 와서 새삼 편을 들 수도 없다. 로니는 백인이었다. 아치에겐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

조금 뒤 창 하나에 갑자기 불이 켜졌다. 그리고 자기 아내에게 일어나라고 소리치는 아치의 소리가 들려 왔다. 아치의 아내가 전화를 걸러 가는 것을 보자 로니는 어떤 일이 생길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이웃 사람들과 아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다. 그들은 무슨 일이 생겼다 하면 한밤중에라도 서슴지 않고 움직이는 놈들이다.

헛간 뒤에서 크렘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니는 뜰에서 나와 어둠 속을 더듬어 걸어갔다. "크렘,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물었다. "나도 이제 마지막이야." 크렘이 말했다. "아치 가나드가 화를 내면 언제나 말투가 저렇지. 언젠가 짐 머핌이 늪에 끌려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도 지금 같은 말투였어. 짐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어."

"크렘, 아무리 그래도 아치가 너에게 그러지는 않을 거야." 로니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마음속으론 자기 말을 믿지 않았다. 크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늪쪽에 가 있는 게 어때. 그들도 시간이 지나면 좀 가라앉을 거야." 로니는 말했다. "크렘, 네가 말한 것이 맞을지도 몰라." 로니는 자기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크렘의 눈길을 느꼈다. "네가 날 도와준다면 그것도 괜찮지." 크렘이 말했다. "나를 좀 도와줘." 크렘의 의도를 깨닫고 로니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헛간 벽에 기댔다. 희고 검은 빛이 그의 눈을 스쳐갔다.

"나를 도와주지 않겠어?" 크렘은 다시 물었다. "널 도왔다간 아치가 뭐라고 할까. 곤란할 것 같은데." 로니는 안절부절 못하며 말했다. 크렘은 몇 발짝 걸어갔다. 그는 로니에게 등을 보인 채 밭 너머에 있는 자기 집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기 작은 숲에 숨어도 괜찮을 거야. 놈들이 찾다가 지칠 때까지 말이야." 돌아보며 크렘이 말했다. "어디 딴 고장으로 가는 건 어떨까?" 불안해진 로니가 말했다. "난 아치 가나드가 어떤 사람인 걸 알아. 맘 먹은 일은 끝내 해치우고 말아. 1인치도 물러서지 않지. 너도 이 고장을 떠나는 게 상책 아닐까?"

"그럴 수는 없어. 이곳에 가족을 두고 어떻게 간단 말이야." 크렘은 말했다. "그러나 달아나지 않으면 아치에게 잡히고 말아." "날 도와주면 저 숲에 숨어 있겠어. 나도 너의 아버지를 돼지 우리에서 같이 찾아 주었으니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잖아?"

로니는 큰 집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지 않나 바짝 귀를 기울이며 크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크렘은 확실한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 "만약 나를 도와준다면" 크렘이 말했다. "놈들이 포기할 때까지 저 숲에 숨으면 되는 거야. 내가 숲에 숨었다고 넌 말하지 않겠지. 내가 늪으로 갔다고 해도 괜찮지. 그러면 개를 사용하지 않는 한 발견될 리 없어!"

"그럼 그렇게 하게." 아치가 집에서 나오지 않을까 신경을 쓰며 로니는 말했다. 그는 이렇게 으슥한 헛간뒤에 있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이곳에서 크렘과 무슨 이야기를 했나 힐책을 당할 테니까.로니의 대답을 듣자 크렘은 곧바로 몸을 돌려 어둠 속을 달려갔다. 로니는 심경이 바뀐 듯 몇 발짝 크렘의 뒤를 쫓았지만 이미 크렘의 모습은 어둠 속에 빨려 들고 말았다. 로니는 4분의 1마일쯤 떨어진 작은 숲속을 재빠르게 달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2,3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자 아치를 맞으러 걸어갔다.

