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찾는 전날이라 마음이 바쁘다. 나이에 맞지 않게 희어진 머리칼에 검정 물을 들이기도 하고 물놀이 준비며, 읽을 책도 빠뜨리지 않는다. 왠지 바쁜 마음이 되어 안절부절 못한다. 계속된 비로 물난리를 겪는 터라 가벼운 걸음은 아니지만, 계획된 떠남이라 다녀오기로 했다. 고향이 없는 사람은 고향을 모른다고 하였던 친구가 떠오르며 왠지 가슴이 아려왔다. 그는 자신이 성장한 곳이 없다고 한다. 부산의 변두리 어디에, 이제는 살던 곳도 공단으로 변해버리고 아버지 고향 강원도를 고향처럼 생각하지만 아는 친구가 별로 없으니 들러도 고향의 느낌이 없다 한다. 그 서러움을 내가 어찌 알까. 가만히 내 준비물을 생각하여 본다. 그저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만 오면 되겠지…. 그 따뜻함을, 여유를, 겸손을 배우며 말이다. 이번엔 바다를 보며 울지 않으리라. 탯줄에서부터 스며든 바다의 기운은 눈물이 많은 아이로 길들게 하였고, 그 눈물들로 바다의 짠맛은 더 해 갔으리라. 그러나 바다는 질책하지 않았고 따뜻한 영혼을 갖게 하여 주었다. 실로 감사함을 느끼며 살아온 그와의 인연이다. 이런 상념들로, 계속되는 빗소리를 들으며 얼마 전 글벗에게 건네받은 시집을 가방에 넣으며 활짝 갠 내일을 기원한다.

아침에 눈 뜨면 창가에 두드림이 있는지 귀 기울이는 습관이 생겨났다. 벌써 열흘 넘게 내리는 비다. 내리는 빗소리가 적이 걱정되지만, 가족들과 새벽 빗속을 나섰다. 거제도를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날씨 탓으로 하여 '카페리'를 택하였다. 진해에 조금 못 미치는 곳에 도착하여 거제행 배 위로 올랐다. 차 안에 앉아 빗속 바다 위를 달리는 기분이 사뭇 특별나다. 날씨에 의한 우울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유쾌한 여름으로 내달린다. 아이들의 신나는 목소리가 차 안 아늑함과 어울려 들뜬 분위기가 된다. 차창으로 점점이 펼쳐지는 다도해의 안개에 휩싸인 모습들, 아! 이 비경, 탄성이 절로 나온다. 안개 위로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 지금 이 순간은 비가 있어 그 운치를 더해준다. 감탄하며 즐기는데 느닷없이 큰아이가 단소를 꺼내 불기 시작한다. 딴에는 음악의 필요성을 느꼈으리라. 배우는 단계라 능숙하진 않지만 여러 곡을 연주한다. 투박하게 울리는 소리가 차 안을 채우고 비속 멀리 섬들에까지 울려 나가는 느낌이다. 아내도 덩달아 콧노래를 한다. 단소 소리에 맞춰 안개들이 서서히 움직인다. 잠시 비가 개는 듯했다. 40여 분의 바다 위 여행은 달콤하게 끝이 나고 뱃고동을 울린다.

