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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좁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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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드(Gide)/ 김재천 옮김
<앞부분 줄거리>
알리사와 제롬은 외사촌 간이다. 어린 시절 함께 교회당에 가서 목사님의 '좁은 문으로 들어 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라는 설교를 듣고 제롬은 알리사를 위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 둘은 점점 자라면서 서로의 사랑을 감지(感知)한다. 한편 알리사의 여동생 줄리에뜨도 제롬을 남모르게 사랑하게 된다. 알리사는 신을 향한 도덕심과 여동생에 대한 염려 때문에, 선뜻 제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둘은 사랑의 안타까움과 아픔만을 간직한 채 세월을 보내고, 그 동안 줄리에뜨는 에두아르와 결혼을 한다.
그런데도 나는 또다시 알리사를 만났다. 그건 3년 후인 여름이 끝날 무렵이었다. 나는 그 이전에 그녀를 통하여 외삼촌의 죽음을 알았었다. 그때 내가 여행하고 있는 팔레스티나에서 곧장 그녀에게 꽤 긴 편지를 보냈지만, 회답이 없는 채로 있었다.
르아브르에 있던 내가 어떤 구실을 만들어 자연스럽게 퐁그즈마르에 갔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알리사를 거기서 만나게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혼자 있지 않으리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 곳에 간다는 것을 미리 알리지 않았다. 여느 때의 방문처럼 나타나는 것이 싫어서 나는 막연하게 찾아갔던 것이다. 들어갈까? 아니면, 차라리 만나지도 말고, 구태여 만나보려고 애쓰지도 말고, 그냥 되돌아서 버릴까?……그래, 그렇게 하자. 가로수길이나 산책하자. 어쩌면 지금도 그녀가 가끔 와 있을지도 모르는 그 벤치에나 앉아 볼까. 그러나 벌써부터 나는 내가 떠나 버린 다음에라도 내가 왔었다는 것을 그녀에게 알려줄 수 있는 무슨 표적을 뒤에 남길 것인가를 궁리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느린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녀를 만나지 않기로 결심을 하고 나자, 나의 가슴을 조이던 조금은 쓸쓸한 슬픔이 거의 달콤한 우울로 바뀌는 것이었다. 벌써 나는 가로수길에 이르렀고, 나는 들키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농가의 마당을 경계짓는 비탈을 따라 길 가장자리를 걸어갔다. 나는 정원 안을 내려다볼 수 있는 비탈의 한 지점을 알고 있었다. 나는 거기로 올라갔다. 내가 알지 못하는 정원사가 오솔길의 잡초를 긁어모으고 있었으나, 이윽고 내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새 울타리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었다. 내가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개가 짖어댔다. 좀더 나아가서 가로수길이 끝날 곳에서 정원의 흙담에 마주치자 오른쪽으로 돌았다. 빠져나온 길과 병행하는 너도밤나무 숲이 있는 곳으로 가는 도중, 채소밭의 작은 문 앞을 지나는 순간, 그대로 정원에 들어가 볼까 하는 생각이 불쑥 나를 사로잡았다.
문은 잠겨 있었다. 그러나 안쪽 빗장이 별로 튼튼하지 못하여, 어깨를 대고 한 번만 밀어도 부서질 정도였다. 바로 그때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는 흙담의 움푹 패인 곳에 몸을 숨겼다. 정원에서 나온 사람이 누구인지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발자국 소리를 듣고서 알리사라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앞으로 몇 걸음 나서더니 힘없이 불렀다.
"제롬, 너니?"
마구 뛰던 심장이 멈췄다. 꽉 메인 목에서는 한마디의 말도 나오지 못하는데, 그녀는 더 크게 불렀다.
"제롬! 너지?"
이렇게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온몸을 조이는 감동이 너무도 벅차 나도 모르게 무릎을 끓어 버렸다. 여전히 내가 대답을 못하고 있자, 알리사는 몇 걸음 앞으로 나와 흙담을 돌았다.
그리고 그녀를 얼른 쳐다보기가 두려운 듯이 팔로 얼굴을 감춘 내 몸에 갑자기 그녀가 느껴졌다. 그녀가 잠시 나에게 몸을 숙인 채로 있는 동안, 나는 그녀의 가냘픈 두 손에 마구 입을 맞추었다.
"왜 숨어 있었니?"
3년 동안의 이별이 마치 며칠밖에 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다만 이렇게 말했다.
"나라는 걸 어떻게 알았니?"
"난 너를 기다리고 있었는 걸."
"네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고?"
나는 말했다. 나는 너무도 놀라서 그녀의 말을 의아한 듯이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자,
"벤치 있는 데로 가자."