아치는 집에서 2연발 엽총과 등불을 들고 나타났다. 주머니는 탄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봐, 깜둥인 어디 있어?" 아치가 물었다. "도대체 어딜 갔어?" 로니는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느 쪽으로 갔어? 넌 알고 있겠지?" 로니는 다시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소리는 안으로 기어들기만 했다. 그는 아치에게 끄덕이는 자신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치 씨, 저는..." "그래 됐어." 아치는 말했다. "지금 알고 싶은 것은 그것 뿐이다. 대드리 스미스와 톰 호긴즈, 프랭크 하워드가 곧 올 거야. 넌 이곳에서 꼼짝도 해서 안돼. 깜둥이가 어디 숨었는지 가르쳐 줘야 하니까." 로니는 있는 힘을 다해 입을 열려고 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아치의 소매를 잡아 말리려고 했으나 이미 아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치는 집을 돌아 앞뜰로 달려가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자동차 한 대가 달려와 헤드라이트로 주변을 비췄다. 로니는 대드리 스미스의 차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의 집은 반 마일 정도로 제일 가까운 거리였다. 그의 차가 집에 들어오자 다른 몇 대의 자동차도 길에 나타났다.

로니는 몸이 떨렸다. 아치가 크렘의 숨은 곳을 대라고 말하지 않을까 불안했다. 아치가 다그치면 꼼짝 못하고 말하게 될 것이다. 크렘에게는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치가 크렘에게 매질 이상 심한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크렘은 린치를 당할 짓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백인 여자를 건드리지도, 백인을 쏘지도 않았다. 단지 모자를 쓴 채 아치에게 대꾸를 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치는 화가 났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화가 나 린치라도 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이다.

어느덧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아치가 로니의 팔을 꽉 붙잡고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아치 씨, 저는..." 로니는 희끗한 새벽 어둠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흥분하고 있었다. 밤새 여우사냥을 하다가 막 돌아온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짐승을 쏘는 것처럼 허리에 엽총과 권총을 차고 있었다.

"로니 어떻게 된 거야?" 귀에 바싹 대고 아치가 소리를 질렀다. "우두커니 서 있지 말고 크렘이 숨은 곳을 말해. 지금부터 그 녀석을 잡으러 가는 거야." 로니가 섬찟해 고개를 들어보니 프랭크 하워드가 장총에 열두 발 노란 총알을 넣고 있었다. 프랭크는 크렘이 숨은 곳을 들으려고 몸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크렘을 죽이지는 않겠지요?" 로니가 물었다.

"죽이지는 않겠지요?" 대드리 스미스가 그대로 따라 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뭘 기다렸다고 생각해? 저 깜둥인 이 고장에서 계속 말썽만 부려왔어. 괘씸한 녀석이지. 마침내 녀석을 잡을 때가 된 거야."

"크렘만 나쁜 것은 아니요." 로니가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여기 돼지 우리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크렘도 아무 일도 없었을 거요. 그는 나를 도왔을 뿐입니다." "이봐! 그만둬." 누군가가 그를 보고 야단을 쳤다. "넌 지금 흥분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어. 그런 말을 하면 흑인 편을 드는 거야." 사람들이 빙 둘러싸서 그는 금방 짓눌려 죽을 것 같았다. 숨을 쉬려면 사람들 밖으로 뛰쳐나가야 한다.

"분명 그래요." 자기 말소리가 들렸지만 무슨 말인지 자기도 분간 할 수 없었다. "제 아버진 먹을 것을 찾아 다니다 길을 잘못 들었어요. 그 때 크렘이 나서 제가 찾는 걸 도와주었소." "이봐 입 닥쳐!" 다시 누군가 소리쳤다. "바보 같은 자식, 그만 입 닥쳐."

아치가 어깨를 꽉 움켜쥐고 이가 부딪히도록 몸을 마구 흔들었다. 로니는 퍼뜩 제 정신이 들며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이봐 로니" 아치가 큰 소리를 질렀다. "넌 머리가 돌았어. 제 정신이라면 흑인을 편 드는 말은 하지 않을 텐데."

"그야 그렇죠." 로니는 몸을 후들후들 떨면서 말했다. "그런 말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아치의 굵은 손이 그의 어깨를 아프게 붙잡은 곳이 아직 그대로 붙잡혀 있는 것 같았다.

