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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영화감상문

제목 파도 위의 여성들
글쓴이 정유진

지난 928일은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 중절을 위한 국제 행동의 날이었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주말 도심 곳곳에서 여러 행사들이 열렸습니다. 사람들은 모여 형법상에 명시되어 있는 낙태죄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현재 낙태죄는 형법 제269조와 제270조에 명기돼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 임신중절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모자보건법 제14조에 의거해 몇 가지 예외사항을 두고 있습니다.

한국갤럽이 201610월에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18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필요한 경우는 낙태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은 남·녀 모두에서 74%로 가장 많았습니다. 그 중 낙태가 필요하다고 보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원하지 않은 임신일 때라는 응답이 31%로 가장 많았습니다. 원치 않은 임신은 현행 모자모건법상 낙태 허용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 위법행위입니다. 그 외의 이유들 중 현행법상 낙태 허용범위에 해당하는 항목들의 합산 응답률은 28%에 그칩니다. 따라서 낙태 허용을 원하는 국민들의 72%는 현행 모자보건법에서 정한 사항 이외의 이유로 낙태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낙태가 불법인 나라에서 여성이 낙태를 결정하고 시술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한 형사처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현행 법제는 낙태의 모든 법적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고 있습니다. 처벌 대상은 낙태를 한 여성과 낙태를 도운 의료진일 뿐, 남성과 국가에게는 책임을 묻고 있지 않습니다. 이에 여성은 낙태 여성이라는 낙인과 더불어 사회적인 매장을 모두 혼자서 감내해야 합니다. 다른 선택지로 여성들은 전문가의 도움조차 없이 안전하지 않은 공간에서 불법 시술을 직접 시도합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10분마다 한 명꼴로 여성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1년으로 치면 그 수는 47000명에 이릅니다.

가장 최근에 이뤄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판결은 2012년에 이뤄진 위헌 대 합헌 44로 낙태죄 합헌 판결이었습니다. 결정문에 따르면 합헌 의견은 태아의 생명권을 강조했으며, 위헌 의견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강조했습니다. 이와 같이 낙태죄 폐지에 대한 논쟁은 태아의 생명권여성의 선택권의 대립구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립구도 속에 여성의 재생산 능력과 그로부터 도출되는 재생산권에 대한 인식은 부재합니다. 이는 여성의 신체적 고유성과 그에 따른 성욕의 관점에서 임신과 출산에 대한 통제가 공적으로 논의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재생산이란 임신과 출산뿐 아니라 육아, 양육을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재생산 과정은 공동체 존속의 기초 요소입니다. 그런데 재생산에 직결되는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신체적 고유성과 관련되며, 일차적 양육 역시 대체로 여성이 담당하게 됩니다. 때문에 재생산과 관련된 사회적 규범과 제도는 여성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한편 한국에서 여성의 몸은 인구조절정책의 수단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1960년대 산아제한정책을 펼치던 시기 정부는 암묵적으로 낙태를 종용했으며, 반대로 저출산 시대에 들어서자 낙태죄를 언급하며 가임기 여성지도와 같은 정책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여성의 재생산 능력은 국가의 필요에 따라 활용되면서 그 권리는 묵살되어 왔습니다. 여성의 재생산 과정 전체를 고려하며 낙태죄 문제를 돌아볼 때, 낳을 권리와 낳지 않을 권리를 동시에 보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낙태죄 폐지 자체가 여성의 재생산권을 온전히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낙태죄 폐지는 여성의 건강권 보장을 위한 첫걸음이자, 여성의 성욕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는 첫걸음이며, 여성의 재생산권을 사고하는 첫걸음입니다. 낙태가 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이러한 여권신장을 위한 공론화의 장이 형성되기에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어떠한 사회적 조건에서 여성의 몸과 신체가 여성의 자율적인 통제 권한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활용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여성과 남성의 비대칭적인 관계를 재생산하는 현실의 제도에 대한 변화를 고민해야 합니다. ‘낙태죄 폐지를 시작으로 여성이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선택을 구체적으로 설득해 나가야 합니다.

파도 위의 여성들은 네덜란드 의사 레베카 곰퍼츠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습니다. 이들은 임신중절이 불법인 국가의 영해를 벗어나, 그 나라의 법이 적용되지 않는 국제수역으로 배를 타고 가서 시술을 합니다. 영화는 임신중절이 불법인 국가의 여성들에게도 낳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여성을 돕는 여성들의 존재와 힘을 담은 작품입니다.


성균관대학교 사회복지학과 18학번 정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