8월 15일이다. 광복절을 기림도 좋겠지만, 이날은 일 년에 한 번은 치러야 하는 집안의 벌초하는 날이다. 계획성 없이 서로 연락 취해 행하여 오던 연례행사를 매년 이날로 정하여 놓은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뜨거움의 절정인 여름의 중간에 행사를 치름을 반대하는 이가 많았으나, 집안에 공무원이 여럿 있는 관계로 하여 결정하게 되었다. 내 형제와 사촌으로 구성된 정예요원 15명, 뒷짐 지고 물러나 계셔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 분의 감시단, 언제인가부터 은근슬쩍 이 그룹에 속해져 버린 나, 참석률이 저조한 스물여섯 명으로 구성된 조카 군단 그리고 다수의 진행요원인 아주머니 여단, 쉰다섯 명 정도의 그야말로 대규모 집단이다. 김수로왕의 두, 용, 곤 자 돌림의 3대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다.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가실 줄 모르신다. 이 정도 번창하였으니 당신께선 조상님들에게 도리를 다하였음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여름의 한중간이라 땀범벅이 되어 곤욕을 치른다. 3개 조로 나누어 이른 새벽부터 시작하면 오전 11시경이면 마무리되고 맛있는 국밥으로 늦은 아침을 해결한다. 워낙 조상님이 많고 또 왜 그렇게도 떨어져 사시는지 후손들은 원망도 한다. 풀 깎는 기계의 등장으로 수월해진 작업이지만 그전에도 작업의 빠르기는 여전하였다. 평생 농군이셨던 아버지의 낫질 솜씨는 언젠가 '풀베기 대회' 거제 챔피언 타이틀을 가졌던 분이고 보니 후손들의 낫질 솜씨도 그렇게 뒤지지는 않는다. 모두 조상 돌보는 일이라 게으름은 없다. 흩어져 있는 묘소들을 한곳으로 모시는 계획을 하는 것으로 안다. 그러면 우리네 후손들은 조금 수월하게 조상들을 돌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큰 행사에는 사촌들 친목회가 있어 지원한다. 형제들 몇은 참석하지 못하는 이도 있으나 불참 시 부과되는 과태료가 무서워(?) 빠지는 이는 거의 없다. 끈끈한 정을 느낀다. 일가친척 간의 만남이 어려워지는 현실에서 이러한 자리가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매년 여름 휴가를 이즈음 정해 놓고서 고향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즐겁고 가벼운데 아내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서울에서의 신혼 시절, 휴가가 다가와 분주한 마음인데 마실 다녀온 아내가 배시시 웃으며 전한다. 이웃들이 어디로 피서 가냐는 질문에 ‘거제도’라고 하였더니 모두 부러워하더란다. 그래서 시댁이 그곳이라고 하였더니 거길 왜 가냐는 말에 한참을 웃었단다. 천혜의 피서지인 거제도이건만 매년 정해져 있는 여름휴가이니 즐거울 리가 없겠다 싶은 마음도 있다. 벌써 20년이 넘게 이러하였으니, 내년 여름에는 다른 휴가계획을 세워야겠다. 사촌 동생 가게에 마련된 점심은 왁자지껄하다. 날씨 탓으로 바닷가에는 나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긴 이야기꽃은 피어나고 있었다. 저녁에는 형제계모임이 이어진다. 순번을 정하여 몇 명이 힘 합쳐 하루 저녁을 책임지고 치러내야 한다. 올해는 우리 조가 벼름이다.

고교 교사인 사촌 동생이 눈을 맞추며 ‘요즘 어떠냐고’ 물어 온다. 불편한 모습으로 사는 형이 안쓰러워서일 것이다. 행복이란 무엇이며 불행이란 또 무엇인가? 저울에 행복을 달면, 불행과 행복이 반반이면 저울이 움직이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행복으로 기울면 행복해진다. 우리 삶에서 단 1%만 더 가지면 행복해지는 것이다. 이 1%는 마음이 다스릴 수 있기에 친구에게 편지를 써 아픔을 나누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조금은 걷어내고 바다의 안개와 별을 떠올리며 잔잔한 그리움을 그려내며 조금의 불행은 덜어내고 행복을 채울 수 있다. 이러한 감성을 지녔기에 동생 물음에 웃음으로 대답했다. 행복하다고…. 즐거움은 이어진다. 내리는 비 따위는 잠시 잊는다. 지척이 모두 파랑을 품은 바다다. 내다본 비 내리는 포구가 고즈넉하니 아름답다. 이렇게 고향에서의 하루는 즐겁고 행복하다. 어릴 적에는 아니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만 해도 내 고향이 이렇게 아름답다고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을 떠나 생활하니 참으로 아름다운 곳임을 늘 자랑한다. 고향에서의 추억을 하나씩 생각해내어 글로 표현하면, 글 벗들은 공감하며 가슴이 아려 온다는 댓글을 엮는다. 고향 다녀온다더니 통째로 옮겨왔다는 너스레를 떨곤 한다.

2015년 광복절이다. 올해도 고향으로 향한다. 이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산소가 늘었다. 몇 해 전 벌초 다녀와 쓴 글 읽으며 그날을 회상하니 감회가 남다르다. 점점 묵어가는 묘들이 많아진다는 생전 아버지 말씀이 기억나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한다. 아직은 공자가 살아 있어야 한다고 한다면 잘못일까. 부모 안 계신 내가 존재할 수 없음이 자명하니 말이다. 내 부모님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님인 것을. 조상을 기릴 줄 아는, 따뜻한 사회가 되기를 기도해 본다. 이제 단소 소리 울리던 안개 속 그 뱃길은 사라졌지만 고향 향하는 길은 어떻든 언제나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