"로니! 크렘은 늪으로 갔나?" 대드리 스미스가 물었다. "그렇지?" 로니는 고개를 옆으로 저으려 했다. 또 끄덕이고도 싶었다. 그러자 아치의 손이 그의 가는 목을 꽉 졸랐다. 로니는 미친 듯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이봐 크렘은 어디 숨었어?" 아치는 더욱 목을 조르며 로니에게 물었다.

로니는 서너 걸음 헛간 쪽으로 걸어가 멈췄으나 사람들이 밀어대자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헛간 뒤까지 와서 다시 앞으로 내밀리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좋아." 아치는 말했다. "도대체 어느 쪽으로 갔지?"

로니는 개천이 흐르는 작은 숲을 손가락질했다. 그것은 늪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저 개천가 작은 숲에 숨겠다고 했습니다. 벌써 닿았을 것 같은데요..."

로니는 제 몸이 앞으로 밀려 흐르는 느낌이었다. 넘어져 밟히지 않도록 몸을 가누며 울퉁불퉁한 땅 위를 휘청거리며 걸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새벽 빛이 차츰 밝아졌다. 아직 사람들 몸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길을 찾기에는 충분했다. 숲에 닿기 직전에 사람들은 몇 패로 갈렸다. 로니는 자기도 모르게 크렘을 직접 잡는 쪽에 들어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로니를 붙잡고 있지 않았다. 비로소 몸이 자유로워졌지만 이젠 앞으로 나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제야 그는 자기가 저지른 행동을 확실히 깨달았다. 크렘은 틀림없이 저기 어느 나무 위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사방으로 둘러싸인 것이다. 포위를 뚫고 달아난다면 토끼처럼 사살될 것이다.

로니는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궁리했다. 몇 분 뒤면 해가 솟아오를 것이다. 해가 솟으면 사람들은 일제히 크렘을 찾아 나설 것이다. 이토록 많은 엽총과 권총 사이를 도저히 피할 길이 없다.

한두 번 풀숲에서 확 성냥불이 비췄다. 몇 사람이 거기 잠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담배 냄새가 로니의 코를 찔렀다. 크렘도 이 숲 어딘가에서 냄새를 맡고 있겠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주위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치 가나드와 다른 사람들은 해가 솟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몇 분 후면 동쪽에서 해가 솟아오를 것이다.

주변은 점점 밝아오고 울퉁불퉁한 지면과 총총한 덤불이나 두툼한 소나무 껍질이 뚜렷하게 보였다. 사람들은 사슴이라도 잡는 듯 조용히 총을 들고 전진했다. 자그마한 숲이어서 몇 분도 안돼 다 뒤질 것이다. 날이 새기 전이라면 빠져 달아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크렘은 아직 이 숲에 있을 것 같다. 크렘이 숲에서 꼼짝 않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가 숲에 숨어 있다는 것을 일렀기 때문이다.로니는 점점 좁혀가는 포위를 따라 함께 나아가는 자신에 놀랐다. 뚜렷하지는 않으나 어느덧 주위 사람들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나무 사이를 나아가며 울창하게 자란 푸른 소나무 가지를 열심히 올려다 보았다.

"아버지!" 그는 목쉰 소리로 속삭였다. "아버지!"

그는 빽빽한 관목 안을 들여다보고 나무 끝을 쳐다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자 지금 찾는 것이 아버지 마크 뉴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 머리가 이리 흐리멍텅한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기어가듯 전진하는 사람들의 동작이 로니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뒤꿈치를 들고 발끝으로 뛰었다. 몸도 앞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토끼를 보고 총이 없어서 가만가만 다가가는 동작과 똑같았다. 그는 지금 자기가 하는 짓을 잊어버렸다.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두 발로 뛰는 동작이 더 빨라졌다. 몸을 움츠려 손가락 끝이 거의 땅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이제 멈출 수 없다. 사람들에게 뒤쳐지지 않으려면 앞으로 전진하는 길밖에 없다.

열 다섯 명의 사람이 한 데 모였다. 마침내 밤이 새고 시계 바늘을 읽을 정도다. 햇빛이 머리 위를 물들였다. 로니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앞서가고 있었다. 처져 있을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넘쳐서 도저히 억눌러둘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퍽 오랜 동안 탄환을 사지 못해 좋아하던 사냥도 잊고 지냈다. 땅을 기어가듯 전진하는 사람들의 규칙적인 걸음 소리가 그의 귀에 상쾌한 리듬처럼 울려왔다.