그녀는 말했다.
"그래. 나는 너를 다시 한 번 더 만나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 사흘 전부터 저녁마다 나는 여기에 와서 오늘 밤에 한 것처럼 너를 불렀어……. 왜 대답을 하지 않았니?"
"만일 네가 갑자기 오지 않았더라면 난 너를 만나지도 않고 떠나 버렸을 거야."
라고 처음에 기절할 것같이 아찔했던 감동을 억누르며 말했다.
"마침 르아브르를 지나던 길이길래, 저 가로수길이나 산책하며 정원 둘레도 빙 돌아보고, 지금도 네가 와서 앉을 듯 싶은 이회암(泥灰巖) 폐광터에 있는 그 벤치에서 잠시 쉬어 볼까 했던 것 뿐이야. 그리고……."
"사흘 전 저녁부터 내가 여기에 와서 무엇을 읽었는지 좀 보렴."
그녀는 내 말을 막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편지 묶음을 내게 내밀었다. 내가 이탈리아에서 써 보냈던 편지들임을 알았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엄청나게 변해 있었다. 그녀의 야위고 창백한 모습이 나의 가슴을 무섭게 조여왔다. 내 말에 기대고 의지하면서, 마치 추위나 무서움을 타듯 내게 바짝 붙었다. 그녀는 아직도 정식 상복(喪服)차림이었고, 그래서 모자 대신 쓰고 있던 검정 레이스가 그녀의 얼굴을 둘러싸고 있어 더욱 더 창백하게 보이도록 했는지 모른다. 그녀는 미소 짓고 있었으나 실신할 것처럼 보였다.
나는 요즈음도 퐁그즈마르에 그녀 혼자 있는지 어떤지 알고 싶어 물어 보았다. 혼자는 아니었다. 로베르가 그녀와 함께 거기서 살고 있는 것이었다. 줄리에뜨와 에두아르. 그리고 그들의 세 아이들도 그들 곁에서 8월 한 달을 함께 지내려고 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벤치에 다가가서 앉았다. 그리고서도 얼마 동안 평범한 소식을 주고받으면서 대화를 질질 끌었다. 그녀는 내 일에 관해 궁금해 했다. 나는 마지못해 대답을 했다. 이제는 내가 일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는 걸 그녀가 알아 줬으면 싶었다. 그녀가 전에 나를 실망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내가 그녀에게 실망을 느끼게 해주고 싶기도 했다. 생각대로 되었는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녀는 조금도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나로선 원망과 사랑이 동시에 마음에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퉁명스럽게 말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따금 북받쳐 올라오는 감동에 말소리가 떨려 나와 스스로도 원망스러웠다.
조금 전부터 한조각 구름에 가리어 있던 석양이 우리 맞은 편 지평선에 닿을락말락하게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텅 빈 들판을 물결치는 듯한 낙조로 가득 채우고, 우리들의 발 밑에 퍼져 있는 좁은 골짜기를 갑자기 붉은 빛으로 메우다가 이윽고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그것에 현혹되어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나는, 원망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하는 그런 금빛 찬란한 황홀감이 아직도 나를 감싸고, 온몸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이젠 내 마음 속에서는 사랑의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에게 몸을 숙인 채 기대고 있던 알리사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브라우스 속에서 얇은 종이로 싼 아주 섬세한 작은 상자를 꺼내, 내게 그것을 내밀려다가 그만둬 버렸다. 망설이는 것 같았다. 내가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고 있으려니까,
"제롬, 들어봐 여기에 들어 있는 건 내 자수정 십자가 목걸이야. 오랜 전부터 네게 주고 싶었기 때문에 사흘전부터 가지고 다녔어."
"나보고 이걸 어떡하라는 거야?"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에 대한 추억으로 이걸 간직하고 있다가 네 딸에게 주었으면 하고."
"무슨 딸 말이야?"
나는 무슨 말인지 깨닫지 못하고 알리사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내가 하는 말을 침착하게 잘 들어줘, 제발. 아니, 그렇게 쳐다보지는 말고. 벌써부터 네게 말하기가 몹시 힘들어. 하지만 이건 네게 꼭 말하고 싶어. 제롬 들어봐, 어느 날엔가 너도 결혼할 게 아니니? ……아냐, 내 말에 대답하진 마. 내 말을 막지 말고, 제발 내가 바라는 건 다만, 내가 너를 몹시 사랑했었다는 것을 네가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것 뿐이야. 그래서……벌써 오래 전부터…… 삼 년 전부터……나는 네가 좋아하던 이 작은 십자가를, 네 딸이 어느 날엔가 내 기념으로 그걸 달리라는 것을 생각해 왔어. 오! 물론 누구 것인지는 모르고서……. 그리고 어쩌면 그애에겐…… 내 이름을 붙여 줄 수도 있을 거라고……."