"야, 저기 있다!" 갑자기 누가 부르짖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 웅성댔다. 로니는 다른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는 듯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 그 나무에 가 닿았다. 모두가 총을 위로 올리고 겨누고 있었다. 머리 위 저쪽에 크렘 헨리의 얼굴이 뚜렷이 드러나며 솟아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가느다란 소나무 가지에 꽉 달라붙어 있었다.

누가 처음 발포했는지 로니는 알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주저하지 않았다. 엽총과 권총이 소나무 줄기를 둘러싸고 섬광(閃光)과 뿌연 연기를 뿜으며 귀를 찢는듯한 소리를 냈다.

로니는 눈을 감았다. 또다시 머리 위의 얼굴을 보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총성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크렘은 죽을 기를 쓰고 나무에 달라붙어 있었지만 마침내 나뭇가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크렘의 몸이 무서운 소리를 내며 아래 큰 가지 사이를 지나 땅 위로 떨어졌다. 크렘의 몸은 할퀴고 뜯기어 털썩 떨어지며 손만 휘청 늘어뜨렸다. 그 털썩 하는 소리를 듣자 로니는 심장이 딱 멈추는 것 같았다.

다시 총성이 울리자 로니는 외면하며 가까운 나무를 붙잡고 몸을 지탱했다. 만신창이가 된 크렘의 몸은 사방에서 다시 탄환의 세례를 받고 마치 연발 소총으로 사살된 고양이 새끼처럼 몇 번 뒹굴었다. 자욱한 흙 먼지가 오르고 숨막힐 것 같은 화약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사격이 얼마나 계속되었는지 로니는 기억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툴두툴한 나무껍질을 붙잡으며 나무에서 나무로 숲 속의 빈 곳을 향하여 엎어지고 고꾸라지며 그는 숨가쁘게 달리고 있었다. 그가 빈터에 이르렀을 때 하늘은 잿빛에서 붉은 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는 밭에 뒹굴기도 했다. 흙덩어리에 걸려 넘어지면서도 곧장 일어나서 다시 달렸다. 그렇게 달리면서 그의 눈길은 앞에 있는 집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한 번 넘어지면 일어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기를 쓰고 버둥거리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붉고 둥근 태양을 우러러보았다. 따스한 햇빛을 받고 있노라니 일어날 힘이 생겼다. 자기도 모르게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우러났다. 그는 자신에게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생각지도 않았던 말을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집에 돌아오니 하티가 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숲의 총성도 들었고 밭에서 굳은 흙덩어리에 걸려 넘어지는 그의 모습도 보았다. 또한 태양을 우러러보는 그의 모습도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려고 로니에게 달려 왔을 때 하티의 몸은 떨고 있었다.

자기 집 마당에 들어서자 로니는 어깨 너머로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아치 가나드의 집 울타리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아치의 아내가 베란다에 선 채 그들에게 뭔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로니, 아버님은 어디 계세요?" 하티가 물었다. "좀 전에 숲 속에서 총 쏘는 소리가 났는데 무엇 때문이에요?" 로니는 비틀거리며 앞 베란다에 이르렀다. 그러나 층계 위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로니, 로니!" 하티의 소리가 들렸다. "여보 정신차려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아무 것도 아니야." 로니는 말했다.

"별로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다면 주인댁에 가서 고기라도 좀 얻어 올 수 없어요? 조반에 쓸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아버님도 밤새 돌아다녔을 테니 배가 몹시 고플 거예요."

"뭐라고?"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내지른 로니의 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주인댁에 가서 고길 좀 얻어와 달랬는데 뭘 그러세요?"

로니는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

"고기라고?" 거칠게 그녀를 뒤흔들며 그는 부르짖었다.

그녀는 놀라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아치 가나드씨 댁에 가서 고기를 좀 얻어 올 수 없어요?"

로니는 다시 돌층계에 주저앉았다. 그는 두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 두 팔을 힘없이 드리우며 턱을 가슴팍에 떨어뜨렸다.

"미안해" 그는 거의 들릴락 말락 중얼거렸다.

"난 배가 고프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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