목이 메인 그녀는 말을 멈추었다. 나는 거의 적의를 품고 소리쳤다.
"알리사가 직접 그애에게 주지 않는 것은 뭣 때문이지?"
그녀는 더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은 흐느끼는 어린애의 입술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이상하리 만큼 빛을 뿜는 그녀의 눈길은 그녀의 얼굴을 초인간적이고 천사 같은 아름다움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알리사! 내가 도대체 누구하고 결혼하겠니? 난 너밖에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너도 이미 알고 있으면서……."
그리고는 별안간 미친 듯이 거의 난폭하다고 할 만큼 그녀를 내 팔 안에 끌어안으며, 그녀의 얼굴에 내 빰을 부벼댔다. 나는 얼마 동안 온몸을 내맡긴 듯이 반쯤 몸을 뒤로 젖히고 있는 그녀를 꼭 안고 있었다 그녀의 눈길이 그늘져 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눈꺼풀이 차츰 닫혀지고, 더할 수 없이 분명하고도 아름다운 음성으로,
"우리 둘을 불쌍히 여겨 줘, 제롬! 아! 우리의 사랑을 망가뜨리지마."
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아마 그녀는 이렇게 말했으리라.
"비열한 짓 하지 마!"
라고. 아니, 어쩌면 그건 내가 나 자신에게 한 말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아무튼 나는 갑자기 그녀 앞에 몸을 던져 무릎을 꿇고 그녀를 경건하게 팔로 감싸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나를 사랑했으면서 언제나 나를 밀쳐 냈던 건 웬일이지? 잘 들어봐! 처음에 난 줄리에뜨의 결혼을 기다렸어. 너 역시 그 애의 행복을 기다리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었어. 그리고 그녀는 지금 행복해. 그건 네가 해준 말이기도 하지. 그 다음에는 네가 계속해서 네 아버지 곁에서 살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나는 오랫동안 믿어왔어. 하지만 이젠 우리 단둘 뿐이야."
"오! 지나간 일을 아쉬워하진 마."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미 나는 미련 없이 지난 일들을 잊었어."
"그러나 아직도 늦지는 않아. 알리사."
"아니야, 제롬. 이젠 늦었어. 우리 서로가 사랑을 통하여 사랑보다 더 훌륭한 것을 막연하게 예감한 그 날로부터 때는 이미 늦었던 거야. 제롬 덕택에 내 꿈은 이 세상의 어떤 행복도 도저히 미칠 수 없을 만큼 높이 올라갔어. 나는 종종 우리가 서로 같이 생활하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 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어. 그렇지만 혹시 우리의 사랑이 더 이상 완전치 못하게 되면,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어……. 우리의 사랑을 말이야."
"서로가 없는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도 생각해 보았어?"
"아니 한번도."
"이제는 너도 알 거야! 삼 년 전부터 나는 너 없이 고통스럽게 헤매다녔어……."
밤이 내리고 있었다.
"추워." 하며 몸을 일으키고는 내가 다시 자기의 팔을 붙잡지 못하도록 쇼올을 바짝 덮으면서 그녀는 말했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또 혹시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고 궁금하게 하던 그 성경 구절을 기억하겠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豫備)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
"그 말을 너는 아직도 믿고 있니?"
"그걸 믿어야 해."
우리는 잠시 동안 아무 말 않고 나란히 걸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걸 생각해 보렴, 제롬. 그 '더 좋은 것'을!"
그러자 그녀의 눈에선 갑자기 눈물이 솟아나왔다. 그러면서 그녀는 여전히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 '더 좋은 것'을!" 이라고.
우리는 조금 전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보았던 채소밭의 그 작은 문 앞에 또다시 오게 되었다. 그녀는 나를 돌아보았다.
"잘 가!"
그녀가 말했다.
"아니, 더이상 오지 말아. 아듀, 나의 사랑하는 벗. '더 좋은 것'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한동안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붙잡는 듯, 또 자기로부터 나를 밀어내려는 듯, 팔을 내밀어 내 어깨에 손을 얹고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이 가득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고, 문 뒤에서 빗장을 지르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더 참을 수 없이 북받쳐 오르는 절망에 사로 잡혀 그 문에 기댄 채 쓰러졌다. 밤이 깊도록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면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후략>
<뒷부분 줄거리>
뒷날 제롬은 알리사의 죽음을 통보 받고 슬퍼하면서 알리사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채 일생을 독신으로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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